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호

〈삽화=필몽〉
〈삽화=필몽〉

“그래도, 니는 꼭 될끼다.”

첫 딸을 낳았다. ‘위로’라는 말이 떠올랐다. 위로가 되었다. 내가 새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에 감사했으며, 아기의 웃음 안에서 내 웃음을 찾기 시작했다. ‘내 아기’·‘내 딸’이라는 발음에는 무한 책임도 있지만, 그와 함께 무한 행복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가 엄마가 되다니. 내 어머니의 고충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는 죄의식을 나는 그때 느꼈다. 그것은 죄였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아기가 웃으면 세상 번뇌가 다 날아갔다. 아기를 안고 있으면 마치 천사가 날 업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결코 이 세상이 나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딸을 낳다

‘국가’라는 말, ‘우리나라’라는 말이 무척 가까이 다가왔다. 처음 느껴본 감정이다. 국가가 우리나라가 무엇보다 잘 돼야 한다는 생각을 한 아기의 엄마가 된 후 처음으로 강하게 가져보았다. 엄마로서 강하게 아름답게 따뜻하게 사는 일은 내 책임이고, 이 나라의 모든 교육과 경제와 사회악을 다스리는 건 국가책임이라는 걸 강하게 느낀 건 바로 엄마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생겨나고 있었다. 아기 때문에 감정변화와 정신적 안정을 찾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문학도 시도 친구도 다 멀리 두고 살면서 “다 잘된 일”이라고 말하면서 살았는데, 밤마다 이상한 일이 생겨나고 있었다. 나에게 밤마다 잠자기 전 집안의 모든 서랍을 여닫고 다시 여닫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때로는 모든 이불을 다 내리고 무엇을 찾는 것이다. 집안은 마치 이사 가는 집 같기도 했다. 남편이 물었다.

“뭘 찾아?”

그 말에는 짜증이 화가 잔뜩 배어 있었다.

“뭘 찾고 있는데!”

남편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나는 내가 무엇을 찾는지 몰랐다. 그냥 서랍을 여닫고 다시 여닫았다. 밤마다 남편까지 혼미하게 만들어 가는 나에게 어느 날은 고함을 지르며 말했다.

“병원에라도 가봐!”

나는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나 자신도 잘 모르는 그 무엇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낮에는 아기를 보느라 아무 생각이 없었다가 밤이면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그 무엇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느 날 낮잠을 자는 아기를 그대로 두고 버스를 탔다. 세수도 안 한 얼굴로 자고 일어난 그대로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버스를 탔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불현듯 세상 밖이 궁금했을까? 내가 내린 곳은 종로2가였다. 왜 종로 2가였는지는 모른다. 따지고 들면 학생시절 너무나 익숙한 곳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사람들 속을 그냥 걸어갔다. 좋고 나쁜 것도 없었다. 그냥 걸어갔다.

“신군 아이가?”

날 알아보고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박목월 선생님이었다. 마치 약속이라고 한 듯 그날 그 시간에 그 자리에서 만나다니. 박목월 선생님은 대학시절 문학의 밤에 자주 오셔서 친근한 분이었고 좋아하는 분이었다. 존경하는 분이었다. 내 시를 칭찬도 많이 해 주셨다. 그런 분을 이런 곳에서 이런 길거리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내가 YWCA에서 결혼식이 있는데 한 30분 남았데이. 커피라도 한 잔 하자.”

나는 하느님이라도 만난 듯 선생님을 따라갔다. 다방에는 몇 사람만 눈에 띄었다. 선생님이 의자에 앉으시고 내가 의자에 막 앉으려고 몸을 의자에 내려놓는 순간, 그러니까 내가 아직 착석도 안한 그 상태에 선생님이 물으셨다.

“그래, 요새도 글을 쓰나?”

나는 앉기도 전에 다시 벌떡 일어섰다가 서서히 다시 앉았다. ‘글? 글? 글? 그래 맞아. 내가 밤마다 찾았던 것이 글이었는지 몰라. 아니야, 맞아. 바로 글이었어, 문학이었어, 시였어. 그래 맞아, 시였다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의문의 열쇠를 찾은 것 같았다. 일어서서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뜨거웠다. 캄캄한 밤에 숲속에서 길을 잃어 헤매다 죽음 직전에 사람 기척을 발견한 듯 나는 울었다. 기쁨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와 우노?”

나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설명하기가 도저히 불가능해서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을 이렇게 봬서 너무 기뻐서요.”

“글을 쓰나?”

“아니요.”

“다시 시작해야지?”

“네? ‘다시’라고 하셨습니까?”

첫 시집 출간

그 짧은 만남은 내 인생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날 일요일마다 시를 두 편씩 써 들고 원효로에 있는 선생님 댁을 방문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원효로 쪽을 보고 큰절을 했다. 몇 번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때 나는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를 마시고 또 마시고 밤을 새우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아기에게 미안함도 없었다. 내가 살아야 내 아기도 길을 찾을 게 아닌가. 밤마다 서랍을 여닫던 일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무섭고 혼돈의 희미함이 완전 가시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기를 업고도 아기를 안고도 밤을 새우며 책상 앞에 앉아 시를 썼다. 나는 박목월 선생님에게 무슨 일로 무슨 말로 무슨 보물로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

대학 4학년 때 전봉건 선생님의 〈여상(女像)〉이란 종합문예지에서 신인문학상을 받았고, 그것이 나의 등단이라는 사실은 박목월 선생님도 아시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다시 〈현대문학〉으로 등단하라고 1970년 가을 첫 추천을 해 주셨고, 1972년 봄에 마지막 추천으로 문단에 재등단을 시켜주셨다. ‘발’이라는 작품을 추천하시며 칭찬을 많이 하셨다. 선생님도 무척 기뻐하셨다 나는 박목월 선생님의 제자가 된 것이다. 선생님은 그때 일을 딱 한 번 말씀하셨다.

“신 군, 그날 종로에서 내가 놀랬데이. 내가 놀래서 다시 시를 권했는데, 신 군은 잘 할끼다.”

종로에서 나를 만났을 적,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너무 초라했고 눈동자는 초점이 잡히지 않아 마치 돌아버린 여자 같았던 내 모습이 너무 짠해서 집으로 오라고 말씀하셨다고. 그래서 나의 등단이 선생님도 더없이 기쁘셨던 모양이다.

그때 나를 보고 ‘얘에게 무슨 일이 있구나.’라고 생각하셨다는 말씀도 나중에 하셨다. 선생님은 무엇인가를 그것도 아주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여자에게 그 소중한 무엇인가를 찾아 준 은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첫 시집을 내야 한다고 빨리 준비하라고 넌지시 재촉을 하셨다. 그분의 한 마디는 속도 그 자체였다. 시집은 빨리 이루어졌다. 박목월 선생님이 발문을, 김남조 선생님이 제목을 지어 주신 첫 시집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봉헌문자(奉獻文字)〉다. ‘평생 문자를 바치며 살라’는 뜻이라고 하셨다.

첫 시집은 내 인생을 격상시켰다. 사회적으로의 격상이 아니라 내 개인의 인생에서 ‘내 책’이라는 것을 가지게 된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고향에서 잔치를 벌이고 싶다고 하셨다. 나도 그 심각했던 우울증을 견뎌내고 시집을 낸 시인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나 자신을 천만 번이라도 토닥거려 주고 싶은 일이었다.

그런데 어머니·아버지가 잔치를 벌이기도 전에 서울에서 잔치가 열렸다. 박목월 선생님이 시집 출판기념회를 연 것이다. 1973년 12월 18일 오후 6시, 그 시절 누구나 다 알고 있던 호수그릴에서 ‘신달자 첫 시집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나는 땅에 서 있었지만, 하늘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자신이 가장 원하던 꿈을 이루는 건 누구에게나 있는 일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우선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친구 3명을 초대해 4명이 온다고 했다. 아버지는 중요한 일이 있어 못오신다고 했다. 어머니와 친구 3명이 온다는 말에 좀 고민이 되었다. 남편에게 의논했더니 호수그릴 주변에 여관을 정해 보겠다고 했다. 남편에게 고마웠다. 밤에 서랍을 여닫는 병이 없어진 것을 남편은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렇게 출판기념회는 이루어졌다. 남편이 특별히 사준 옷을 입고, 미장원에서 머리를 하고, 남편이 택시를 불러 호수그릴까지 데려다주었다. 하루 일찍 오셔서 여관에서 주무신 어머니와 친구들을 모시는 일은 동생이 맡았다.

출판기념회의 막이 올랐다. 박목월 선생님, 정한모 선생님, 박재삼 선생님, 김남조 선생님, 김후란·허영자 선생님, 학교 선생님들도 김용숙 선생님, 임인영 선생님 외에도 열 명이나 오셨다. 그리고 여러 문인과 친구들이 있었다. 나보다 더 흥분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같이 오신 친구들에게 어머니는 “이봐. 여길 좀 봐. 쟤가 내 딸이야!” 그렇게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누구나 아는 일이다. 축사라는 것은 칭찬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신달자 씨는 우리나라 문학의 새로운 인물”이라든가, “이제 우리 시단에 시인다운 시인이 탄생했다.”든가, “신달자 시인은 우리나라 새로운 시의 길을 열었다.”든가 말이다. 상식적인 축사였지만 이 말을 되새기고 되새겨 들은 사람은 어머니 한 사람이었다. ‘내 딸이 이렇게 훌륭한가?’, ‘아유~ 내 딸이 우리나라 새로운 시인인가?’ 어머니의 피는 끓었고 같이 온 친구들에게 참으로 오랜만에, 아니 평생 처음이었을 어머니는 으스대며 자랑했다.

“자가 남달랐다 안 카드나. 내가 봐도 출중했는기라.”

속 썩이던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선생님들의 지극히 상식적인 축사에 몸이 달아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서울 명동거리에 나가서라도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춤이라도 추고 싶었을 것이다. 그 순간만은 행복했을까?

나는 출판기념회가 끝나고 방명록을 보다가 거의 기절할 뻔했다. 거기에 어머니 글씨가 있는 것을 보고 ‘으악!’ 하고 놀랐다. 내가 태어나 처음 본 어머니 글씨였다.

‘일생의 잇지 못할 날일세 엄마에 깁뿜이다.’

어머니는 출판기념회에 방명록이 있다는 정보를 알고 서울 오기 전 몇 날 밤을 새면서 글씨 공부를 하고 오셨다. 17글자를 20일간 밤낮으로 연습하고 오신 것은 딸이 시집을 낸 것이 더 이상 다르게 표현할 수 없는 극한의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틀린 글자까지 너무 아름다웠다. 나는 안으로 흐느끼며 ‘어머니, 고맙습니다!’를 쉬지 않고 불렀다.

〈삽화=필몽〉
〈삽화=필몽〉

어머니와 이별

그렇게 출판기념회가 끝나고 어머니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마도 눈을 감거나 뜰 때도 그날의 흥분이 분홍빛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딸의 그 다음 단계를 기다렸다. 또 무슨 황홀한 희소식이 있을까? 그날 밤 분위기로는 곧 엄청 세상을 놀라게 하는 새로운 뉴스가 딸로부터 전해올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신 속에 기다리고 또 기다렸을 것이다.

드디어 소식이 당도했다. 딸의 소식은 어머니를 기절시켰다. 며느리의 응급간호도 가당찮아서 동네병원 의사가 왔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이틀째 겨우 몸을 움직였고, 그 회복된 약간의 힘으로 찾아간 곳은 바로 그 희망찬 딸이 앉아있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병원 중환자 보호실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거기까지 오셨지만 날 만나지는 않았다. 그때 나는 35살, 막내가 두 살이었다. 젖을 먹이지도 못하고 일주일을 거의 굶고 있는 상태에서 눈도 못 뜨고 벽에 기대있는 딸을 멀리서 보고는 어머니는 도저히 만날 용기가 나질 않아 집으로 되돌아가셨다. 남편이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일주일째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서 이틀을 통곡하다가 정신이 들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달자는 이제 틀린기라.”

그러다가 어머니는 병원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표전화를 받는 사람이 중환자실 보호자에게 전화를 바꿔 주겠는가. 어머니는 백 번을 넘게 전화를 했고, 마지막 전화를 받는 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 죽어가요. 딸 목소리만 듣게 해줘요.”

결국 그 사람은 중환자실에서 날 전화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누가 전화를 했을까? 비틀거리며 따라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라고 내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는데,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나다. 그래도, 니는 꼭 될끼다.”

그리고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엄마! 엄마!” 나는 빈 전화기를 들고 울부짖었다 가뜩이나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것이 많아 엉엉 울고 싶었는데, 울음만 꺼내 놓고 전화 목소리는 사라졌다. 그리고 중환자실로 돌아오면서 나는 미친 여자처럼 소리를 쳤다.

“어머이 미안해.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해. 어머이 어머이…….”

인생에 엘리베이터는 없다. 내가 두 발로 걸어 올라가야 한다. 나는 아픈 다리로도 쉴 수 없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여든이 되어가는 시어머니, 병원에 누워있는 남편 그리고 어린 아이를 적어도 굶기진 말아야 하는 무거운 책임의 가장이 되어 있었다. 병원비도 낼 수 없어 자꾸 외상이 쌓여가고 있었다. 불행의 주역은 돈이었다.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인생에서 가장 싫어했던 내게 돈은 가장 섬겨야 하는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연락이 왔다. 어머니가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것이다. 나는 아침면회도 못하고 순천향병원으로 달려갔다. 택시 안에서 나는 빌었다. ‘제발 하느님! 제발 하느님! 우리 엄마 죽게는 하지 마세요.’ 그렇게 병원에 도착했지만 어머니는 이미 말문을 닫은 후였다. “아, 어머니. 아,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래도, 니는 꼭 될끼다.”

나는 이 한 마디, 어머니가 남긴 이 세상에 가장 크고 위대한 유산을 생각한다. 이 한 마디의 힘으로, 이 한 마디를 지팡이 삼아 여든의 나이에 안착할 수 있었다. 시를 쓰며 석·박사를 끝내고 대학교수까지 할 수 있었다. 그 한 마디 말의 힘이었다. 나는 그 한 마디 말에 담긴 용량을 다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여분이 있다. 내가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 그 마지막 순간에도 그 말의 힘은 소진되지 않을 것이다.

1973년 12월 첫 시집 〈봉헌문자〉 출판기념회에서 어머니 故 김복련 여사와 함께. 이날 어머니는 방명록에 20일 간 밤낮으로 연습한 17글자를 써주셨다. 
1973년 12월 첫 시집 〈봉헌문자〉 출판기념회에서 어머니 故 김복련 여사와 함께. 이날 어머니는 방명록에 20일 간 밤낮으로 연습한 17글자를 써주셨다. 

연재를 마칩니다.

신달자
시인.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첫 시집 〈봉헌문자〉를 비롯해 수필집 〈나이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백치애인〉,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 수많은 작품을 펴냈다. 만해대상 문예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공초 오상순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달진문학상(시부문),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