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로 돌아오라’ 교서에도
​​​​​​​서신 통해 곡진하게 사양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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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간다는 말은 왠지 모르게 아늑함이 느껴집니다. 앞으로만 나아가던 발길을 되돌리는 그 끝에는 집이 있지요. 하루 일과를 마치면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에는 피붙이가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온갖 물건들이 있고, 내가 써서 내 체취가 밴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나’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바깥에서의 가식적이고 사무적인 가면을 집에서는 벗습니다. 쉬고 싶을 때 우리는 모두 집을 찾습니다.

평생 타지에서 지낸 이들도 죽을 때 고향을 찾습니다. 여우조차도 죽을 때 자기가 살던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고 합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생명체들은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귀소본능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닙니다. 숨을 쉬는 모든 것들은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일을 거스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출가수행자입니다. 출가는 말 그대로 집을 나가는 것입니다. 출가의 빠알리어는 ‘pabbajja(빱밧자)’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다.’라는 뜻이고 영어로는 ‘The going force’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앞쪽을 향하여 전진한다는 뜻보다는 ‘집에서 집이 없는 곳으로 나아간다.’는 정형구로 초기경전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집을 나서는 것이 집에서 사는 것보다 더 나은 삶, 더 가치 있는 삶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구도자로서 살아간다는 뜻이지요.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든 생명체는 집을 찾아 돌아오는 것이 ‘본능’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구도자는 집으로 돌아가는 본능을 거스르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의천 스님의 문집에서 무척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습니다. 속가 형님이 집으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써 보냈는데 거절하는 내용입니다. 아시다시피 의천 스님의 집은 대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과 막강한 부와 드높은 명예를 움켜쥔 곳입니다. 고려는 부자간의 세습보다 형제간의 세습이 선호되었기에 의천 스님이 출가하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면 왕이 되었을 확률도 매우 높습니다. 바로 이런 궁궐로 돌아와서 자신을 도와달라며 스님의 셋째 형님이 편지를 썼습니다.

스님의 셋째 형 숙종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궁궐에는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아버지 문종의 뒤를 이어 첫째 아들 순종이 즉위하나 4개월이라는 짧은 재위기간과 함께 3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 문종의 둘째 아들 선종이 즉위했는데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국사를 돌보고 불사에도 적극적이었으나 1년 남짓 병고에 시달리다 46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선종의 아들 헌종이 뒤를 이어 즉위하지만 병약한 헌종은 1년 만에 왕위에서 내려와야 했지요. 선종의 동생인 숙종이 조카 헌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 과정에서 왕실 외척인 ‘이자의의 난’이 있었습니다. 이후 숙종은 강력한 군주로서 나라를 다스립니다.

역사책에 기록된 이 일을 보면서 의천 스님의 심정을 헤아려봅니다. 스님은 이 일련의 왕위 계승 과정을 살펴보며 왕자(王者)로서 산다는 것, 그 왕관의 무게가 참으로 버겁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평생 권력을 쥐고 빼앗기고, 권력을 물려주고 물려받는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반목, 암투를 집 즉 궁궐을 떠나 앞으로 나아간 출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 피붙이들 사이에 벌어진 권력다툼에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착잡했고, 비통했을 것입니다. 아마 스님은 그곳은 자신이 살아가기에 너무 거칠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숙종의 교서를 받은 것입니다. 대궐로 돌아와서 자신 곁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힘을 보태달라는 교서였습니다. 의천 스님은 붓을 들었습니다.

의천 스님은 두 차례에 걸쳐 입궐하라는 교서를 받지만 곡진하게 사양한다. 사진은 1360년 고려 공민왕이 정광도에게 내린 교서.
의천 스님은 두 차례에 걸쳐 입궐하라는 교서를 받지만 곡진하게 사양한다. 사진은 1360년 고려 공민왕이 정광도에게 내린 교서.

“10월 22일에 추밀원좌승선 이부시랑 김덕균 등이 와서 교서 한 통을 전하기에 삼가 대왕의 유지를 받드니, 신에게 대궐로 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지봉(芝封:교서)의 명을 내려 연사(蓮社:사찰)를 영광스럽게 해주셨으므로 삼가 분부를 받은 이후로 감격과 놀라움이 절실하게 교차됩니다.”

수행자가 사는 공간에 친히 임금께서 교서를 내려주신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스님은 숙종의 명을 따를 수 없음을 간곡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 머리를 깎고 자라서는 스승을 찾았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잇고 싶은 마음에 교리를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 마음은 진리를 지키는(호법) 것에 있으며, 세속 일을 따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혼자 오래도록 소란한 세상을 싫어하며 일찍부터 한가한 생활을 도모하다가 마침내 시냇가에서 안빈낙도하고, 산속에서 도를 추구하려 합니다. 그러니 바깥의 사정을 살펴서 그들을 비호하거나 악을 끊고 선을 행하도록 사람들에게 권하는 일은 처음부터 제 능력을 벗어난 일입니다.”

숙종이 권력을 쥐기까지 의천 스님도 마음고생이 컸습니다. 열정적으로 추진하던 모든 불사에서 손을 떼고 해인사로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형님 덕분에 다시 제자리를 찾았지만, 의천 스님이 바라는 자리는 딱 거기까지! 자신은 타고난 천성이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구도자여서 궁궐의 높은 자리는 맞지 않다는 것이지요. 얼핏 스님은 세속 일과는 무관하게 홀로 조용한 곳에서 일 없는 태평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악을 끊고 선을 행하도록 사람들에게 권하는 일이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라는 고백은, 세상 사람들 일에 정치적으로 깊이 개입하기를 거부하는 수행자의 의사표현이라고 봅니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오직 사람들이 저마다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세상을 향해 각자 연민을 품고 윤리를 회복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지닌 이가 상벌을 통해 권선징악을 한다한들 그것은 임시방편이요, 사람들 스스로가 의지를 일으켜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조용한 곳에서 선정에 잠겨 있다가 문득 생각했습니다.

‘죽이지 않고 죽이게 하지 않고, 정복하지 않고 정복하게 하지도 않고, 슬프지 않고 슬프게 하지 않고 법답게 세상을 다스릴 수 있을까?’

어쩌면 매일 아침 탁발하려고 사람 사는 곳으로 다니시면서 끝없이 목격한 갈등과 반목의 상황이 떠올랐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로 그 때 마왕 파순이 부처님 마음을 알아차리고 불쑥 나타나서 이렇게 권합니다.

“그 일을 부처님이 하시면 됩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왕궁으로 돌아가서 선정을 베푸십시오. 수행을 많이 하셨으니 저 히말라야 산도 황금으로 바꿀 수 있는 분 아니십니까? 그러니 부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십시오.”

파순의 이 권유는 상당히 현실적으로 여겨지지만 부처님은 거절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황금 산이 두 개 있어도/단 한 사람을 만족케 할 수 없으니/세상 이치가 그런 줄 알아서/바르게 살아야 한다.”

의천 스님의 마음 역시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가 되어 선정을 베푼다 해도 사람들을 흡족케 할 수 없으며, 끝없이 비교하고 열망하는 세상 사람들은 또 다른 반목과 갈등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숙종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지요.

“전하의 조정에는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이미 차고 넘칩니다. 굳이 제가 그곳으로 나아가도 할 만한 일이 없고 물러난들 애석할 일도 없으니 장차 무슨 공을 세우고 사람들 요구에 부응하겠습니까? 그저 옛 절에 머물면서 제 본래 마음에 맞게끔 지내도록 해주신다면 전하를 위해 정성 다해 부처님에게 향 사르며 기도를 올리겠습니다.”

그런데 의천 스님의 간곡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다시 한 번 궁궐로 오라는 교서를 내립니다. 스님은 거듭 사양합니다.

“저는 천성이 용렬한데다 식견 또한 융통성이 없습니다. 출가하여 좋은 때를 만났으나 여태 크게 드날리는 성과가 없습니다. … 전하께서 옛정을 돈독히 구하시며 친족의 도를 화목하게 넓히려 하시어 거듭 교서를 내리시지만 제게는 전하를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 바라건대 전하께서 신의 고충을 살펴 마음대로 살 수 있게 놔두신다면 정성을 다 바쳐 불법을 수호하는 장한 포부는 이생에서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마음을 가다듬고 평생토록 불경을 보면서 그저 내세를 기약하겠습니다.”

숙종은 1095년에 왕위에 올랐고, 그로부터 6년 뒤인 1101년에 의천 스님은 4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습니다. 스님의 시에는 육신이 병들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드문드문 드러나는 바, 궁궐로 들어오라는 숙종의 교서를 받았을 때 스님은 경전을 읽고 포교하는 등 불사를 위한 시간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음을 예견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부처님께서 선정에 잠겨 '죽이지 않고 죽이게 하지 않고, 정복하지 않고 정복하게 하지도 않고, 슬프지 않고 슬프게 하지 않고 법답게 세상을 다스릴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자 마왕 파순은 '왕궁으로 돌아가 선정을 베푸시라.'고 권한다.ⓒGettyimagesBank
부처님께서 선정에 잠겨 '죽이지 않고 죽이게 하지 않고, 정복하지 않고 정복하게 하지도 않고, 슬프지 않고 슬프게 하지 않고 법답게 세상을 다스릴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자 마왕 파순은 '왕궁으로 돌아가 선정을 베푸시라.'고 권한다.ⓒGettyimagesBank

의천 스님을 가리켜서 왕족 출신으로서 그 후광으로 힘들이지 않고 불교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송나라에 가서도 고려국 왕자라는 신분으로 후한 대접을 받았으며, 아버지 문종에서부터 세 형들이 차례로 왕위에 오른 덕분에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다 세상을 떠난 인물이라 평하는 내용을 자주 봅니다. 숙종에게 화폐유통을 건의하고 실시하기까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을 보면 스님이 국가적인 사업에도 관심을 품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왕자로서, 권승으로서의 삶은 자신의 길이 아님을 간곡하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왕가 원찰의 주지로 임명되었어도 그곳에서 경전을 강의하고 법석을 열며 불교계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을 뿐, 그것으로 세속의 권력까지 휘두르려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궁궐로 돌아오라는 형님의 교서에 스님은 정중하고 곡진하게 온갖 이유와 근거를 대며 사양하지만 그 긴 답장을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하면 “나를 그냥 좀 내버려두십시오!” 바로 이것입니다.

수행자인 자신이 걸어가고 싶고 걸어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찾았으며 우직하게 그 길을 걸어가겠노라는 결연한 심정이 느껴지지 않나요? 세상 모든 생명체가 본능처럼 돌아가는 집으로 향하는 길이 아닌, 붓다의 옛길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출가의 삶을 사셨던 분이 바로 의천 스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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