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호

〈삽화=전병준〉
〈삽화=전병준〉

통도사는 가마솥밥과 누룽지가 유명하다. 신문·방송이나 SNS를 통해 통도사의 밥 짓는 모습을 보면 ‘굳이 별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더라도 수행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가마솥에서 떼어낸 커다란 누룽지를 보고 나면 스님의 솜씨에 놀라게 된다. ‘어떻게 저렇게 큰 누룽지를 부러뜨리지도 않고 떼어낼 수 있지? 집에서 몇 사람 먹을 분량의 밥을 하는 솥에서도 누룽지를 부러뜨리지 않고 떼기는 힘든데…….’

외할머니 재 지낸 날 가마솥밥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희미한데, 초등학교 3학년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인천의 한 사찰에서 할머니의 재(齋)를 드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를 자주 뵙지 못해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게 큰 슬픔으로 다가오진 않았는데, 어머니가 슬퍼하시는 모습을 보고 따라 운 것 같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는 건 이날 먹었던 사찰의 가마솥밥이다. 이 사찰 가마솥밥이 나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게 된 것은 물론 그 밥맛이 큰 역할을 했다. 집에서 먹던 밥맛과는 확연히 달랐던 기억이 선명히 남아 있다.

1970년대 초반은 정부가 쌀 자급자족을 위해 소출이 많은 통일벼 생산에 사활을 걸던 시대였다. 통일벼로 생산한 통일미는 밥맛이 썩 좋지 못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는데, 통일미에 보리까지 섞어 먹게 했으니 밥맛이 좋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밥보’인 나는 그 통일미에 보리가 섞인 그 밥도 항상 맛있게 그리고 많이 잘 먹었다. 그런데 그날 사찰에서 먹었던 밥맛은 차원을 달리하는 밥맛이었다. 밥맛의 차이에 가마솥이 큰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었던 것 같고 나중에 누룽지까지 얻어먹었다. 다만 그 사찰에서 밥을 지은 쌀이 일반미였는지 통일미였는지는 모르겠다.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도시락에 보리쌀을 섞었는지 검사까지 하던 시절이라 통일미일 수도 있을 듯하다.

밥과 관련해 강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또 다른 경우는 군대에 가서 자대배치를 받은 지 한 달만에 대민지원을 나가 먹은 쌀밥과 돼지고기 김치찌개이다. 훈련소와 자대에서 찐 밥에 고춧가루 몇 개가 섞인 김치만 먹다가 처음으로 밥 다운 밥을 먹게 됐으니. 큰 들통에 반이나 담긴 밥을 두 명이 모두 먹어치웠는데, 논 임자인 아주머니가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 밥과 함께 먹었던 돼지고기 김치찌개는 내 평생 가장 맛있는 김치찌개로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한국과 인도에서 불교학으로 학위를 받고 몇 년의 대학강사 생활 후 다시 유학하여 영국에서 음식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병 때문에 완전한 채식생활을 8년 정도 했는데, 그 전까지는 ‘음식’이 나의 학문적 주제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잘못된 식생활과 흡연 등이 원인이 되어 병원에서 시술을 받고 음식 관련 책을 찾아보다가 불교학과 음식을 결합해 공부해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침 영국에 ‘음식학’이란 학문이 인기를 끌고 있었고 나는 몇 년을 즐겁게 유학 준비를 하여 갈 수 있었다.

런던에서 불교음식학으로 박사논문을 쓰면서 나의 일상은 온통 음식과 관련된 일과로 채워지게 되었다. 하루 대부분을 음식 관련 대장경 내용을 검색하고, 음식학 관련 책을 읽고, 음식 관련 학술행사에 참가하고, 그 내용을 논문으로 구성하는 게 일과였다. 주제가 ‘불교음식’이다 보니 학교에서 배우는 일반 음식학에 더해 불교문헌에서 언급하는 음식과 관련된 내용이 나의 주된 관심사였다. 음식에 관한 학교 공부뿐만 아니라 신문·방송과 SNS의 음식 관련 사진과 내용도 매일 살펴보았다. 여기에는 한국의 사찰음식이나 동아시아 즉, 중국·일본의 불교음식도 관심 대상에 포함되었다.

박사과정 중에 한국에 들어오면 한국에서 음식 관련 연구를 하는 학자나 음식계의 이름난 분을 찾아다니곤 했다. 또한 가능한 사찰음식을 많이 접해보려고 사찰음식을 일부러 찾아가서 먹어보기도 했다. 내가 먹어본 사찰음식은 맛이 훌륭한 것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찰음식이란 명칭을 듣고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은 어릴 적 그 외할머니 재에서 먹었던 사찰 가마솥밥이란 건 변함이 없다.

산중사찰 밥상과 장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진관사·봉녕사 등 국내 사찰음식을 선도하는 사찰에 강의를 나가면 최대한 그 사찰의 음식을 먹어보려 노력했다. 해당 사찰의 비구니스님들이 모두 인심이 좋아 정성 들여 만든 사찰음식을 경험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사찰의 나물류 음식인데 가장 맛이 있기도 하지만 먹고 난 후 속이 편하기 때문이다. 사실 어렸을 때는 육류를 정말 좋아했다. 너무나 좋아해 병까지 얻었기 때문인지 40대 중반부터는 나물류가 좋아지더니 이제는 확연하게 나물류가 좋다.

우리나라의 여러 사찰에서는 무료로 비빔밥 등을 재가자들에게 제공한다. 종교의 실천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배고픈 중생에게 밥을 제공하는 것이고, 이것은 종교를 불문하고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보편적 모습이다.

한국불교의 문헌을 보면 고려시대 때 음식 보시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고려 사찰은 기근·홍수 등 빈번했던 자연재해 시 국가적 구휼의 주체였다. 사찰은 넓은 공간과 많은 인력 그리고 백성들에게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거대한 솥과 많은 장류(醬類)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별 사찰 차원에서도 승려들이 불교 사상에 근거해 구휼을 펼쳤으며, 사찰은 국가 재난이나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가난한 백성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절요〉 ‘문종 6년 3월조’에는 “도성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아 담당 관리들에게 명하여 굶주린 백성 3만 명에게 쌀·조·소금·시(豉, 장류)를 내려주어 구제하였다.”는 내용이 있고, ‘문종 18년 3월조’에는 “홍수로 인해 가을 농사가 피해를 입어 백성들을 구휼해야 해서 개국사 남쪽에 밥을 준비하여 궁한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별 사찰에서 불교사상의 실천행으로 자연재해나 평상시 굶주리는 가난한 백성들을 위한 자비행을 펼친 사례도 문헌에 언급되고 있다. 현화사(玄化寺)의 각관(覺觀) 스님은 보시를 행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며, 혜소국사(慧炤國師)는 광제사(廣濟寺) 문 앞에 솥을 걸어놓고 밥하고 국을 끓여 굶주린 사람을 구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사찰의 보시행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단오에는 거리에서 승려들이 음식을 보시했고(〈고려사〉 권113, 열전26, 최영), 법상종 소속 오산원(鼇山院)에서는 오가는 백성들에게 식사를 제공했으며, 사찰의 불사(佛事)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홍수나 기근과 같은 재난 상황에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식품이 곡식과 소금·장(醬)·시(豉, 입자형 장류)였다.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 사찰은 한국음식의 기저(基底)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장(醬)문화를 가장 조직적이고 집단적이며 지속적으로 유지·계승해왔다.

남원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에 구산선문 중 가장 일찍 세워진 사찰이다. 2015년 이곳에서 장을 보관하는 창고인 장고(醬庫)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장을 담았던 38기의 대형 항아리 유물이 발견되었다. 2017년에는 삼척 흥전리사지에서 12점의 대형 항아리 유물을 가진 장고터가 발견되었고, 2018년에는 경북 경주시 성건동에서 발견된 8세기 건물터 유적에서 50여 개의 대형 항아리 유물과 청동국자·깔때기가 함께 발굴되기도 했다. 모두 삼국시대 사찰의 장문화를 보여주는 유물로 당시 사찰은 두장(豆醬) 제조법과 그 문화 전파에 있어서도 선도적인 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금과 장류는 기근과 같은 상황에서 채소나 들판의 나물류들을 섭취하는데 필요불가결한 식료이다. 장류는 식물의 독성을 제거해 주어 산과 들의 초본류 식물들을 안전하게 먹을 수 있게 해주는 식품이기도 하다.

〈삽화=전병준〉
〈삽화=전병준〉

사찰은 한국음식문화의 중추

조선 중기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의 〈산중일기(山中日記)〉는 조선시대 산중사찰의 음식생활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인데 감장(甘醬)·청장(淸醬) 등 장류와 산채와 오이 등 채소류 그리고 보리밥을 주식으로 삼고 있는 산중사찰 음식문화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 산중사찰 밥상은 보리밥과 장과 채소류를 넣은 국·나물류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장류는 밥상에 장 종지를 직접 올려 먹거나, 장으로 국을 만드는 데 이용했다. 조선시대 백곡처능(白谷處能, 1617~1680) 선사도 사찰 주변의 땅에 오이를 손수 심어 드시는 모습을 보이고 “보리밥이 거친 시절에는 오이와 다른 나물을 함께 비벼 드신다.”고 했는데, 이 표현에서 아마도 보리밥에 장과 나물을 넣고 비빔밥을 해 드시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찰 비빔밥의 역사도 꽤 긴 역사를 가진 음식 메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찰음식문화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김치와 장과 같은 기저 음식 전통을 여전히 유지·계승해 오고 있으며, 일반사회에 두장 문화를 전파한 음식 테크놀로지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때 사찰은 국수·만두 등의 면류 음식의 기원과 전파지로서 기능했는데, 조선시대에는 팔도 메주공납의 최대 공급처였고, 사찰 두부는 그 뛰어난 기술력과 맛으로 조선시대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이외에 고려 때 사찰에서 연등회·팔관회를 행할 때 만든 유밀과 다식류는 과자류 음식의 발전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음식이다. 이렇게 불교음식문화의 전통은 고려시대의 풍요로운 환경에서부터 핍박과 쇠잔의 시대였다는 조선시대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한국음식문화의 핵심이자 중추이다.

일요일 등산길에서 한 그릇 보시받는 사소해 보이는 사찰 비빔밥에도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불가의 장(醬)문화와 그 장으로 무친 나물 문화가 깃들어 있다. 여전히 허기진 중생의 배를 달래주는 역할을 하고 있음에 감사한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면 불가의 전통적인 음식 보시문화가 사회적으로 좀 더 확대되어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여전히 굶주리는 중생들의 배고픔과 외로움을 덜어주는 불교의 실천행으로 확대, 지속되길 빌어본다. 사찰의 밥과 장과 나물이 함께 하는 사찰비빔밥은 나에게는 언제나 한 그릇의 음식, 그 이상이다.

공만식
현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음식문화학 담당교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후 영국 런던대(Kings College, London)에서 ‘종교학과 음식학’으로 박사학위를, 이어 인도 델리대학교에서 ‘초기불교 & 초기인도불교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초빙연구교수를 지냈다. 저서로 〈불교음식학-음식과 욕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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