우리의 삶은 혼자 있는 시간과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으로 이루어진다.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행복의 조건은 혼자서도 잘 지내고 다른 사람과 함께도 잘 지내는 것이다.인생의 두 가지 지향성 : 자유와 사랑우리 인생은 복잡한 듯하지만 두 가지 지향성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과 친밀
제가 태어난 곳은 유배문화 흔적이 남아있는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입니다. 1952년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냈고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섬에서 살았습니다. 임자도에는 초등학교가 세 곳 있었고, 중·고교는 목포로 나와 하숙이나 자취를 하면서 공부를 했는데 그나마 목포의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은 초등학교 졸업생 가운데 40% 정도였습니다.진학하지 못한 졸업생은 가업인 농사일이나 어업을 익히거나 어릴 때부터 도시로 나가 공장에 취업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섬에서 태어나면 섬사람들의 애환을 알기에 도시에 부귀영화가 있다고 믿고
조신 스님의 꿈속 세상은 참으로 괴로웠지요? 오늘은 괴로운 꿈 이야기와는 좀 다른 꿈 이야기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구운몽(九雲夢)〉 이야기입니다. 글자 그대로 ‘아홉 구름의 꿈’이라는 뜻이지요. 아홉 구름이란 이 소설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성진 스님과 팔선녀를 가리킵니다. 즉, 그 아홉 사람의 꿈이란 말이지요. 본디 스님과 선녀인데 계(戒)를 범하여 하계로 쫓겨나지요. 이 속세에서 좋은 인연을 엮어 가면서 잘 살다 깨어보니 한바탕의 꿈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조신 스님의 꿈이 괴롭디괴로운 꿈이었다면,
12세기 후반 고려는 무신집권과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라는 국내외의 커다란 시련에 직면하였다. 무신란(武臣亂)에서 무신집권으로 전환은 왕실을 뒷받침하는 정치세력의 교체이고 무신에 의하여 왕권은 이전보다 제한되었다. 다음 세기 초기 몽골족의 등장과 금에 복속되었던 거란족의 침입이 이어졌다.불교계는 종파별 변화에서 교종인 화엄종과 유가종은 문신과 결합되었다. 개경 부근 승도(僧徒)의 난은 무신의 집권에 대한 저항이었고 문신과 함께 수난을 당하였고 새롭게 종파를 구성한 천태종은 가장 미약한 종파였지만 조계종과 상통하는 선종에 속할 뿐 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1908~2004)의 삶과 그의 사진작품을 대하면서 나는 선사(禪師)의 삶을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이는 그가 삶의 어느 지점에선가 불자가 된 까닭도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전부터 그의 삶과 작품은 불교적이었고 선이었기 때문이다.불교는 눈에 보이는 외형적 삶과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삶을 다 아우른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본래 마음자리를 그려내고 대중에게 알려주기 위해 선사들은 흔히 상징과 함축으로 가득한 선시와 선문답을 사용했다. 나 역시 젊은 시절
돌아간다는 말은 왠지 모르게 아늑함이 느껴집니다. 앞으로만 나아가던 발길을 되돌리는 그 끝에는 집이 있지요. 하루 일과를 마치면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에는 피붙이가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온갖 물건들이 있고, 내가 써서 내 체취가 밴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나’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바깥에서의 가식적이고 사무적인 가면을 집에서는 벗습니다. 쉬고 싶을 때 우리는 모두 집을 찾습니다.평생 타지에서 지낸 이들도 죽을 때 고향을 찾습니다. 여우조차도 죽을 때 자기가 살던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고 합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인생의 변곡점에서 나를 낳아준 부모에 대해 애틋한 생각을 하는 경험을 해본다. 부모님이 아프거나 돌아가실 때, 내게 인생의 기쁨이나 고달픔이 닥칠 때, 때로는 내가 부모에게 위로나 상처가 되는 말을 할 때, 뒤돌아서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훔쳐보기도 한다. 1,300년 전 신라의 고도 경주에는 부모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세운 사찰인 감산사(甘山寺)가 있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 3층 불교조각실에 있는 국보 감산사(甘山寺)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은 이 사찰 터에서 옮겨온 불상이다.불상 뒤의 명문과
상월원각대조사께서 단양 구인사 창건을 통해 한국 천태종을 중창한 이후 천태불교는 대한민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뭍에서 꽃을 피운 천태의 법음은 바다 건너 외딴 섬에도 전해져 섬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불심을 싹 틔웠다. 현재 일부 섬은 다리가 놓여 승용차로도 오갈 수 있고,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기도를 하거나 하룻밤 묵을 수도 있다. 여름바다가 있는 천태사찰을 울릉도-남해-제주도 순으로 소개한다.1. 울릉도 삼도사·성인사·해도사― 글 조용주 기자신비의 섬 ‘울릉도’서50년 간 천태법화 꽃피워대한민국이지만 쉽게 갈 수 없고, 대부분
청동은입사향(고려시대, 높이 13.5cm, 폭 10cm)청동으로 주조한 원통형 합에 범자문(梵字紋)과 기하학적 문양을 은입사로 시문(施文)했다.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은입사 기법이 잘 표현되어 있다.만자문목침(조선시대, 높이 10cm, 폭 31cm)나무로 만든 베개는 ‘목침’으로 통칭(通稱)한다. 목침은 낮잠[午睡]를 자거나 잠시 누울 때 머리를 받치는 용도이다. 백제 무령왕비 관에서 출토된 목침이 가장 오래됐다. 이 유물은 판재(板材)로 짜서 복판에 풍혈(風穴)이 있으며, 양 측면에 만자문(卍字紋)을 넣
낙화 눈보라집으로 들어오는 골목 초입에 큰 벚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여러 날 밤낮에 벚꽃을 활짝 피우고 있더니 오늘 낮에는 그 꽃잎들을 바람결에 날려 보내고 있었다. 작고, 얇고, 연하게 분홍의 색감이 있고, 또 어떤 것은 흰빛인 잎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첫 눈보라 같았다. 전혀 차갑지는 않고 다만 설렘만 있는 첫 눈보라 같았다. 낙화이되 이런 장관이 또 있을까 싶었다. 저 낙화의 장관이 봄날의 표정이요 봄날의 문양이 아닐까 싶었다. 떠나갈 적에 저와 같은 뒷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닷새 엿새 밤낮에 걸쳐 벚나무는 꽃
“그래도, 니는 꼭 될끼다.”첫 딸을 낳았다. ‘위로’라는 말이 떠올랐다. 위로가 되었다. 내가 새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에 감사했으며, 아기의 웃음 안에서 내 웃음을 찾기 시작했다. ‘내 아기’·‘내 딸’이라는 발음에는 무한 책임도 있지만, 그와 함께 무한 행복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내가 엄마가 되다니. 내 어머니의 고충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는 죄의식을 나는 그때 느꼈다. 그것은 죄였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아기가 웃으면 세상 번뇌가 다 날아갔다. 아기를 안고 있으면 마치 천사가 날 업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결코 이
통도사는 가마솥밥과 누룽지가 유명하다. 신문·방송이나 SNS를 통해 통도사의 밥 짓는 모습을 보면 ‘굳이 별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더라도 수행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가마솥에서 떼어낸 커다란 누룽지를 보고 나면 스님의 솜씨에 놀라게 된다. ‘어떻게 저렇게 큰 누룽지를 부러뜨리지도 않고 떼어낼 수 있지? 집에서 몇 사람 먹을 분량의 밥을 하는 솥에서도 누룽지를 부러뜨리지 않고 떼기는 힘든데…….’외할머니 재 지낸 날 가마솥밥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희미한데, 초등학교 3학년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인천의 한 사찰에서 할
부처님이 제시한행복에 이르는 길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불행에 빠지는 이유는 행복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지니거나 행복에 이르는 올바른 길을 모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모든 번뇌에서 해방된 평정심의 상태를 최고의 행복으로 여겼다. 어떤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부동심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겼다. 부처님은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복에 이르는 올바른 길을 제시했다.행복을 추구하는 두 가지 방법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구분할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고려의 전성기를 살았던 왕자로 출가하였다. 개인도 국가도 전성기의 경험을 되살려 개선하지 않으면 나태해진다. 정치세력도 사회도 경험과 시행착오를 곱씹으면서 날로 새로워지도록 노력해야 젊어지고 국가도 희망이 보인다. 고려 문종의 재위 중에 넷째 아들로 태어난 의천은 당시의 분위기에 안주하지 않고 불교계의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지식과 방향을 모색한 끝없는 사상의 탐구자였다.‘대각국사’란 시호이고 ‘석가’를 의미하는 존칭이다. 그의 본래 이름은 ‘후(煦)’였으나 그가 송(宋)을 찾았던 시기 철종의 이
〈범망경(梵網經)〉에는 ‘열 가지 선근인연(善根因緣)’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이 중 부부는 7,000겁의 선근인연이 있어야 맺어진다고 하니, 부부의 연 맺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이성이 만나 가정을 이룬다는 건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부처님 품 안에서 만나 부부가 되고 아이를 낳고 알콩달콩 살아가는 세 쌍의 천태불자를 만나 그들의 삶과 신행을 들어봤다.▲ 부산 삼광사 박진원·문서영 부부“청년회 볼링 소모임서 인연신행활동 든든한 도반이죠”― 글 문지연 기자‘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이
고타마 붓다 재세 시에 파타차라(Paṭācārā Therī)는 사밧티(Sāvatthi) 시에 살던 한 부자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성년이 되었을 때 막일을 하던 집안의 하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녀의 부모가 부자집 아들과 약혼을 주선했을 때, 그녀는 약혼 전날 사랑하는 하인에게 함께 도망을 가자고 말했습니다. 하인은 함께 도망갈 것을 약속하고, 조금이나마 저축한 돈을 가져왔습니다. 두 연인은 살금살금 파타차라의 집에서 빠져나와 사밧티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로 피신했습니다.남편과 두 아이를 잃다부자의 딸이었던 파타차라는 곧
강단에 서는 일은 영광스럽습니다. 그동안 공부해온 세월이 헛되지 않아서 내가 쌓아온 지식의 결과물을 알토란처럼 깔끔하고 말끔하게 다듬어 대중에게 내보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강단에 서려면 다루는 분야에 대한 해박한 이해가 가장 우선이고, 그걸 대중에게 정확하고 쉽게 전달하는 능력도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강사 자신이 그 분야에 왜 관심을 가지고 일생을 걸고서 파고들었는지 동기가 뚜렷해야 하고, 무엇을 전달할 것인지 그 내용에도 알맹이가 담겨있어야 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공부를 위해서 읽고 사색하고 납득하고 꿰뚫었다 하더라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사찰에서는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아기 부처님을 법당 앞에 모시고 관불의식(灌佛儀式)을 행한다.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자세는 태어난 직후 ‘첫 일곱 걸음을 걷고 탄생게를 읊은 순간’을 상징하고, 깨끗한 물을 불상의 정수리에 부어 불상을 씻는 관불의식은 아기 부처님이 태어났을 때 나가(Naga, 용)들 또는 인드라와 브라흐만이 깨끗한 물로 씻어준 ‘첫 목욕’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관불의식은 첫 일곱 걸음과 탄생게, 첫 목욕이라는 부처님 탄생의 순간을 기념하는 상징적인 의례이다.탄생불의 여러 형태천상천하
불기 2567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문득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느 날 한순간에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오랜 세월 발전하고 진화하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 세상이 이루어졌습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값진 발명품이 문명의 발전을 앞당겼고,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이 나쁜 관습을 깨뜨리는 데 기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세상이 있기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화합과 질서’입니다.화합과 질서는 인류가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공동가치입니다. 이것이 깨지면 전쟁이 발발했고, 이것이 무너지
전미경 2023년 作자연, 공존 03 _ 28x20cm _ 종이에 자연물 전미경 작가는 일곱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작품 ‘공작새’와 ‘세레나데2’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실렸다. 저서로 〈풀꽃으로 그리는 그림 압화〉·〈풀꽃 그림〉·〈풀꽃으로 그린 풍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