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에 안주하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대비하다

순천 선암사에 소장된 대각국사 의천의 진영. 후대에 옮겨 그렸지만 원형의 요소를 고루 갖춘 고품격의 초상화에 속한다.
순천 선암사에 소장된 대각국사 의천의 진영. 후대에 옮겨 그렸지만 원형의 요소를 고루 갖춘 고품격의 초상화에 속한다.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고려의 전성기를 살았던 왕자로 출가하였다. 개인도 국가도 전성기의 경험을 되살려 개선하지 않으면 나태해진다. 정치세력도 사회도 경험과 시행착오를 곱씹으면서 날로 새로워지도록 노력해야 젊어지고 국가도 희망이 보인다. 고려 문종의 재위 중에 넷째 아들로 태어난 의천은 당시의 분위기에 안주하지 않고 불교계의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지식과 방향을 모색한 끝없는 사상의 탐구자였다.

‘대각국사’란 시호이고 ‘석가’를 의미하는 존칭이다. 그의 본래 이름은 ‘후(煦)’였으나 그가 송(宋)을 찾았던 시기 철종의 이름[趙煦]과 같아서 자(字)인 ‘의천’만 사용하였다고 한다. 의천은 말년에 이미 불교계의 지도자인 국사에 못지않은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이고 실천가였다. 그는 불교는 물론 유학을 포함한 다른 지식과 화폐경제의 중요성까지 언급한 현실성이 강한 경세가(經世家)였고 국제외교에도 탁월한 시야를 가지고 돌파하는 결단력도 강하였다. 개국 이래 지방 토착세력의 호응을 받으며 우세한 종파의 기반을 마련했던 선종은 이 시기 점차 사상의 절충을 시도하면서 교학에 접근하였다.

고려는 송이나 거란보다 먼저 통합을 완성했으며 사회 기반 통일의 완성도에서도 앞섰던 나라였다. 이때 양자강 하류의 오월은 법안종인 남종선 중심의 시대로 변하였다. 고려는 이를 수용하여 불교사상의 통합을 더욱 다지면서 사상으로도 송보다 먼저 통일을 달성한 선배였다. 고려는 거란의 세 차례 침입을 막아 내었지만 송은 거란의 팽창을 제대로 저지하지 못하였다. 송은 차와 비단으로 거란 지배층에 조공(朝貢)하면서 전쟁을 피하고 교착상태를 연장하여 세력균형을 유지하였다.

서북의 서하(그들 스스로는 ‘대하·大夏’라 하였음)와 서남의 대리국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면서 고려와 송과 함께 거란을 ‘대요(大遼)’라 칭하며 동아시아의 패권자로 인정하는 추세였다. 이를 토대로 동아시아는 더 이상의 소모적인 전쟁을 치르기보다 각각의 특성을 지키고 국가 기반을 가지면서 다원적인 세력균형을 유지하였다.

동아시아에서 드물게 세력균형을 유지한 시기

세계사에서 다원적인 세력균형은 그리스의 폴리스 연맹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마케도니아를 거쳐 로마에 흡수되었다. 근대에는 파죽지세로 영토를 확장했던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한 1815년 비엔나 체제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면서 유럽은 왕정 환원과 민주공화정 전환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10세기 후반 동아시아는 요와 금의 말기까지 그보다 앞선 춘추전국과 남북조와 5대 10국에 이어서 네 번째 맞이한 다원적인 세력균형을 이룩한 시기였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역사가들은 다원화된 세력균형의 시기에 패권자를 두둔하면서 난세라 말하지만 정치사에서 가장 발전된 요소를 내포한 주목해야 할 시대였다. 동아시아가 5대 10국이나 춘추의 5패보다 안정되고 실제로 여러 국가가 다원화하여 발전하는 등 큰 의미를 지닌 시대의 하나였다. 고려 전기에는 이렇게 동아시아가 가장 이상적인 다자의 균형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각각의 연호를 가지면서 국가의 특성을 지닌 시기로 확인되었다.

서하가 고승을 존경하여 국사를 둔 국가였다면 고려는 신라의 국사에서 왕사를 더하여 책봉하는 관습을 제도화한 사부(師傅)제도를 유지한 국가였다. 고려는 살아있을 때 국사로 우대하거나 입적한 다음에 국사로 추증(追贈)하는 두 가지 형태였고 거의 끊어지지 않고 책봉하여 동아시아에서 중세문명의 특색을 잘 나타냈다. 고려는 태조부터 광종까지 독립된 연호를 가진 시기가 있었다. 비록 이후 연호 사용을 자제하면서 송의 연호를 쓰다가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당시 고려는 송과 함께 거란을 동아시아의 패권자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의 침략을 받았을 때 맞서 싸우고 전쟁에서 승리해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을 주도하였다. 고려는 북으로 오히려 영토를 넓혔으나 송은 거란과 제대로 전쟁도 못해 보고 영토를 잃으면서 차와 비단 등의 물자를 바치면서 겨우 국가를 유지하였다.

10세기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도. 고려는 동아시아의 패권자로 올라선 거란의 침략을 세 차례 막아내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통합한 국가의 진면목을 보였다. 또 다자의 특색을 유지한 동아시아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며 자주적인 역할을 보였다.   
10세기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도. 고려는 동아시아의 패권자로 올라선 거란의 침략을 세 차례 막아내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통합한 국가의 진면목을 보였다. 또 다자의 특색을 유지한 동아시아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며 자주적인 역할을 보였다.   

의천은 불교로 동아시아 세력균형을 굳히다

의천은 동아시아가 다자균형을 유지하던 시기에 태어났다. 그의 46년 생애는 짧았으나 굵었다. 의천은 문종 재위 중에 넷째 아들로 태어났고 11세에 동진출가한 이유는 부왕의 건강을 위하여 왕자출가가 필요하다는 민속을 따른 결정이었다. 대부분이 불교 신도인 고려에서 왕실의 어린 왕자가 모든 계층에게 미래의 확신을 보여준 결단이자 경사였다.

그의 출가는 왕자의 출가라는 전통의 강화였다. 성년으로 가족을 떠나 출가한 교조 석가보다도 적은 나이에 순조로운 출가였고 온 나라에 불교의 이상을 더욱 심화시킨 계기였다. 의천은 국사인 화엄종 고승 경덕국사 난원(爛圓)에게 출가하였다. 당시는 화엄종과 유가종에서 각각 국사와 왕사를 배출하고 선종은 배제되는 경향이 짙었던 시기였다. 선종은 80여 년간 두드러진 고승을 배출하지 못하였다. 삼대 종파가 균형을 유지하였으나 화엄종·유가종·선종 순서로 바뀐 시기였다.

의천은 먼저 기존 고려 불교 종파에 대하여 의문이 많았다. 고려 불교는 신라에 뿌리를 두었고 학파 시대의 통합에 가치를 두었다. 그는 고려의 종파와는 다른 오교에 주목해 이를 확인하고자 고려 불교가 전파한 가까운 지역인 송의 불교계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화엄종으로 출가하여 화엄사상의 체계를 탐구할수록 고려 화엄종의 조사로 받들어진 의상의 화엄사상에 대하여 의문을 품게 됐다. 그는 의상의 계승자들과 달리 다원적인 학파를 화쟁(和諍)으로 통합하였던 원효의 사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의천은 원효를 보살로, 의상을 대사로 호칭하여 대비시켰다. 도선을 선각국사로 진표를 율사로 추봉(追封)한 시기는 이후였다. 신라의 네 고승의 비(碑)가 건립된 시기는 이보다 후였다.

북전불교의 기준으로 본다면 보살은 남전불교의 나한(아라한)이나 이를 동아시아에서 다시 번역한 존자와 상통한다. 북전불교에서 중역한 부처에 가장 가깝게 깨달은 보살은 엄밀히 본다면 남전불교의 나한과 용어에 차이가 있었고 의천은 북전불교의 가치를 더욱 선망하였다. 의상은 화엄종의 대사일 뿐이고 모든 학파와 종파를 극복한 원효는 의천이 설정한 이상형이었다.

차는 동아시아 외교의 도구

송은 차 생산의 종주국이었다. 그러나 고려와 일본이 차의 생산국으로 발전한 다음이었다. 동아시아 남쪽에서 독점 생산된 차는 재배와 가공기술까지 두루 갖추어야 하는 첨단 산업에 속하였다. 같은 시점에서 보면 송의 양자강 수계(水界)에서 가장 많은 양의 차가 생산되던 시기였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중국은 송과 명보다 원과 청을 계승하여 영토가 넓다. 하지만 당시는 서남의 대리와 서쪽의 티베트와 요하 일대를 기반으로 서북의 신강과 황하 유역의 많은 부분이 거란의 수중에 있었다. 거란은 전쟁에서 고려에 패했으나 고려는 더 이상의 북진을 멈추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거란을 패권자로 인정하였다. 황하 하류를 중심으로 한 양자강 수계는 경제와 문화적 측면은 제한된 지역이었지만 차의 생산량은 탁월하였다. 내수뿐 아니라 국가 간의 교역에서 차는 비단의 생산과 더불어 국가의 유지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송은 군사력보다 물산의 생산으로 버티는 형편이었다. 송의 차는 고원성 난대지역 중에서 배수가 잘되고 수분이 풍부한 곳에서 생산되었다. 당의 후반인 8세기 중반부터 재배가 활발하여 찻잎 채취의 능률이 올랐고 차의 가공기술도 높아졌다. 차의 유통에는 세금이 매겨져 국가의 재정에 보탬이 되었고 국외 수출도 활발하였다. 양자강 유역의 10국을 통합하여 통일을 완성한 송의 정위(丁謂, 960~1033)나 채양(蔡襄, 1012~1067)과 같은 차 생산 지역 출신의 재상이 차의 생산을 장려하고 궁중차를 상표화하여 거란과 토번과 서하에 수출하였다. 북방 민족이 세운 국가가 차의 생산지까지 통합한 시기는 몽골제국인 원과 후금의 후신인 청에 이르러서 가능하였다.

송은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왕실용 차인 용단을 생산하였다. 용단은 눌러서 발효시킨 고형차였다. 우려낸 색깔은 갈색이지만 이를 음료로 만들 때는 옅은 갈색인 사례도 있다. 특히 대리국에서 발효시킨 차의 경우는 갈색에 가깝다. 고려의 뇌원차는 송보다 앞선 5대 10국과 같은 시기에 기원하였다. 뇌원차는 고려의 고유한 차이고 국왕 전용의 고급 궁중차였다. 가공과 모양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전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생산지와 모양과 특징에 대해서도 뚜렷한 기록이 적다. 그러나 고려 초기 고유한 차의 이름으로 고려 국내에는 널리 알려졌다.

고려 뇌원차에 대한 평가가 송의 사서에 직접 실린 적은 없다. 북송 말기 송의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 유일한 기록이다. 이 책에는 ‘고려 찻잔을 비롯한 차기의 품질은 월등하지만 차 맛은 형편이 없었다.’고 적혀 있다. 이 차가 뇌원차일 가능성은 절반 정도이다. 사신은 공인된 세작(細作)이므로 고려에서 진품 뇌원차를 제공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차는 송이 고려보다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특산이므로 고려에서 이를 굳이 내세울 의지가 없고 거란에 선물로 보낼 때만 고급차를 제공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에서 차의 생산이나 가공에 대한 기록이 적은 까닭도 자급자족에 만족하면서 송과 경쟁을 불러일으킬 요소를 배제하려고 힘썼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고려에 송의 상인들이 활동하였지만 그들 역시 고려의 차와 경쟁을 해서 원활한 무역에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의 차가 북조인 거란에 들어간 기록은 전한다. 대각국사 의천이 거란에 뇌원차를 선물한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대각국사 의천과 뇌원차에 대한 기록은 광종과 성종 시대의 내수에 쓰인 차에 대한 기록보다 적다. 고려의 뇌원차는 궁중차로서 수출을 통해 대외에 널리 알리지는 못했지만 거란이나 금에 분명하게 알려진 차라는 점은 확실하다. 때로는 소비재가 생산지보다 소비지에서 제대로 평가하는 사례가 많고 뇌원차도 같은 현상이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고려의 차를 같은 시기 일본의 차나 송이나 대리국의 차와 치밀하게 비교하여 생산방법과 가공기술의 차이점을 밝힐 부분은 과제이다. 고려의 광종시대는 10국의 하나인 오월과 특히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필자는 고려 차의 독자적인 가공기술이 뇌원차의 생산에 작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오월에서 교류한 선승들의 기록에서 차에 대해 언급된 자료가 출현하기를 기대해 본다.

2015년 인천 검단지구 도시개발 과정에서 구제발굴로 출토된 10세기의 청자와 다양한 도제 차구(茶具). 고려인의 생활도자기로 아직 투박하지만 건강하고도 힘찬 고려의 출발과 상통하는 요소가 느껴진다.
2015년 인천 검단지구 도시개발 과정에서 구제발굴로 출토된 10세기의 청자와 다양한 도제 차구(茶具). 고려인의 생활도자기로 아직 투박하지만 건강하고도 힘찬 고려의 출발과 상통하는 요소가 느껴진다.

의천이 이룩한 천태종의 기반

의천은 가장 중요한 수행을 참선보다 지관에 초점을 두었다. 다음으로 석가의 교학이 담긴 경전을 모아 대장경을 간행하려고 몰두하였고 이를 주석한 장소(章疏, 주해서)를 모아 경율론 삼장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고 시도하였다. 북전의 모든 경전을 철저히 이해하고 남전불교를 북전불교의 기준에서 통합하려고 대장경을 교정하였다. 그는 남전불교에서 사용한 한자의 음사 용어를 북전불교에서 중역하여 동아시아에 정착시킨 용어의 주석서로 대장경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의천은 범어에 밝은 송의 전문가를 만났으나 그가 범어를 어느 정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연구하였는지는 필자의 노력으로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선종의 5가에 속하는 천태학에 깊은 지식을 가졌던 법안종에 속하는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이나 이보다 더 범위가 넓었던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의 저술에 깊은 관심을 보인 부분은 문집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그의 문집에서 훼손된 부분이 확인되어 이에 대한 언급이 있으리라는 증거가 찾아졌으면 기대한다. 〈대각국사문집〉은 화엄종에서 주관하여 의천이 입적한 다음에 편찬되었지만 정확한 편찬 시기는 훼손된 끝부분이 없어서 알기 어렵다.

이외에 〈대각국사문집〉에는 고려 천태종의 출발과 직결되는 내용이 의외로 적다. 다만 의천이 송의 천태종 승려를 찾았다거나 송의 국청사를 찾아 천태학을 알리겠다고 다짐하고 인예태후가 나서서 개경에 완공한 국청사를 직접적인 계기로 든다. 천태종과 가장 직접적인 자료는 〈대각국사문집〉의 외집에 실린 ‘선봉사 천태시조대각국사비문(天台始祖大覺國師碑銘)’이 대표적이다. 이 비문에서 고려 천태종에 대한 내용은 비음기(碑陰記)가 중요하다. 비음기는 황수영에 의하여 처음 주목되었고 의문이 있는 몇 글자의 판독은 필자가 비를 다시 판독하여 바로 잡아 고려 천태종의 형성 배경을 어느 정도 파악하였다. 비음기에는 선종의 참선보다 천태의 수양방법인 지관에 동의한 고려 선승의 인맥이 실려 있다.

대각국사는 이렇게 참선을 부정하고 천태의 교관을 내세웠다.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學一, 1051∼1144)의 비문은 ‘선승의 과반수가 의천의 교관겸수에 동감하고 사상에 동감하였을 정도였다.’고 선종의 위기상황을 전한다. 그러나 교웅(敎雄, 1076~1142)의 묘지명에 따르면 의천의 입적 후 많은 선승들이 참선 수행으로 복귀하였고 대각국사의 문도로 이름을 남긴 고승은 대선사 1인과 선사 3인뿐이었다. 쌍봉사(雙峰寺)의 익종(翼宗)을 이은 교웅의 문하에 있던 덕소(德素, ?~1174)가 왕사로 책봉되기까지는 73년이 소요되었다.

법안종에 심취했던 선승인 원종국사(圓空國師) 지종(智宗, 930~1018)을 마지막으로 80년간 선종에서 왕사나 국사의 책봉이 없었다. 의천이 입적한 6년 후 선승인 담진(曇眞)이, 21년 후 원응국사 학일이 왕사로 책봉되었다. 이로 보면 의천의 입적 후 선종이 세력을 신속하게 회복하였다. 그나마 대각국사 의천을 따랐던 선승으로 계승된 익종과 교웅을 거쳐 덕소에 이르러 천태종에서 왕사를 배출하였다. 대각국사가 입적하고 70년 지난 후였다. 천태종이 4대 종파로 두각을 나타내기까지 순탄하지 못했던 상황을 보여 준다.

덕소가 왕사로 책봉된 시기는 무신집권 초였다. 그리고 이후에 만덕산 백련결사를 이끌었던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1163~1245)를 비롯하여 8국사가 책봉되어 고려 후기에 천태종은 종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그리고 송의 연경사(延慶寺)와 유대를 가지면서 천태종의 사상과 실천을 한층 향상시켰고 차에 대한 기록도 풍부하게 남겼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제대로 살피도록 하겠다.

충북 영동 영국사에 있는 원각국사 덕소의 탑비. 그는 천태종 출신의 첫 왕사이다. 대각국사의 선봉사비를 제외하면 훼손이 심하고 남아있는 비도 극히 적다. 누가 이처럼 심하게 훼손하거나 파손하였을까? 한국불교사의 험악한 자화상은 제대로 풀어야 할 과제로 아직 시작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충북 영동 영국사에 있는 원각국사 덕소의 탑비. 그는 천태종 출신의 첫 왕사이다. 대각국사의 선봉사비를 제외하면 훼손이 심하고 남아있는 비도 극히 적다. 누가 이처럼 심하게 훼손하거나 파손하였을까? 한국불교사의 험악한 자화상은 제대로 풀어야 할 과제로 아직 시작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허흥식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경북대학교 교수와 이탈리아 나폴리 동양학대학교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LA캠퍼스에서 강의하였다. 북경대학에서 연구교수로 활동하였다. 두계학술상·출판문화저작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고려불교사연구〉·〈한국중세불교사연구〉·〈고려로 옮긴 인도의 등불-지공선현〉·〈한국의 중세문명과 사회사상〉 등 다수의 저서와 300여 편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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