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불심과 효심이
빚어낸 두 불보살상

감산사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 통일신라, 719년,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높이 250cm(좌), 271.5cm(우).
감산사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 통일신라, 719년,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높이 250cm(좌), 271.5cm(우).

살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인생의 변곡점에서 나를 낳아준 부모에 대해 애틋한 생각을 하는 경험을 해본다. 부모님이 아프거나 돌아가실 때, 내게 인생의 기쁨이나 고달픔이 닥칠 때, 때로는 내가 부모에게 위로나 상처가 되는 말을 할 때, 뒤돌아서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훔쳐보기도 한다. 1,300년 전 신라의 고도 경주에는 부모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세운 사찰인 감산사(甘山寺)가 있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 3층 불교조각실에 있는 국보 감산사(甘山寺)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은 이 사찰 터에서 옮겨온 불상이다.

불상 뒤의 명문과 발원자 김지성

박물관 3층 가장 동편에 위치한 감산사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 뒤로 돌아가 보면 거대한 광배 뒷면에 명문이 있다. 처음에는 잘 안 보이지만 찬찬히 보다보면 차츰 우둘투둘한 돌의 표면 위에 날카롭게 새긴 글씨를 볼 수 있다. 광배 뒷면 위쪽부터 아래까지 빼곡하게 새긴 글씨의 수는 미륵보살상에 381자, 아미타불상에 392자가 확인되었다. 이 광배에 새긴 명문으로 두 상이 언제 제작되었고, 발원자가 누구인지, 왜 조성했는지도 알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명문 내용이 일부 축약되어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인용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 고대불교조각은 불상에 대한 기록과 불상의 명문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와 달리 감산사 불상은 역사서에 기록된 불상이 현존하고, 불상 자체에 기록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불상이다.

광배의 명문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감산사를 세운 인물과 사찰 건립 이유가 나오는데, 719년(성덕왕 18년) 부처의 열반일인 2월 15일 신라의 관료였던 김지성(金志誠)이 고인이 된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찬(一吉湌)과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 감산사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김지성이 자신의 땅을 내어 감산사를 세우고 두 상을 조성했다는 명문 앞의 기록만 보면 ‘김지성이 절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구나.’하고 막연히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두 상의 명문 말미에 강조된 내용을 보면 두 상은 김지성의 특별한 효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륵보살상의 명문 끝에는 동해 흔지(欣支) 바닷가에 66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 부인의 유골을 뿌렸다고 되어 있고, 아미타불상의 명문 끝에는 47세에 고인이 된 아버지의 유골을 같은 장소에 뿌렸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김지성이 어머니 관초리 부인을 위하여 미륵보살상을, 아버지 인장 일길찬을 위하여 아미타불상을 조성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풀리지 않는 의문점

사실 감산사 두 불보살상은 국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다. 일단 미륵보살상의 입상 조성은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미륵불의 경우는 입상도 있고 의자에 앉은 좌상으로도 제작됐지만 미륵보살상의 경우 도상학적으로 입상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삼국시대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상으로 추정기도 하지만 이 역시 반가부좌의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다.

또한 불교조각사에서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이라는 두 불상은 흔치 않은 조합이다. 그리고 미륵보살상을 홀로 독존상으로 조성하거나 아미타불상을 독존 또는 옆에 보살을 거느린 삼존상으로 조성하는 경우는 있지만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 즉 보살상과 불상을 대등한 존상으로 조성하기는 쉽지 않다. 미륵과 아미타불의 조합도 7세기 제작된 반가사유상과 불상이 앞뒤 부조로 새겨진 통일신라 불비상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예외적인 형태 때문에 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상이 과연 같은 법당에 봉안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법당에 봉안되어 있었는지 학자마다 이견이 있다.

감산사 석탑과 석불, 일제강점기 촬영 유리건판, 국립중앙박물관.
감산사 석탑과 석불, 일제강점기 촬영 유리건판, 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 기록을 보면 감산사 터에 남아있던 석탑은 붕괴돼 있었고 석조 비로자나불좌상은 얼굴과 손이 훼손되는 등 감산사 터는 오랜 기간 방치되어 원래 사찰의 모습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명문의 마모 정도를 살펴보면 1915년 불상이 서울로 옮겨지기 전까지 두 불상은 나란히 같은 높이로 하부가 땅에 묻혀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변하지 않는 것은 두 상이 김지성의 발원으로 조성되었고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두 상은 8세기 전반에 제작된 상으로 흔히 말하는 8세기 중반 석굴암으로 대표되는 절정기 통일신라 불상의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인체표현과 달리 두툼한 이목구비, 두께감 있는 옷자락, 그리고 정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고식의 흔적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감산사 상은 섬세하면서도 경건하고 화려하면서도 단정하다는 점이 다르다.

이러한 존상의 조합과 표현은 미륵에 어머니의 모습을, 아미타부처에 아버지의 모습을 투영했기 때문은 아닐까?

감산사 미륵보살상 세부.
감산사 미륵보살상 세부.

두 불상에 투영한 이미지

왜 미륵보살과 아미타불상을 이렇게 표현하였을까 생각해보려면 두 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금당(金堂)의 주존인 미륵 존상’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감산사 미륵보살상의 명문에도 ‘미륵’이라고만 표현되어 있다. 우리가 오늘날 감산사 ‘미륵보살상’이라 부르는 이유는 감산사 상은 보관을 쓰고 장신구를 걸쳤다는 점에서 도상학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감산사 미륵보살상은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 목에는 2중의 목걸이, 그리고 가슴과 팔에 천의(天衣)와 장신구를 걸치고 있고 이러한 장신구, 옷자락 형태, 자세 등의 전반적인 모습은 중국 서안(西安) 보경사(寶慶寺)의 당대(唐代) 십일면관음보살상과 유사하다. 즉 감산사 미륵보살상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행하던 풍만하고 관능적이며 화려한 장신구를 걸친 보살상의 모습을 신라의 절제된 이미지로 풀어낸 것으로 실제 감산사 상의 보관에는 관음보살처럼 아미타불의 화불이 표현되기도 하였다.

아미타불상은 양어깨에서 다리까지 흘러내린 법의(法衣)가 부처의 몸에 밀착되어 신체의 윤곽이 드러나는데 반복적인 물결 모양의 옷주름이 불상의 입체감을 강조한다. 이와 동일한 형식의 불상은 경주 석조불상이나 금동불상에서 확인되며, 그 원류는 멀리 인도 굽타시대 불상의 영향을 받은 당대(唐代) 불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감산사 아미타불상은 8세기 불상의 경외감이 드는 근엄한 표정과는 달리 어디서 본 듯한 친근한 얼굴 표정을 보여준다. 다부지면서도 팔을 뻗어 우리를 안심시키는 듯 온기가 감도는 푸근한 이웃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김지성은 한없이 자비로운 어머니의 모습과 관음의 이미지를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인 ‘미륵’상에 투영하여 조성하고, 엄격하되 자상하고 든든한 아버지의 모습을 서방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에 투영하여 조성한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그런데 감산사 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상에는 우리나라 불상에서 보기 드물게 머리 정수리 위에 작은 구멍이 나 있다는 특이점이 있다. 인도 간다라 불상에도 육계(肉髻)에 구멍이나 홈이 있어 사리나 보주를 봉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리를 불상에 넣으면 불상은 신성함과 종교적 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감산사 불상에도 이러한 홈이 있다는 점은 부모를 위해 발원한 이 두 상에 좀 더 생명력을 불어 넣고 싶었던 김지성의 바람이 담겼던 것으로 보인다.

십일면관음보살, 중국 당, 중국 서안(西安) 보경사(寶慶寺) 칠보대 (七寶臺), 높이 108.8cm, 
National Museum of Asian Art, Smithsonian Institution, Freer Collection, Gift of Charles Lang Freer, F1909.98.

미완성의 효심, 완성된 불심

김지성이 이 상을 조성했을 때 나이가 68세였다는 점에서 그의 부모는 아마도 최소 십수년 전 세상을 떠났으리라 짐작된다. 이 두 상을 발원한 이듬해 김지성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왜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한세대 앞서 세상을 떠난 부모를 생각하며 두 상을 세웠을까? 그 답을 찾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인생의 변곡점에서, 생의 시작과 끝을 마주할 때 슬며시 찾게 되는 부모의 모습을 떠올린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

사실 김지성은 여러 관직을 거쳐 차관급인 집사부(執事部)의 시랑(侍郞)에 올랐던 6두품의 인물로 705년 당나라에 파견될 정도의 인물이었지만 정치적 한계에 직면하여 67세인 718년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은퇴 후에는 불교 논서인 무착(無著)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읽는 등 경전을 공부하기도 했는데 인생의 덧없음을 깨달았을까? 두 불상의 명문에서 그는 위로는 국왕의 장수와 만복을 기원하면서 자신의 형제자매, 전처와 후처, 서형(庶兄) 등을 포함하여 법계의 일체 중생이 함께 세속을 벗어나 모두 부처의 경지에 오르기를 기원했다.

(위) 감산사 아미타불상 세부.(아래) 감산사 ㄹ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상에는 머리 정수리 위에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위) 감산사 아미타불상 세부.(아래) 감산사 ㄹ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상에는 머리 정수리 위에 작은 구멍이 나 있다.

명문을 살펴보면 김지성은 아미타불상의 명문을 새기기 전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미륵보살상의 명문에는 ‘나 지성은~’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어가 사용된 반면 아미타불상의 명문은 김지성을 높이는 서술어가 사용되었다. 또 아미타불상의 발원문 중간에 “왕명에 의해 나마(奈麻) 총(聰)이 글을 짓고 승려인 경융(京融)과 대사(大舍) 김취원(金驟源)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고 마지막 행에는 “김지성이 720년 69세의 나이로 4월 22일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으로 김지성의 사후 아미타불상 명문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명문 사이에는 인명 표기에 차이가 있는데 미륵보살상에는 김지성의 이름이 ‘金志誠’으로, 아미타불상에는 ‘金志全’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필체도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김지성이 보고 싶었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완성된 ‘미륵과 아미타’ 두 불상으로 만나지 못한 것은 늘 부모에게 애틋한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엇갈리는 우리의 삶과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2012년 불교조각실을 개편하면서 감산사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의 뒤편 가벽을 제거하였다. 당시 벽에 막혀 볼 수 없었던 명문을 관람객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공사를 진행했는데, 새로운 창문쪽 가림막을 세우기 전에 잠시나마 공간을 확보한 필자는 이를 기회로 RTI(Reflectance Transformation Imaging, 반사율 변환 이미지) 촬영을 진행하였다. RTI는 조명의 각도에 따라서 보고 있는 사물의 표면 반사율을 다르게 하여 촬영한 이미지를 의미하며 특수한 소프트웨어를 활용하면 음각된 명문을 판독할 수 있다. 이러한 명문 판독 방법은 기존의 탑본에서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를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감산사 불상 RIT 촬영 장면.
감산사 불상 RIT 촬영 장면.

이 RTI를 위해 박물관 사진 전문가와 학예연구사가 미국에서 RTI 촬영 방법을 배워 돌아와 명문을 촬영했다. 필자는 촬영 결과를 분석하여 감산사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의 글자수를 새롭게 확인하고, 일부 글자를 새로이 판독하였으며 명문의 조성 시기와 서체 등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으나 새로운 시도를 제안하고 격려해주며 함께해준 선후배가 있어 값진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비록 이 몸이 다한다 하여도
이 원(願)은 무궁하며,
이미 돌이 닳아 버릴지라도
존용(尊容)은 없어지지 않는다.
구함이 없으면 과(果)도 없으니,
원(願)이 있다면 모두 이룰 것이다.
만일 이 마음을 따라
원(願)하는 자가 있다면,
함께 그 선인(善因)을 지을 것이다.
- 감산사 미륵보살상 명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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