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호

〈범망경(梵網經)〉에는 ‘열 가지 선근인연(善根因緣)’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이 중 부부는 7,000겁의 선근인연이 있어야 맺어진다고 하니, 부부의 연 맺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이성이 만나 가정을 이룬다는 건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부처님 품 안에서 만나 부부가 되고 아이를 낳고 알콩달콩 살아가는 세 쌍의 천태불자를 만나 그들의 삶과 신행을 들어봤다.

천태종중앙청년회 여부회장·삼광사청년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서영 씨를 돕기 위해 진원 씨도 종단과 사찰에 서 봉행하는 다양한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천태종중앙청년회 여부회장·삼광사청년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서영 씨를 돕기 위해 진원 씨도 종단과 사찰에 서 봉행하는 다양한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 부산 삼광사 박진원·문서영 부부

“청년회 볼링 소모임서 인연
신행활동 든든한 도반이죠”

― 글 문지연 기자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이 있다. ‘인과의 법칙에 의해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환경이 조성될 때 일어나는’ 일을 의미한다. 시절인연에 따라 우리는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의 인연을 반복한다. 부산 삼광사(주지 영제 스님)에는 ‘천태불자’란 인연으로 만나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가는 부부가 있다. 바로 박진원(50)·문서영(47) 부부다.

‘천태불자’ 공통점에 호감 느껴

박진원·문서영 부부가 처음 만난 장소는 사찰이나 법당이 아닌, ‘볼링장’이다. 두 사람 모두 삼광사 청년회원이었지만, 서로의 활동영역이 달라 평소에는 만날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삼광사 청년회에서 볼링소모임 ‘백야’를 개설했다. 진원 씨는 소모임의 볼링지도사로, 서영 씨는 회원으로 참석한 게 두 사람 인연의 시작이다.

서영 씨는 사교적이고 활발한 성격이라 늘 눈에 띄었다. 진원 씨는 그런 서영 씨를 보며 ‘참 밝은 사람이라 보기 좋다.’고 느끼며 호감을 가졌다. 볼링소모임이 지속되면서 두 사람도 자주 만나게 됐다. 진원 씨는 서영 씨와 함께 볼링을 치고, 뒤풀이에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공통점이 많다는 걸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늘 당차고 밝게 웃는 서영 씨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소극적인 자신과 달리 항상 자신감 있고 진취적인 모습도 매력적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바쁜 일정을 쪼개 청년회 법회에도 자주 참석했다. 진원 씨는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새 서영 씨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작은 호감에서 시작된 마음은 점차 커져갔다. 진원 씨는 서영 씨와 함께 하는 미래를 그리며 마음을 전할 방법을 고민하던 중 서영 씨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남자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상심했어요. 그래서 제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다는, 제게는 무척이나 반가웠던 소식이 들려왔어요. ‘어쩌면 부처님이 주신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연스럽게 제 마음을 전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서영 씨는 처음에 진원 씨의 적극적인 호감 표현을 친한 오빠·동생 사이의 호의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다 보니 큰 부담 없이 진원 씨를 만났고, 오히려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소소한 대화나 고민상담 등을 나누면서 만남의 자리가 늘어났다. 자연스레 서영 씨도 진원 씨의 마음을 눈치챘고, 두 사람은 소위 말하는 ‘썸’을 타게 됐다.

두 사람이 급속도로 가까워진 중요한 요소는 당연하게도 ‘천태불자’란 공통점이다. 진원 씨의 어머니는 부산 광명사 총무를 맡는 등 신행활동에 적극 참여해 온 신심돈독한 천태불자다. 그도 자연스레 어머니를 따라 광명사에 다녔고, 어린이회·학생회에서 활동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신심을 다졌다. 특히 광명사 학생회에서 부회장을 맡을 정도로 신행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삼광사 학생회·청년회가 활성화되면서 진원 씨도 삼광사로 옮겼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학업에 바빠 사찰을 찾는 날이 줄어들었다. 이후 군복무와 취업 등 생업에 바빠 사찰행사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다.

서영 씨도 어머니를 따라 삼광사를 다닌 게 천태종 인연의 시작이다. 삼광사 어린이법회에서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신심을 키웠고, 자연스레 학생회에도 참여하게 됐다. 중학교 때는 사춘기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과 함께 하는 신행활동에 부담을 느꼈고, 고등학교 입학과 함께 ‘학업에 전념하고 싶다.’는 핑계로 사찰에 나가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어머니가 “절에 가서 봉사를 좀 하는 게 어떻겠니?”하며 넌지시 건넨 권유에 다시 삼광사에 다니게 됐다. 사춘기 때와 달리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재미 있었고, 청년회 회보인 ‘해광(海光)’의 편집부장을 맡으며 신행활동의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볼링소모임이 인연이 돼 만남을 시작한 두 사람은 2003년 가을 진원 씨의 고백으로 정식 교제를 시작했다.

부부는 결혼을 하고 나서야 삼광사 학생회 시절 수련법회(19 89년 경)에 함께 참석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맨 뒷줄 가운데 학생이 박진원 씨, 맨 앞줄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 학생이 문서영 씨다. 
부부는 결혼을 하고 나서야 삼광사 학생회 시절 수련법회(19 89년 경)에 함께 참석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맨 뒷줄 가운데 학생이 박진원 씨, 맨 앞줄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 학생이 문서영 씨다. 

온 가족이 환영한 ‘천태부부’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면서, 진원 씨는 서영 씨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당시 진원 씨는 모 기업의 보안요원으로, 서영 씨는 치기공사(齒技工士)로 일했다. 주·야간 교대로 일을 해야 했던 진원 씨는 야간 근무가 끝나는 날이면 퇴근 후 곧장 서영 씨 집으로 향했고, 차를 운전해 직장까지 데려다줬다. 혹여 바쁜 아침시간에 서영 씨가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할까봐 항상 소화가 잘 되는 죽을 준비했다. 이런 진원 씨의 정성에 서영 씨는 늘 고마움을 느꼈다. 서영 씨도 진원 씨가 야간근무를 서는 날이면 종종 도시락을 싸서 깜짝 방문을 하는 등 소소한 애정을 쌓으며 달달한 연애생활을 즐겼다.

삼광사는 단연 두 사람의 주요 데이트 장소였다. 서영 씨가 사찰 각종 행사에 적극 참여하다 보니, 진원 씨도 자연스레 자주 사찰에 가게 됐다. 두 사람은 늘 함께 봉사활동을 하고, 관음주송을 하거나 경내를 거닐며 이야기를 나눴다. 사귄다는 사실을 알리지는 않았지만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 어느새 삼광사 공식 커플이 됐다.

두 사람의 교제 소식을 가장 반긴 사람은 진원 씨의 어머니였다. 진원 씨가 혼기가 꽉 찬 나이이기도 했고, 서영 씨가 천태종 신도라는 사실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하셨다. 또 생업에 바빠 좀처럼 사찰에 오지 않던 아들이 서영 씨를 따라 적극적으로 사찰 행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기뻐하셨다. 그의 어머니는 “좋은 사람을 놓치기 전에 서둘러 결혼하라.”며 두 사람의 교제를 응원했다.

“당시에 시어머니가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계셨는데, 빨리 상견례 날짜를 잡자고 성화셨어요. 반대로 저희 부모님은 조금 더 천천히 해도 되지 않겠냐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저도 오빠와의 결혼생활을 기대하고 있던 터라 상견례를 미루자고 하진 않았어요. 얼마 뒤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상견례를 했는데, 분위기가 무척 화목했어요. 아마 양가의 어머님이 모두 천태종 신도였던 게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상견례 후 두 사람은 본격적인 결혼 준비에 나섰다. 결혼 날짜는 진원 씨의 어머니가 당시 삼광사 총무를 맡고 있던 덕재 스님의 도움을 받았다. 덕재 스님은 결혼식 날짜를 4월 17일로 추천해 주셨는데, 3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두 사람은 촉박한 일정 때문에 고민했지만, 일단 해보자며 의기투합했다.

걱정과 고민이 무색하게도 결혼 준비는 순조로웠다. 식장 예약부터 신혼집 마련까지 일사천리였다. 양가 부모님도 두 팔을 걷어붙이고 결혼 준비를 도왔고, 2005년 4월 17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알콩달콩 신혼생활을 즐겼다. 신혼부부가 그렇듯 진원 씨와 서영 씨도 매 순간이 행복했다. 간혹 의견 차이로 다투기도 했지만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처럼 금세 서로를 이해하고, 풀어지곤 했다.

그런데 금실(琴瑟)이 좋은 두 사람도 큰 고민이 있었다. 바로 2세 문제. 신혼 초에는 ‘천천히 아이를 갖자.’며 편안하게 생각했는데, 결혼 1년 후에도 아이 소식이 없자 걱정이 커졌다. 혹시 모를 불안감에 부부는 임신클리닉에 다니며 2세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서영 씨는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다. 혹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조바심도 들었다. 답답한 마음이 들 때마다 삼광사를 찾았다. 조용히 경내를 거닐고, 관음주송을 하며 소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곤 했다. 그런 서영 씨의 옆에는 항상 진원 씨가 묵묵히 함께했다.

부부는 임신클리닉을 다니며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했지만, 2세와의 인연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병원에서 ‘인공수정’을 제안했고, 상의 끝에 임신클리닉을 잠시 멈추기로 했다. 한동안 두 사람은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면서 신행활동을 하며 일상을 보냈다. 임신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해졌고, 생활도 즐거웠다. 몇 개월 후 다시 임신클리닉을 찾아간 부부는 그 자리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2세 소식을 듣게 됐다. 2007년 12월, 온 가족의 축복 속에 아들 준영 군이 태어났다. 준영 군의 이름은 부부의 결혼 날짜를 정해주었던 덕재 스님이 지어주셨다.

부산 삼광사 청년회의 볼링 소모임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박진원·문서영 부부와 아들 준영 군. 온 가족이 모두 신심돈독한 천태불자다. 
부산 삼광사 청년회의 볼링 소모임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박진원·문서영 부부와 아들 준영 군. 온 가족이 모두 신심돈독한 천태불자다. 

인생의 ‘동반자’, 신행활동의 ‘도반’

서영 씨는 불자 부부의 큰 장점을 ‘자유로운 신행생활’로 꼽았다. 온 가족이 천태불자이다 보니, 사찰에서의 신행활동은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부부는 늘 준영 군과 함께 정기법회를 비롯한 사찰 대소사에 참여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부부가 사찰행사에 참여하도록 양가 부모님이 번갈아가며 아이를 돌봐줬다. 준영 군도 자연스럽게 모태 천태불자로 자라게 됐다. 부모님을 따라 구인사와 삼광사를 자주 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준영 군이 먼저 “우리 주말에 구인사에 다녀와요!”라고 제안할 정도였다.

신행활동에는 진원 씨보다 서영 씨가 더 적극적이었다. 서영 씨는 2015년 당시 삼광사 총무 성해 스님(현 총무원 교육부장)으로부터 “삼광사 청년회 부회장을 맡아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진원 씨는 서영 씨가 무거운 책임감으로 마음이 힘들어질 것을 염려해 만류했다. 직책 없이도 신행과 봉사에 참여할 수 있다며 서영 씨를 설득했고, 서영 씨 역시 부담감이 컸다. 그런데 아들 준영 군이 “나도 학교에서 부회장인데, 엄마도 부회장을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영 씨는 아들의 응원에 마음을 굳히고, 간부직을 맡게 됐다.

같은 해 9월에는 천태종 중앙청년회의 여부회장 직책도 맡게 됐다. 서영 씨는 일과 가정, 신행활동의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하는 바쁜 일상을 보내게 됐다.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다 보니, 모든 일을 잘해 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 그녀를 남편인 진원 씨가 앞장서 도왔다. 종단 행사를 위해 먼 길을 가야할 때면 회사에 연차를 내고 운전기사를 자청해 함께 참석했고, 도움이 필요할 때면 마다하지 않고 두 팔을 걷어붙였다. 집안 어른들도 서영 씨가 간부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다.

“시어머니는 제가 간부를 맡았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시며, 응원해주셨어요. 집안의 제사와 종단 행사가 겹치면, 저는 종단 행사에 참여하라고 보내주실 정도였어요. 온 가족의 이해와 응원과 지지는 제가 지금까지 신행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인 셈이죠.”

진원 씨와 서영 씨는 아들 준영 군도 훗날 천태불자를 만나 결혼을 하길 희망한다. 하지만 아들의 인생인 만큼, 강요하지는 않고 두 사람만의 바람으로 남겨둘 생각이다. ‘천태불자’라는 공통점으로 맺어진 박진원·문서영 부부에게 ‘불교’는 종교를 넘어, 두 사람을 연결해준 매개체다. 기나긴 인생의 여정에서 동반자이자 신행활동의 도반으로 함께 나아가는 두 사람이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불연(佛緣)을 이어가길 응원한다.

3월 말 벚꽃이 만발한 대구 동대사를 찾은 장남일·박정미 씨 가족.
3월 말 벚꽃이 만발한 대구 동대사를 찾은 장남일·박정미 씨 가족.

▲ 대구 동대사 장남일·박정미 부부

“10년 얼굴만 알던 청년회원
스님 도움에 3개월만에 결혼”

― 글·사진 이강식 기자

각자 다른 생활환경에서 성장한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과정은 매우 다양하다. 맞선으로, 소개팅으로,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인연을 맺기도 하고, 영화와 소설에나 나올법한 기막힌 인연으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기도 한다. 간혹 정략혼도 있지만 ‘연애 후 결혼’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대구 동대사(주지 도산 스님)에서 신행생활을 하고 있는 장남일(49)·박정미(43) 부부의 결혼 과정은 다소 특이하다.

10년 간 “안녕하세요?” 인사만

장남일 씨는 대구 대성사 청년회 소속으로 천태종 중앙청년회에서 활동했다. 박정미 씨는 서울 관문사 청년회 소속으로 회원과 임원을 맡아 활동했다. 10여 년 세월 동안 두 사람은 서로 얼굴만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구인사 신년하례법회, 천태종 전국청년회 행사, 지역 사찰의 큰 행사에서 만나면 “안녕하세요~”란 인사만 나누는 정도. 그랬던 그들은 두 아이를 낳고 부처님 품안에서 그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부부로 살아가고 있다.

여섯 살 터울인 두 사람의 첫 대화는 “안녕하세요~”였다. 오랜 기간 인사 후에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다소 충격적인 사실은 인사만 나누며 10여 년을 알고 지내면서도 서로의 이름조차 몰랐다는 점이다. 결혼하기로 결정한 그해 여름이 되어서야 알았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서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던 중 남일 씨는 우연찮게 종단 행사와 말사 행사 때마다 마주치는 정미 씨에게 호감이 생겼다. 그러나 이름도, 전화번호도 몰라 여기저기 수소문해야 했다. 어렵게 정미 씨의 연락처를 알아낸 후 전화를 걸었다. 그때가 2011년 6월이었다. 남일 씨는 자신의 이름과 직업 등 자신의 자세한 신상을 정미 씨에게 어필했다. 결과는 퇴짜.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자주 보던 사람인데, 자기의 신상에 대해 얘기하는 걸 보고 나랑 친해지고 싶은 의도가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관문사 청년회 재무부장을 맡고 있을 때였는데, 청년회 활동이 좋아서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고 싶지 않기도 했구요. 요즘 말로 ‘썸’ 타고 싶어서 나에게 전화를 했을 텐데, 그때는 그게 싫어서 ‘부담스럽다’고 말했죠.”

정미 씨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같이 밝히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이후 청년회 일로 통화할 일이 자주 있었는데 정중했지만 거절을 했음에도 남일 씨와 대화하기가 예전보다 편했다. 남일 씨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소문이 전혀 나지 않았고, 자신의 연락처를 물었다는 얘기도 나돌지 않았던 것이 주된 이유 중 하나다.

그해에는 10월까지 종단과 사찰 행사가 여느 해보다 유독 많아서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보는 일도 잦아졌다. ‘거절한 여자’와 ‘거절당한 남자’란 어색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행사 때문에 자주 만나다 보니 어색함은 금세 봄날 눈 녹듯 사라졌다. 남일 씨는 업무차 자주 서울을 오갔는데, 간혹 정미 씨에게 연락해 만남을 가졌다. ‘아재 개그’를 수시로 투척하는 남일 씨와 그 썰렁 개그도 ‘분위기를 바꾸려는 노력’이라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준 정미 씨. 둘 사이에는 미묘한 이성적 감정의 싹이 돋아났다. 어느 해보다도 마주칠 일이 많았던 2011년, 그들에게 ‘결혼운’이 깃들었던 걸까?

그 시기 두 사람은 각자의 고민으로 날마다 각자의 사찰을 찾아 ‘관음주송’을 했다. 남일 씨는 “개인적으로 고민이 많았다. 매일 빠짐없이 대성사에서 기도했다.”며 “그 과정에서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결혼 상대로 머릿속에 정미 씨가 오래 남아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렇다면 정미 씨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2011년 12월 중창조 상월원각대조사님 탄신 100주년을 앞두고 종단에서 관음정진 백만독, 십선실천운동 등 수행 붐이 일었어요. 그때 기도를 많이 했어요. 33세 때라 결혼 생각에 고민도 있었지요. 기도하는 중간에 (남일 씨의 관심을 거절했던 일이) 생각나서 마음이 쓰이더군요. (남일 씨가) 종단 행사를 열심히 다니며 봉사하는 걸 보니 ‘신심은 진심인가보다.’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내가 (사찰에) 수월하게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당시 제게 관심을 보인 남자가 여럿 있었는데, 남일 씨에게 마음을 열게 된 가장 큰 이유예요.”

서로에게 마음을 열었지만, 결혼이 당사자들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다. 정미 씨는 70% 정도 확신은 있었지만, 결혼을 하기에는 30%가 부족했고, 남일 씨도 다르지 않았다. 연애 기간이 없었던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때 남일 씨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큰스님께서 서울 관문사 행사에 오신다니 친견하고 여쭤본 후 결혼 여부를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정미 씨도 집안 어른께 인륜지대사를 여쭙는다는 생각으로 흔쾌히 동의했다.

남일·정미 씨 결혼식 사진. 전 천태종 총무원 교무부장 유정 스님이 주례를 맡았다.
남일·정미 씨 결혼식 사진. 전 천태종 총무원 교무부장 유정 스님이 주례를 맡았다.

택일도 주례도 종단 스님이

남일 씨는 2011년 10월 관문사에서 큰스님을 친견한 자리에서 “이 보살(정미 씨)하고 살아보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하고 여쭈었다. 큰스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삶에 도움이 될 가르침을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착하게 살면 풍요롭게 살 것이다. 그렇게 살아라.”

두 사람은 이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결혼을 결심했다. 이후 결혼식까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일주일 후 정미 씨는 대구 남일 씨 집으로 인사를 갔고, 그 다음 주에는 남일 씨가 여수 정미 씨 고향집으로 인사를 갔다. 당시 대성사와 동대사 주지 도산 스님께 결혼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음력으로 2011년을 넘기지 말고 결혼하라고 택일(擇日)에 조언을 해주었다. 그렇게 2012년 1월 7일로 결혼식 날짜가 잡혔다. 일정은 빠듯했지만, 순조로웠다. 준비는 남일 씨 몫이었다. 남일 씨가 웨딩촬영 준비를 해놓으면 정미 씨가 매주 대구로 내려와 결정하는 식이었다. 주례는 두 사람이 청년회 활동을 하며 인연을 맺었던 유정 스님(전 천태종 총무원 교무부장)이 맡아주셨다.

정미 씨는 “매주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와 결혼식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만약 결혼식 날짜를 천천히 잡았다면, 남편과 결혼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고 웃음 지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다.’는 속담처럼 그들의 결혼식은 마음을 연지 3개월도 안 되어 치러졌다. 데이트라고는 둘이서 단양 구인사를 참배한 게 전부. 연애기간은 아예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이 부부가 됐으니 요즘엔 찾아보기 힘든 결혼 사례임에 틀림없다. 그저 대단한 인연이라 말할 수밖에. 그러니 ‘천생연분’이라 표현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듯하다. 그럼, 두 사람의 결혼소식이 알려졌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을까?

“둘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 단 한 명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다만 청년회에서 같이 활동하는 도반들 중 몇몇이 ‘사귀지도 않고 왜 결혼하냐?’며 의아해했을 뿐이었죠. 당시 중앙청년회장이었던 오순학 회장도 ‘잘됐다.’며 축하해주었습니다.”

남일·정미 씨는 대구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곧장 대성사를 참배하고 신혼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신혼여행을 떠났다. 한 스님께서 “결혼식 때 받은 축복을 호텔 방에 두지 말고 집에서 하루 자면서 두라.”는 조언을 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결혼 12년차에 접어든 부부는 초등학교 4학년인 비슬 양과 지난해 6월에 태어난 보리 양, 두 딸을 키우며 알콩달콩 살고 있다.

남일·정미 씨 부부는 틈날 때마다 사찰에서 봉사를 한다. 지난 3월 26일 대구 동대사를 찾은 부부가 부처님오신날 봉축등 달기 봉사를 하고 있다.
남일·정미 씨 부부는 틈날 때마다 사찰에서 봉사를 한다. 지난 3월 26일 대구 동대사를 찾은 부부가 부처님오신날 봉축등 달기 봉사를 하고 있다.

가족끼리 ‘삼사순례’로 신행문화 만들어

결혼을 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신행생활도 그렇다. 결혼 전 열성적이던 신행생활도 배우자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정미 씨와 남일 씨는 ‘불교’와 ‘천태종’을 공유하고 있기에 결혼 후 신행생활에도 변함이 없었다. 사실 여섯 살 터울인 이 부부는 20대에 천태사찰 청년회원으로 만났지만, 인연의 긴 끈은 어린 시절 각자 고향의 천태종 사찰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싶다.

남일 씨는 중학교 때, 대성사 학생회에 가입해 신행생활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활동은 1993년 군대 전역 후 대성사 청년회에 가입한 후다. 이후 대성사 청년회 교무차장과 사업부장을 거쳐 청년회장을 맡게 됐고, 중앙청년회 사업부장도 역임했다. 정미 씨는 여수 장덕사 신도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천태종과 인연을 맺었고, 종종 구인사에도 함께 다녔다. 여수에서 대학까지 마친 뒤 서울 강남의 한 병원에 취업해 상경했다. 성룡사·삼룡사·관문사 등을 두루 다니다가, 직장과 가까운 관문사 청년회에 가입한 뒤 재무부장 소임을 역임하는 등 지금까지 신행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이같이 돈독한 신심을 가진 이들이 부부가 됐으니, 결혼 후에도 신행생활에 소홀할 리 없다. 천태불자와 결혼을 하면 좋은 점은 뭘까?

“결혼 초기에는 관문사 재무부장 임기가 1년가량 남아 있어서 매주 서울을 오갔어요. 임명장을 받았으니까 임기는 다 채우고 싶었거든요. 종교가 같은 사람, 특히 같은 천태종 불자와 결혼을 해서 가장 좋은 점은 사찰에 가고 싶을 때 배우자 눈치를 보지 않고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를 임신하지 35주 됐을 때도 구인사 적멸보궁에 다녀왔으니까요. 남편이 천태종 불자가 아니었다면 반대를 하지 않았을까요?”

청년회 활동에 열정적이었던 만큼 두 사람은 결혼 후에도 신행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다는 점을 만족해했다. 다만 가끔 쉬고 싶을 때도 한 사람이 사찰에 가자고 하면 거부할 수 없다는 게 단점 아닌 단점. 남일·정미 씨 부부는 요즘 신행생활이 즐겁다. 첫째 비슬 양이 동대사 어린이회를 다니면서 온가족이 사찰에 가는 날만 손꼽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에는 경북지역의 3개 사찰을 순례하는 ‘가족 삼사순례’를 다니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천태종 지역 사찰에 행사가 없을 때는 평소 가보지 못한 사찰로 성지순례를 다녀옵니다. 천태종 사찰 뿐만 아니라 유서 깊은 사찰도 순례하고요. 역사에 대해 배우게 되니 자녀 교육에도 도움이 되더군요. 삼사순례로 우리 가족만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예요. 다른 가족에게도 권하고 싶습니다.”

‘천태종 신도’란 공통분모를 가진 남일·정미 씨 부부. 두 사람은 천태종 청년회 출신이어서 청년회에 애정이 많다. 그래서 요즘 침체된 청년회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특히 미혼인 청년회 후배들에게는 기도를 권했다. 기도를 하면서 자신에게 닥친 여러 문제를 정리할 수 있었다고 경험을 조언한다. 덕분에 결혼을 할 수 있었다는 게 부부의 생각이다.

남일·정미 씨는 부처님 품안에서 만나 자녀를 키우고, 자녀들도 함께 신행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장래에 자녀가 ‘출가’를 하겠다고 희망해도 반대하지 않겠다는 부부. 이들의 단단한 불심에 박수를 보낸다.

천태종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승한·은영 부부가 그랬듯이 규동·지연·보명·보민 네 아이들도 천태불자로써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사진=조용주    기자〉
천태종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승한·은영 부부가 그랬듯이 규동·지연·보명·보민 네 아이들도 천태불자로써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사진=조용주    기자〉

▲ 서울 삼룡사 김승한·박은영 부부

“사찰학생회 함께한 ‘오빠·동생’
봉사활동 하다 ‘여보·당신’ 됐죠.”

― 글 조용주 기자

천태종 서울 삼룡사(주지 문덕 스님)에는 어린 시절 사찰에서 신행활동을 함께 하다가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한 부부가 있다.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 김승한(46)·박은영(44) 부부 이야기다.

부부 모두 모태 천태불자

김승한·박은영 부부는 모두 불교, 그 중에서도 천태종이 모태신앙이다. 승한 씨의 어머니는 평소 구인사를 자주 찾아가 기도했다. 어머니가 구인사로 기도를 갈 때면 아버지가 자동차를 운전해 데려다주곤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구인사를 찾는 주변 이웃까지도 함께 데려다주곤 했다. 어머니의 신앙생활을 적극 지지해준 셈이다.

승한 씨도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구인사를 찾았다. 그는 구인사를 놀이터처럼 생각하며 뛰어놀곤 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때는 서울 신촌 성룡사 어린이회, 중·고등학교 때는 서울 구로 명화사 학생회에서 활동했다. 대학교 때는 춘천 한림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신행활동을 잠시 멈췄지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에 가입해 강원지부 지회장을 맡는 등 신행생활을 꾸준히 이어갔다. 대학 졸업 후에는 천태종중앙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명화사 청년회 활동을 했다. 이 과정에서 은영 씨를 만나 삼룡사 청년회로 옮긴 후 삼룡사 청년회장(2010~2013)을 역임하는 등 현재까지 가족들과 함께 꾸준히 삼룡사에서 신행생활을 하고 있다.

은영 씨의 어머니도 천태불자다. 그녀도 어머니를 따라 구인사를 자주 찾았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삼룡사 학생회에서 활동했다. 성인이 된 후에는 결혼 전까지 삼룡사 청년회에서 재무·부회장을 맡았고, 학생회 지도교사를 하는 등 활발하게 신행과 봉사활동을 이어왔다.

승한·은영 씨는 천태사찰 학생회·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레 서로를 알게 됐다. 천태종에서 개최한 각종 수련회에 참석할 때마다 서로가 있었고, 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곤 했다. 수련회뿐 아니라 사찰 창립법회에서도 자주 만났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오빠·동생 사이로 친해졌고, 행사 때마다 만남을 기대하게 됐다.

“저희가 사찰학생회 활동을 할 때에는 수련회도 자주 열렸고, 사찰 간 연합법회도 자주 봉행했어요. 그러다 보니 서로 자연스럽게 얼굴을 보고, 친해졌고, 각종 행사에도 함께 참여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각자 부모님을 따라 구인사에 갔을 때 마주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승한 씨는 어느 날부터 자신이 은영 씨를 은근히 의식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행사 때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먼저 나서서 일을 도와주고, 거동이 어려운 노보살님들을 챙기고, 부모님과 함께 오는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주는 은영 씨의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금방 친해지는 활발한 성격도 좋았다. 승한 씨는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되면 자신과 같은 천태불자를 만나 연애하고,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그의 이상형이 바로 은영 씨였다. 의식하게 되면 자연스레 신경이 쓰이는 부분도 많아지기 마련. 행사 때 은영 씨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면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과 ‘이번 주는 못 보겠구나.’ 하는 아쉬움이 교차했다. 평소에도 가끔씩 은영 씨가 생각나곤 했다.

은영 씨 역시 행사 때마다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무슨 일이건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승한 씨가 멋있어 보였다. 또 사람들과 두루 소통하며 청년회를 이끌어가는 모습도 든든해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은영 씨의 마음속 한편에도 승한 씨가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은영 씨도 어릴 적부터 승한 씨와 같은 남자를 이상형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됐다. 그렇게 단순히 절오빠·동생 사이었던 그들은 2007년 승한 씨의 고백으로 연인으로 발전했다.

승한·은영 씨는 각종 사찰행사에 함께 참여하며 데이트를 했다. 경주 골굴사 수련회에서. 
승한·은영 씨는 각종 사찰행사에 함께 참여하며 데이트를 했다. 경주 골굴사 수련회에서. 

사 남매 둔 다둥이 가족

연애를 시작했지만, 보통의 연인처럼 알콩달콩한 데이트는 없었다. 과거 절오빠·동생 사이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만남의 장소는 대부분 사찰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연애를 하던 시기에 사찰창립법회, 청년회 체육대회, 천태사찰 삼사순례 등 행사가 너무 많았다. 두 사람은 당연하게 각종 행사에 함께 참여했고, 행사가 끝난 후 뒤풀이에도 함께했다. 그게 그들의 데이트였다.

두 사람의 연애는 스스로 밝히기도 전에 주변 사람들이 먼저 알아챘다. 그도 그럴 것이 청년회 사람들 대부분이 오랫동안 함께 활동한 가족 같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승한 씨와 은영 씨가 교환하는 눈빛만으로도 지인들은 둘의 관계를 알았고, 둘은 삼룡사 청년회가 인정하는 공식 커플이 됐다.

“당시 사찰 행사가 잦다 보니 데이트다운 데이트는 힘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사찰에서 데이트를 한 거죠. 둘 다 사찰에서 봉사하는 일이 우선이었기에, 이로 인한 싸움도 없었고, 오히려 서로에게 더 끌렸죠. 저만 신행활동을 했거나 아내만 신행활동을 했다면 아마 지금 저희 부부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성격 차이로 금방 헤어졌을 테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항상 청년회원이나 도반들과 함께 하다 보니 단둘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던 게 조금 아쉽긴 해요. 그래도 아주 가끔 보통 연인들처럼 평일에 영화도 보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기도 했죠.”

둘의 연애를 가장 반긴 사람은 어머니들이었다. 특히 승한 씨 어머니는 아들의 연애 소식을 듣자마자 ‘결혼’을 강력 주장했다. 승한 씨와 은영 씨도 ‘결혼을 한다면 이 사람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터라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둘은 연애를 시작한 지 8개월 만에 상견례를 했다. 천태불자였던 어머니들은 큰스님께 결혼 날짜를 받고자 했고, 2008년 2월경 받은 날짜는 4월이었다. 결혼 날짜가 너무 촉박했다. 날짜를 전해들은 둘은 ‘과연 두 달 안에 예식장을 예약하고, 신혼집을 구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의외로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려나갔다. 걱정했던 예식장도 희망날짜에 맞춰 예약이 됐고, 신혼집도 수고로움 없이 빠르게 구할 수 있었다. 승한 씨와 은영 씨는 ‘부처님과 종정예하의 가피력으로 인해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은영 씨는 “솔직히 당시에는 두 달 안에 결혼 준비를 마쳐야 한다는 말에 막막하기만 했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남편과 저 모두 부처님과 종정예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일이 잘 풀렸던 것 같아요. 요즘도 남편과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웃곤 해요.”라고 회상했다.

부부는 결혼 후 신기한 경험을 한다. 아이를 계획했던 은영 씨는 산부인과에서 산전검사를 받았을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은영 씨가 임신이 어려울 수 있다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부부는 잠시 낙담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더 열심히 절에 다니며 기도하고 봉사했다. 그래서였을까? 결혼 6개월 만에 임신 소식을 듣게 됐다. 부부는 이 또한 부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3년이 지나 둘째 아이를 낳았고, 다시 2년 후에 생각지도 못했던 쌍둥이까지 건강히 출산했다. 이렇게 승한 씨와 은영 씨는 부처님의 가피로 규동(15)·지연(12)·보명·보민(10) 네 명의 아이들과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승한·은영 씨가 그랬듯이 네 아이도 천태불자의 삶을 살고 있다.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아빠와 엄마까지 천태사찰과 구인사를 자주 가다 보니 아이들도 절에 가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아이들은 승한·은영 씨가 그랬듯이 구인사와 사찰을 놀이터로 생각하며 즐겁게 뛰어다닌다. 부부도 사찰 행사가 있을 때면 항상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 이제는 아이들이 되레 “저희 구인사 언제 가요?”라고 묻곤 한다. 그럴 때마다 부부는 천태불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뿌듯하고, 더 열심히 신행생활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부부는 현재 삼룡사 자부회·자모회에서 각각 활동하고 있다.

2008년 11월 경주 골굴사에서 진행된 천태종중앙청년회 수련법회에 참석한 두 사람의 모습. 뒷줄 오른쪽 네 번째가 승한 씨,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분홍색 상의가 은영 씨다.

“천태부부 늘어 났으면”

같은 종교, 특히 천태불자로 만나 결혼한 것에 대해 지금도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는 부부. 주변에 종교로 인해 갈등을 빚는 가정을 종종 보곤 하는데, 승한·은영 씨는 종교로 인한 갈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특히 같은 불자여도 종단이 다르면 그 종단만의 문화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부부는 물론 시집·처갓집 모두 천태불자이기 때문에 그럴 일도 없다. 또 하나의 장점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활동하며 기도와 봉사는 물론 놀 때도 함께하다 보니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승한·은영 부부는 앞으로 금강불교대학에 입학해 함께 공부하는 게 목표다. 지금은 직장생활과 육아에 바빠 마음으로만 생각하고 있지만, 향후 금강불교대학에 입학해 부처님 가르침을 담은 경전과 불교의 역사에 대해 더 자세히 배우고 싶단다. 또 양가 가족과 함께 전국 천태사찰을 순례하고 싶다고도 말했다.

“천태종 사찰이나 행사에서 어르신들이 늘 하던 말씀이 있어요. 바로 ‘천태불자 끼리 만나서 연을 맺으면 자손도 번성하고, 행복하게 잘 산다.’였죠. 물론 저희는 서로 좋아서 만났는데 어르신들의 말씀처럼 천태불자 끼리 만나서 결혼했더니 자녀도 넷이나 낳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네요.”

천태종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승한·은영 씨는 앞으로 더 많은 천태불자 부부가 탄생해 함께 추억을 공유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대를 잇는 천태불자들이 늘어나 사찰 발전과 포교에도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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