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부처님 탄생
그 순간에 담긴
상징적 의미 깃들어

2022년 5월 8일 부처님오신날 단양 구인사 설법보전 앞 관불단의 아기부처님. ©금강신문    
2022년 5월 8일 부처님오신날 단양 구인사 설법보전 앞 관불단의 아기부처님. ©금강신문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사찰에서는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아기 부처님을 법당 앞에 모시고 관불의식(灌佛儀式)을 행한다.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자세는 태어난 직후 ‘첫 일곱 걸음을 걷고 탄생게를 읊은 순간’을 상징하고, 깨끗한 물을 불상의 정수리에 부어 불상을 씻는 관불의식은 아기 부처님이 태어났을 때 나가(Naga, 용)들 또는 인드라와 브라흐만이 깨끗한 물로 씻어준 ‘첫 목욕’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관불의식은 첫 일곱 걸음과 탄생게, 첫 목욕이라는 부처님 탄생의 순간을 기념하는 상징적인 의례이다.

탄생불의 여러 형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석가모니 부처님이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옮긴 후 외쳤다는 여덟 글자.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본 적 있는 부처님의 첫 말씀이다.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외친 이 선언은 “하늘 위 하늘 아래 내가 가장 존귀하다.”는 뜻이다. 뒤에 이어진 “삼계(三界)는 모든 고통이지만, 내가 마땅히 편안히 하리라[三界皆苦 我當安之].”라는 대목과 더불어 이 세상 모든 생명이 하나하나 모두 존귀함을 의미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역사적인 탄생 장면은 불교 역사와 부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장면이었기에 일찍부터 아기 부처님을 그림과 조각으로 재현하였고 그 모습이나 자세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리 표현되었다. 인도와 중국에서는 조각이나 회화로 부처님의 생애를 묘사한 ‘불전도(佛傳圖)’라는 서사적인 장면 속에 마야부인의 출산 장면을 표현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 장면 가운데 비중은 크지 않지만 아기 부처님의 첫 일곱 걸음과 아기 부처를 목욕시키는 장면 등도 표현되었다.

반면 우리나라에는 서사적인 불전도가 많이 남아있지는 않다. 그 대신 오른손은 위로, 왼손은 아래로 내린 아기 부처님의 모습을 단독 상으로 제작하였는데 현재까지도 이러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탄생불(誕生佛)이 많이 남아 있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독립된 탄생불은 주로 한국과 일본에만 다수 남아 있다는 점이다. 아기 부처님을 단독 상으로 제작한 사례는 인도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중국에서는 송대(宋代) 이후에나 나타난다.

사실 ‘탄생불’이라는 표현은 지극히 근세에 등장한 용어일 뿐,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탄생불을 일컫는 별도의 용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탄생불은 탄생 직후 아기 부처님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이다. 어린 아이와 같은 4등신 또는 5등신의 비례와 체형에 어린이 같은 순수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담고 있다. 한편 아직 깨달음을 얻기 전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성불한 존재이기에 깨달음을 상징하는 부처님의 육계가 표현되었고 양팔이 유난히 길게 표현되기도 한다.

현존하는 가장 많은 아기 부처님의 유형은 오른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왼손을 아래로 내린 자세로 ‘첫 일곱 걸음’과 ‘탄생게’를 상징한 유형이다. 다른 하나의 유형은 오른손 엄지, 검지와 중지를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접은 채 손바닥을 앞으로 향하여 가슴 앞에 들고 있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뜨린 자세이다. 이 역시 첫 일곱 걸음과 탄생게를 의미하는 변형된 형태로 볼 수 있지만 아기 부처님의 손모양이나 자세는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독창적인 탄생불 형태가 자리 잡은 이유는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고, 막연히 관불의례와 연관성을 추정해볼 뿐이다.

(왼쪽) 탄생불, 삼국시대, 금동, 높이 16.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른쪽 위 부터) 탄생불, 삼국시대, 금동, 높이 12.1cm, 리움미술관.  탄생불, 삼국시대, 금동, 높이 6cm, 충청남도 논산시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탄생불, 삼국시대, 금동, 높이 11.7cm, 경상북도 경주시 월정교지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왼쪽) 탄생불, 삼국시대, 금동, 높이 16.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른쪽 위 부터) 탄생불, 삼국시대, 금동, 높이 12.1cm, 리움미술관.  탄생불, 삼국시대, 금동, 높이 6cm, 충청남도 논산시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탄생불, 삼국시대, 금동, 높이 11.7cm, 경상북도 경주시 월정교지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시대에 따른 차이

삼국시대의 탄생불이 과연 오늘날 우리가 사찰에서 행하는 관불의식의 대상이었는지, 부처님오신날 관불의식이 봉행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통일신라말 최치원(崔致遠, 857~?)이 쓴 지증대사(智證大師) 탑비에 관불일(灌佛日)이 표기되었는데 부처님오신날 관불의식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 문헌 중에 “백제 성왕이 538년 불교를 전래할 때 태자상과 관불에 사용되는 그릇 또는 도구[灌佛器]를 보냈다.”는 8세기 기록이 있고, 일본 동대사(東大寺)에는 8세기 대형 탄생불과 관불의식에 사용된 흘러내린 물을 담는 관정반(灌頂盤)이 남아 있다. 한국이 일본에 불교를 전래했다는 점에서 한국에도 이러한 의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탄생불이 특별한 의미를 지녀 별도로 제작된 것은 분명하지만 당시 관불의식에 탄생불이 쓰였는지 여전히 알 수는 없다. 다만 탄생불 제작의 전통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고, 고려시대 관불의식이 이루어진 것은 문화재로 확인된다.

1979년 인천 강화 고려산 인근에서 특이한 형태의 불상이 발견되었다. 불상이 발견된 강화는 몽골의 침략으로 왕실이 수도를 옮겨갔던 곳으로 강화 체류 기간에 중요한 불사가 이루어졌으며 탄생불 역시 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은 오른손을 위로 올리고 왼손을 아래로 내린 자세이고, 상반신은 옷을 걸치지 않았고 하반신에 짧은 치마를 둘렀을 뿐이다. 하의의 옷주름은 유려하게 표현되었고, 겹겹이 연잎이 표현된 연화대좌의 모습은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정수리는 살짝 솟아올라 육계를 표현하였고, 소라껍질처럼 말린 머리카락인 나발이 머리를 덮고 있다. 비록 양손은 모두 남아있지 않고, 표면이 녹이 슬었으나 얼굴 크기 대비 긴 신체비례를 제외한다면 전형적인 탄생불의 자세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탄생불의 단신에 귀엽고 어린아이 같은 면모는 사라지고 이 탄생불은 큰 얼굴에 몸은 가녀린 반면 얼굴 표정은 근엄하고 단호하다.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더 이상 어린이 같지 않은 날씬하고 긴 신체비례는 고려시대 탄생불의 특징으로 유리건판으로만 남아 있지만 얼굴은 크고 몸은 가녀린 금강산 유점사의 고려시대 탄생불도 바로 이러한 고려시대 탄생불의 특징을 보여준다.

관불의식의 전승

고려시대의 탄생불에 대해서도 사찰에서 어떻게 봉안되었고 어떤 의식이 행해졌는지는 그림이나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앞선 시기의 탄생불과는 달리 관불반(灌佛盤)이나 관불반을 받쳤던 관불기(灌佛器)는 남아있다. 김춘(金春)이 1251년 만들어 바친 관불반의 짧은 명문에는 “무게 5근 12냥에 달하는 ‘관불송라(灌佛松羅)’를 만들어 바친다.”고 기록되어 있어 관불에 사용된 대야를 ‘송라’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김춘이 자신을 낮추어 겸손의 의미로 노비로 표현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의식에 사용된 공예품 제작을 후원하였다는 점에서 김춘은 지역 재가신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김춘의 정성스러운 발원으로 관불의식이 완성될 수 있었으며 이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도 새로운 공덕을 쌓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깨끗한 물로 불상을 씻기는 관불의식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630년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쓴 명절에 관한 글에 “초파일에 금인(金人)을 씻기는 일은 불법과 함께 생긴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관불의식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자들은 욕불(浴佛), 즉 부처님의 형상을 목욕시키면 큰 복을 얻고 공덕을 쌓는다고 믿었으며, 15세기 중국 명대 간행된 〈석씨원류(釋氏原流)〉에서도 이러한 관불 장면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관불의식이 활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부처님을 모시는 의식은 계승되어 부처님을 모시는 가마가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경상북도 울진 불영사(佛影寺)에는 1670년에 제작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연(佛輦)이 있다. 불연은 부처를 모시는 가마로 법회를 열 때 사용되며 존귀한 부처상과 보살상을 모신다. 불영사에서는 근래에도 매년 부처님오신날에 아기 부처님을 모시고 신도들이 행렬을 이루며 경내를 돌 때 이 불연을 사용했다.

가마의 바닥에 불연을 제작하게 된 경위를 기록한 ‘조련기(造輦記)’에는 학종(學宗) 스님이 울산 지역에 이르러 시주를 받고 양산 지역인 원적산 대승암(大乘庵)에 머물며 1669년부터 1670년에 걸쳐 불연 제작을 주관하였다고 쓰여 있다. 탁발을 하며 시주를 받은 스님의 노고와 울산과 울진 지역 신도들의 후원의 결과로 부처님의 탄생을 다시 한 번 뜻깊게 되새기는 의식이 다양한 형태로 이어지게 된 셈이다.

불교의 탄생지인 인도나 불교를 전래하고 발전시킨 중국과 달리 독립된 단독 상으로 탄생불이 우리나라에서 더 중요한 조형 전통을 형성했던 것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친 장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우리 민족의 마음이 투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인천 강화에서 발견한 고려시대 탄생불은 발견 이후 한동안 수장고에만 보관되어 있었다. 바닥이 편평하지 않아 홀로 서 있을 수 없어 전시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 담당 학예연구사였던 필자는 다른 관람객들도 고려시대 탄생불을 보았으면 하는 안타까움에 보존과학부 학예연구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불상을 세울 수 있는 받침대를 만들고 불교조각실에 전시할 수 있었다. 마침내 전시를 마치고 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부처님을 바라보던 그 날의 감동은 지금까지 잔잔한 여운으로 남아 있다. 이후 필자는 2015년 특별전을 개최하면서 고려시대 탄생불과 관불반 그리고 조선시대 불연을 한자리에 전시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부처님께 마음으로라도 한없이 감로수를 부어 공양드리고 싶은 마음의 발로는 아니었을까 싶다.

(왼쪽) 금동탄생불, 고려, 금동, 높이 25.8cm, 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 탄생불, 고려, 금동, 강원도 금강산 유점사 능인보전,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왼쪽) 금동탄생불, 고려, 금동, 높이 25.8cm, 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 탄생불, 고려, 금동, 강원도 금강산 유점사 능인보전,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탄생불과 관불반, 8세기, 금동, 불상 높이 46.8cm·관불반 지름 89.2cm, 일본 동대사(東大寺) 소장(사진 출처: 〈大仏開眼1250年東大寺のすべて〉(奈良国立博物館, 2002), 도 22, p.84)
탄생불과 관불반, 8세기, 금동, 불상 높이 46.8cm·관불반 지름 89.2cm, 일본 동대사(東大寺) 소장(사진 출처: 〈大仏開眼1250年東大寺のすべて〉(奈良国立博物館, 2002), 도 22, p.84)
관불반 명문(왼쪽)과 관불반의 모습. 관불반, 고려 1215년, 금동, 높이 7.8cm·지름 44.5cm, 개인소장. 
관불반 명문(왼쪽)과 관불반의 모습. 관불반, 고려 1215년, 금동, 높이 7.8cm·지름 44.5cm, 개인소장. 
불영사 불연, 조선 1670년, 목조, 높이 125cm·폭 86cm·길이 311cm,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97호, 불영사 소장.
불영사 불연, 조선 1670년, 목조, 높이 125cm·폭 86cm·길이 311cm,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97호, 불영사 소장.

신소연
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미국, 한국미술을 만나다’(2012) 개최, 반가사유상실·불교조각실 개편(201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조각조사보고〉 발간(2014·2016), 특별전 ‘발원, 간절한 바람을 담다’(2015) 개최, 반가사유상실 ‘사유의 방’ 개관(2021) 등의 업무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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