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결사와
수선결사의
협력과 차이

만덕산 백련사의 복원된 모습. 육이오전란으로 터만 남았다가 1980년대 후반에 복원해 만덕사라 불렸다. 절이 7부 능선에 위치하여 하늘에 떠 있는 하얀 연꽃에 안긴 느낌이다. 바라보이는 도암만이 바다가 아니라 호수처럼 보이고 속세를 씻어내는 듯 상쾌하다.
만덕산 백련사의 복원된 모습. 육이오전란으로 터만 남았다가 1980년대 후반에 복원해 만덕사라 불렸다. 절이 7부 능선에 위치하여 하늘에 떠 있는 하얀 연꽃에 안긴 느낌이다. 바라보이는 도암만이 바다가 아니라 호수처럼 보이고 속세를 씻어내는 듯 상쾌하다.

12세기 후반 고려는 무신집권과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라는 국내외의 커다란 시련에 직면하였다. 무신란(武臣亂)에서 무신집권으로 전환은 왕실을 뒷받침하는 정치세력의 교체이고 무신에 의하여 왕권은 이전보다 제한되었다. 다음 세기 초기 몽골족의 등장과 금에 복속되었던 거란족의 침입이 이어졌다.

불교계는 종파별 변화에서 교종인 화엄종과 유가종은 문신과 결합되었다. 개경 부근 승도(僧徒)의 난은 무신의 집권에 대한 저항이었고 문신과 함께 수난을 당하였고 새롭게 종파를 구성한 천태종은 가장 미약한 종파였지만 조계종과 상통하는 선종에 속할 뿐 아니라 왕사를 배출하면서 화엄종과 유가종을 능가하는 종세의 약진을 보였다. 고려 후기의 결사는 조계종과 천태종의 신도와 출가자가 결합한 형태였고 사회의 혼란이나 외침을 당하여 국가가 사회의 통치에 힘쓰기 어려운 시기에 불교를 통하여 일으킨 사회의 자구책이었다. 대체로 이를 주도하는 핵심은 조계종과 천태종의 출가자였다.

결사는 고승과 이를 보조하는 지역의 주민이 결합한 경우에 성공을 거두었다. 12세기 후반 문반과 무반의 갈등으로 일어난 지배층의 상부에서 일어난 혼란은 지방의 내란으로 확대되고 이에 더하여 몽골의 외침과 강화 천도로 결사의 필요성은 더욱 확대되었다. 불교 결사는 집단을 이루면서 사회에 일으킨 신앙의 실천운동이었다. 불교결사는 구성원의 포괄성과 공간성이 크고 스스로 사회를 지키려는 자발성이 작동하였다. 집단적인 목표가 선명한 특징이 있으나 기록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면서 장기간 다양한 오해를 일으킨 사례도 있었다. ‘사(寺)’가 일정한 형식과 규모를 가진 국가에 등록된 전통을 가진 불교시설이라면 ‘사(社)’는 난세에 등장한 결사(結社)로 발전한 형태가 많다.

12세기 후반에는 무신집권과 민란으로 사회 혼란이 확대됐고 13세기 전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개편은 동북아시아의 민족이동을 동반하였다. 몽골족과 여진족을 중심으로 구성된 지배층은 국제질서의 개편을 뒷받침한 대변화였다. 13세기 전반에 가장 두드러진 결사는 조계산 수선결사였다. 고려 불교계를 보면 11세기 후반은 화엄종과 유가종의 전성기였다. 12세기 전반부터 국초(國初)부터 조계종이라고도 불리던 선종은 화엄종과 유가종을 능가하기 시작하였고 무신집권 이전부터 혜조국사 담진과 원응국사 학일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다. 천태종 왕사는 12세기 후반에야 처음 책봉되었다.

왕조국가에서 왕실은 귀족의 핵심이고 도성은 왕실을 보호하는 수도의 핵심이었다. 도성 안에는 궁성이 있어서 다시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었다. 내성에 위치한 왕실과 외성을 포함해 도성의 외곽에는 관인의 거주지였고 도성을 제외한 경기(京畿)에는 관인의 경제기반을 이루는 전시과(田柴科)가 제공되었다. 경기를 제외한 전국에는 군인전(軍人田)과 민전(民田)이 있었다. 나한신앙은 국방과 관련된 장군을 고무하는 신앙과 관련되고 조계종이나 천태종의 실천신앙과 관계가 깊었다.

무신집권은 조계종과 천태종의 확장에 깊은 관련이 있었다. 종파별 신앙은 다원적인 불교의 기반을 이루었다. 실천의 보현신앙에서 지혜의 문수신앙으로 바뀌었던 조계종은 〈반야경〉을 토대로 삼았고 출가자의 수양에 대한 확신을 강조하였다. 천태종은 실천의 보현신앙을 강조하면서 〈법화경〉과 〈열반경〉을 중요시한 종말적 우기를 타력신앙인 참회와 염불로 극복하려는 염원을 보였다. 정변과 내란과 외침이 겹친 위기를 극복하려는 절박한 시대에 수선결사와 백련결사는 보살신앙에 공통점을 보이면서도 차이를 나타내는 모습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불상과 탑이 조성된 전남 화순 운주사의 초입을 지나 처음 만나는 천불천탑의 시작점이다. 13세기 전반 천태종 백련결사를 주도한 원묘국사 요세를 천책이 도와서 탑과 불사를 조성한 내력이 진정국사 천책의 〈호산록〉에 전한다. 이를 확증하기 위하여 2021년 6월 25일 수많은 불상과 석탑을 조성한 경험을 가진 보령 출신의 석공 명장과 동행하여 답사한 결과 모든 석조물이 같은 시기에 조성됐다는 해설을 얻었다. 다양한 시기에 조성하였다는 여러 주장을 음미하면서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깊이 있게 탐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불상과 탑이 조성된 전남 화순 운주사의 초입을 지나 처음 만나는 천불천탑의 시작점이다. 13세기 전반 천태종 백련결사를 주도한 원묘국사 요세를 천책이 도와서 탑과 불사를 조성한 내력이 진정국사 천책의 〈호산록〉에 전한다. 이를 확증하기 위하여 2021년 6월 25일 수많은 불상과 석탑을 조성한 경험을 가진 보령 출신의 석공 명장과 동행하여 답사한 결과 모든 석조물이 같은 시기에 조성됐다는 해설을 얻었다. 다양한 시기에 조성하였다는 여러 주장을 음미하면서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깊이 있게 탐구할 필요가 있다.

고려의 왕정복고와 백련결사

원묘국사 요세(圓妙國師了世, 1163~1245)는 초기에 수선결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독립된 결사를 진행하면서 고답적인 문수신앙을 강조한 수선결사와 달리 서민을 포용한 염불과 보현신앙을 강조하였다. 수선결사의 초조인 보조지눌은 사족(士族)인 서해도 동주 출신이었고 원묘국사 요세는 의성군에 속한 신번현의 호장가문 출신으로 보조지눌의 계승자인 진각혜심과 상통하는 토호 출신이었다. 요세의 계승자는 개경의 사족 출신이 백련결사에 합세하여 도우면서 제대로 결사의 운용이 궤도에 올랐으나 결사의 초조가 가진 출발점의 특성을 한동안 유지한 요소도 있었다.

백련결사와 수선결사는 여러 지역에서 시작되었지만 중심 지역은 지리산 동남의 농수산물이 풍부하고 겨울에도 채소가 얼지 않고 월동하는 지역이었다. 탐진(耽津)의 백련결사는 탐라를 연결하는 항로와 관계가 깊었다. 탐진은 오늘날도 자생차가 풍부하고 고려시대에는 부근이 차의 산지로 주목되었다. 조선 후기의 정약용(丁若鏞)은 백련결사에서 8국사가 배출되었다는 기록을 중요시하고 자료를 모아 〈만덕사지(萬德寺志)〉를 지었다. 이어서 조선 후기 대흥사의 전신인 〈대둔사지(大芚寺志)〉를 지어서 만덕사의 전통이 선종 중심이고 다수의 선승을 배출하였음을 입증하였다. 또한 불교의 종파가 소멸되고 선종으로 통합되어 계승되었음을 밝힌 〈대동선교고(大東禪敎考)〉를 남겼다.

정약용은 원묘국사 요세의 백련결사를 대신하여 결사의 취지를 알리고 보좌했던 정명국사 천인과 진정국사 천책의 글을 철저하게 모았다. 특히 진정국사 천책의 〈호산록(湖山錄)〉을 기초로 〈만덕사지〉를 지었다. 정약용은 현존하는 일지암본보다 앞선 원본을 활용하였다. 〈호산록〉은 14세기 초 국사로 책봉된 무외국사 정오(無畏國師丁午)가 간행하고 이안(而安)이 발문을 썼음이 확인되었다. 무외국사는 한때 조계종에 못지않은 종세로 천태종을 향상시켰음이 확인되는 고승이다.

진정국사의 차시와 송·일본과의 교류

진정국사 천책은 세속의 본관과 출신성분과 생애 전반기가 자세하게 전한다. 국자감 재생으로 동기생이었던 민호에게 보낸 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생애 전반의 자서전에 해당하는 서신에는 촉망되는 급제자가 주위의 만류를 물리치고 원묘국사에게 출가하는 장면과 이에 대한 자신의 결연한 의지가 잘 담겨 있다.

〈호산록〉에는 조계종의 고승이면서 역시 급제한 명문의 후예 운유자 탁연(雲游子卓然)과 교류도 밝혔다. 그를 차회(茶會)에 초청하고 다른 종파 결사와 손잡고 보기 드문 사례도 실었다. 차는 소통과 협력의 매개체였고 그가 백련사에서 생산한 차를 평가하고 생산을 촉진하면서 종파 간 선의의 경쟁과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탁연은 서예에 뛰어나 그가 쓴 천책의 서신은 송의 연경사 법언에게 보내졌고 고려에 명문과 명필이 있음을 보고 그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로 국위를 선양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초암국사(草庵國師)에게도 전해졌다. 동아시아의 형세가 격변하는 시기 백련결사와 수선결사의 협력과 국가 사이 교류는 전란으로 발생하는 살생을 줄이려는 노력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수선결사가 토착세력과 결합하고 임시수도로 천도한 강화 정부에 협력하면서 경제기반에 먼저 크게 기여하였다면 백련결사는 왕정복고의 시기에 두각을 드러내었다. 국가가 강화로 몽진한 시기에 수선결사의 활동이 돋보인다. 특히 대장도감판 대장경을 강화 선원사와 남해 분사도감에서 나누어 조성한 사실은 중요하다. 출륙(出陸)하여 왕정복고(王政復古)와 몽골과 혼인동맹을 맺은 초기에는 백련결사의 약진이 돋보였다. 진정국사 천책보다 늦은 무외국사 정오는 만덕산 백련사를 기반으로 원의 궁정과 고려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몽골은 소수민족을 결속하여 동아시아의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한 남송을 통합하기 전에 이미 유럽의 동부까지 정복하여 대제국을 완성한 세계적인 국가였다. 몽골제국은 서하의 기반이었던 위구르나 거란족이 세웠던 요와 여진족이 세운 금의 후예를 포함한 북방 소수민족을 통합하여 출발하였다. 몽골제국은 쿠빌라이가 대원제국이란 국호를 사용하기 전에는 양자강 수계 하류의 남송을 통합하지 못하였다. 쿠빌라이는 오늘날의 미얀마와 타이의 북부에서 파간 왕국까지 여러 차례 코끼리부대에 밀렸으나 이를 극복하였다. 그곳에서 코끼리부대를 보강하여 섬처럼 고립된 남송을 서남에서 북동으로 진격하여 수도 임안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2년에 걸쳐 잔존세력 마저 광저우까지 추적하여 소멸시키고 북방민족으로는 양자강 남쪽까지 통합한 최초국가를 완성하였다.

대원제국은 동아시아를 차 생산의 핵심기지로 활용하면서 남아시아와 동아시아 반도와 섬의 일부를 제외한 세계를 경영한 최초의 국가였다. 고려에서 보존된 동아시아의 문화기반과 문화전통을 유럽에 전파시켜 지리상 발견시대를 촉진하였다. 몽골의 화약과 공성술, 고려의 인쇄술과 잠업과 도자기, 복식부기와 화불(畵佛)은 유럽의 잠자던 그리스의 과학기술과 예술을 다시 부흥시켜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쿠빌라이가 칸에 오른 초기 몽골제국은 대원이란 두 가지 국호를 사용하였고 이미 세계 경영을 달성하였다. 아래는 코끼리부대를 중심으로 쿠빌라이의 부대가 남송의 수도 임안을 향하여 진격하는 모습이다. 
쿠빌라이가 칸에 오른 초기 몽골제국은 대원이란 두 가지 국호를 사용하였고 이미 세계 경영을 달성하였다. 아래는 코끼리부대를 중심으로 쿠빌라이의 부대가 남송의 수도 임안을 향하여 진격하는 모습이다. 

백련결사와 수선결사의 차와 예술

차는 수선결사의 제2대 진각국사 혜심과 제5대 원오국사 천영이 지리산 남쪽의 여러 고을과 뇌원차의 고향 두원현(荳原縣)의 불대사(佛臺寺)를 중심으로 보성의 대원사까지 확산시켰다. 혜심과 천영은 수선사와 불대사를 기반으로 수선결사의 경계를 확충하였다. 이에 탐진 백련결사의 원묘국사와 그를 계승해 천태종에서 배출한 8국사가 차를 수준 높은 차회와 국제교류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국위를 선양하였다. 천태종의 무외국사 정오는 천태종의 5산문을 새롭게 편성하고 국청사와 묘련사를 중심으로 대원제국의 진전사원으로 천태종의 교세를 조계종에 못지않게 끌어올렸다.

고려 후기 조계종과 천태종은 불교계에서 가장 우세한 종파였다. 조계종의 수선결사와 천태종의 백련결사는 국가를 지키는 4대 종파에서 가장 돋보이는 두 개의 기둥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조성된 고려의 화불과 사경은 불교예술로서 고려와 동아시아는 물론 원의 궁정에서 가장 흠모하는 예술이었다. 특히 화불은 왕실의 조상숭배를 담당했던 진전사원(眞殿寺院)의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과 결합해 부처의 그림으로 발전한 미술의 꽃이었다. 화불은 금속과 보석과 어패류의 껍질과 각종 희토류를 포함한 광물의 정밀한 입자를 접목시킨 회화였다. 채색의 안료에 먹과 아교와 백반을 활용하여 변질이 적은 기법을 발전시켜 당시 회화의 정점(頂點)에 있었다.

또한 천태종과 중심경전인 〈법화경〉은 사경의 소재로 많이 사용되었고 화불이라 불리는 아미타불과 관음보살은 천태종 염불의 대상인 부처와 보살이었다. 종파로 보면 화엄종과 유가종이 몽골의 라마교와 친숙한 유대가 있었고 이들 종파의 사경과 화불은 천태종 다음으로 몽골제국에 수출되고 사경과 화불을 제작하기 위하여 고려의 승려 서예가와 화사(畫師)가 자주 초빙된 사례도 확인된다.

수많은 작은 부처를 전체의 하나로 나타낸 비로자나불 오만불도의 다른 이름은 대적광불이고 대원제국의 황제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실제로 몽골과 혼인동맹을 맺고 고려 국왕과 결혼한 공주는 개경의 다수의 천태종 사원을 모국 부모의 원찰로 삼았고 몽골 황제와 결혼한 고려 출신 황후의 순산을 기원하며 많은 화불을 조성하였다. 고려 천태종의 수많은 사경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공주와 고려 국왕을 나타내는 황실과 왕실의 조상숭배와 관련이 있었다. 고려의 국왕은 황제와 황후의 명복을 기원하며 혼인동맹을 준수한 근거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금륜 손광석 화백이 재현한 14세기 초 수월관음도. 초정밀의 선과 안료의 입자가 안정된 채색으로 생명력을 나타냈다. 아미타불은 몽골 황제로 수월관음은 혼인동맹을 유지한 몽골 제실의 공주를 의미한다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배채(背彩)의 초상화 기법은 진전사원에서 거행된 어진을 모신 왕실의 조상숭배에서 발전시켜 계승된 초상화와 상통한다.
금륜 손광석 화백이 재현한 14세기 초 수월관음도. 초정밀의 선과 안료의 입자가 안정된 채색으로 생명력을 나타냈다. 아미타불은 몽골 황제로 수월관음은 혼인동맹을 유지한 몽골 제실의 공주를 의미한다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배채(背彩)의 초상화 기법은 진전사원에서 거행된 어진을 모신 왕실의 조상숭배에서 발전시켜 계승된 초상화와 상통한다.

원본 〈호산록〉의 행방

진정국사 천책의 〈호산록〉은 고려 후기 천태종의 고승이 지은 문집으로는 가장 분량이 많다. 우리나라의 고승이 남긴 문집 중에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분량의 사례는 〈대각국사문집〉이다. 대각국사 의천의 편저는 더욱 방대한 분량이다. 47세의 생애로 편저의 대부분을 개인 저술로 보기는 어렵고 선배와 도반의 협력을 받았을 것이다. 〈원종문류〉와 〈신편제종교장총록〉을 완성하였고 이에 따라 장소(章疏)를 간행하였다. 의천 생전에 시작하여 입적한 다음에 완성된 방대한 〈석원사림(釋苑詞林)〉도 방대한 분량이었다. 가장 중요한 성과는 의천이 확정한 대장경이 대장도감에서 조성된 정판(正版)의 7할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정약용은 최치원과 이규보 그리고 진정국사 천책을 3대 문장가라고 극찬하였다. 그리고 〈호산록〉의 원본 하책을 보충할 상책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만덕사지〉에서 무외국사 정오가 남긴 〈호산록〉의 원문에서 발문을 인용하였을 정도로 저술의 가치를 제대로 밝혔다. 천책은 뛰어난 문장뿐 아니라 〈호산록〉 하책에 실린 시문에 천태종 백련결사에 대한 당시 상황이 선명하고도 생동감 있게 저술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천태종의 두드러진 저술과 문집은 백련결사와 더불어 8국사 이후의 저술로 다른 종파에 비하여 전하는 자료가 적다. 금석문도 극히 적게 남아있고 훼손되거나 잃어버린 천태종 고승의 저술을 찾으려 노력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오직 진정국사 〈호산록〉 상하 2책 4권 가운데 하책의 원본의 아닌 전사본만 찾았다. 필자가 찾은 백련결사의 기록은 〈호산록〉이 내용으로나 분량으로도 대표할 정도이다.

〈동문선〉에 실린 자료는 무외국사 정오의 글이 많다. 정약용이 인용한 〈호산록〉에는 무외국사 정오가 인용한 발문이 있을 정도로 고려의 원본 〈호산록〉이 인용되었다고 짐작된다. 필자가 수집하여 번역하고 주석한 〈호산록〉 하책은 선집과 발문이 없는 사본이었다. 사본 중에서 고려 인본의 글씨체 형태가 남아있는 선본에 해당하였다. 200년 남짓한 시기에 하책의 원본마저 없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약용은 상책의 행방에 대하여 자신의 문집에 추적한 근거를 남겼다. 서문이 실린 상책과 발문이 실린 하책의 원본을 확보한다면 한글연구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처럼 고려 천태종의 전통에 생동감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소장자의 소식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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