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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태어난 곳은 유배문화 흔적이 남아있는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입니다. 1952년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냈고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섬에서 살았습니다. 임자도에는 초등학교가 세 곳 있었고, 중·고교는 목포로 나와 하숙이나 자취를 하면서 공부를 했는데 그나마 목포의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은 초등학교 졸업생 가운데 40% 정도였습니다.

진학하지 못한 졸업생은 가업인 농사일이나 어업을 익히거나 어릴 때부터 도시로 나가 공장에 취업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섬에서 태어나면 섬사람들의 애환을 알기에 도시에 부귀영화가 있다고 믿고 도시를 동경하고 도시를 찾아 떠납니다.

당시 섬 안에 교회는 많아도 사찰이 없어서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연등을 밝히려면 배를 타고 나가야 했고, 섬 안에서 스님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탁발하기 위해 섬을 찾아오신 스님이 전부였습니다. 스님이 오시면 배편 때문에 바로 나가실 수 없어서 저희 집에서 하루를 묵고 가시도록 할머니와 어머니가 정성껏 모시곤 했습니다.

섬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대부분 낚시를 좋아하고 자연 속에서 살다 보니 야생동물과 야생조류를 자주 접합니다. 한 번은 새를 잡아 왔다가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새를 잡아 발목을 묶어 놓으면 얼마나 힘들겠느냐? 누가 너를 묶어 놓으면 좋겠느냐? 빨리 날려 보내라.” 그리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 와도 칭찬 한 번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덕분에 생명에 대한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의 씨앗이 자라났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상생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마음의 문이 열린 것 같습니다.

할머니와 9살배기 누나가 밭에 나가 김을 맬 때 할머니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염송을 해서 “할매, 그 소리가 무슨 소리랑가?”하고 물었더니 “오냐, 관세음보살님이 계시는데 극락을 가게 해주신단다.”하고 대답해주셨답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던 시절 일인데 할머니의 공덕으로 제가 불자의 인연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군대에서 만난 불교와 사찰음식

제가 사찰음식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70년대 초반 군대생활을 할 때입니다. 강원도 춘천 인근에 있는 보광사라는 사찰이었는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저는 부대에서 정보작전과 행정요원으로 정보계 소임을 맡고 있었는데, 부서 선임상사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교회 다니는 사병들을 총괄관리 하면서 비기독교인들을 전도하는 일까지 하였습니다.

일요일에는 부대에서 점심으로 라면을 제공했는데 교회에 가는 사병들은 라면을 받아 인근 교회에 가서 예배를 하고 오후에 귀대하는 것을 보며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사병들이 교회에 가면 부대에 남아있던 사병들이 초병과 사역을 도맡게 됐는데 한편으로는 부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시로 교회에 나오라는 선임상사의 뜻을 따르면 일시 편할 수 있었겠지만 교회는 가기가 싫어 부대 안에 있는 불자 사병 23명을 규합하여 우리도 일요일에 절에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대장께 요청하여 선임상사의 반대를 뚫고 우리도 라면을 받아 부대에서 15km 떨어진 산속 보광사를 도보로 다니게 되었습니다.

부대에서 사찰에 갈 때는 산을 넘어야 했기 때문에 고생은 되었지만 해방된 기분으로 매주 보광사에 가서 예불을 올리고 스님 법문을 들으면서 불심의 싹을 키웠습니다. 스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간 라면을 끓여 주는 대신 직접 밥을 짓고 산나물을 요리하여 맛깔스런 점심을 해주셨습니다. 그때 스님께서 해주신 반찬은 말린 취나물·곤드레나물·시래기나물·돌나물 무침과 풋고추조림으로 기억합니다. 군인 신분으로 사찰에 가서 매주 먹었던 그 음식, 지금 생각하면 정말 값진 사찰요리였습니다.

사병들은 스님께서 소중하게 지어주신 점심공양에 보답하고자 산에 들어가 사찰에서 긴요하게 사용할 땔감을 모아 전각 처마 밑에 가득 채워드렸는데, 마음이 참 뿌듯하고 보람을 느꼈던 20대 초반의 기억입니다.

佛法의 옷을 입혀준 스님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을 때는 서울에서 고등학교 동창과 매월 1회 정릉 삼정사에서 모여 법담도 나누고 주지 삼밀 스님과 발우공양을 하며 음식의 소중함을 깨우치곤 했습니다. 발우공양은 음식을 대하는 경건한 자세는 물론이고 밖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음식에 대한 가치가 고스란히 담겨있었습니다. 삼정사가 모임 장소가 된 이유는 우리가 졸업한 중·고등학교에 장학생제도가 있었고, 상위 그룹에 있었던 동창 2명이 출가해 그 중 지한 스님이 삼정사에 주석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명은 법련사에서 ‘불일회보’를 창간한 현음 스님입니다.

저에게는 보배와 같은 존재들인데 현음 스님은 오래전에 우리 곁을 떠나 만나지 못하는 슬픔을 늘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배가 부르면 수행의 완성은 멀다

1998년 삼보법회에서 청화 스님이 주석하시던 곡성 성륜사로 1박2일 사찰순례를 떠났습니다. 동행한 법전 한기창 삼보법회회장께서 “사찰에 가서 해우소를 가보면 참 수행자가 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들은 당시 주지 스님께서 의문이 생겨서 저녁공양을 마치고 철야정진에 들어가기 앞서 환영인사 시간에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한 노익장께서 해우소 말씀을 하셨는데 전혀 감이 오지 않습니다.”

질문에 법전 회장께서 답을 주셨습니다.

“사찰음식은 간결하고 정갈하여 이 음식을 소식으로 취하면 건강도 유지되고 수행에 큰 도움이 되지만, 음식의 양에 취하면 수행에 장애가 된다는 의미인데 해우소에 가면 정확하게 구분이 됩니다.”

저녁공양 때 발우공양은 아니어도 대중이 함께 모여 정갈한 사찰음식을 나누고 대중들의 근기에 따라 예불정근과 참선으로 철야정진에 임했습니다. 그날 얼떨결에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했던 3,000배 수행은 불자로서 살아가는 저에게는 가장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청화 스님께서는 용맹정진을 할 것이라 예상하시고 예불 수행력이 높은 스님이 집전하시도록 배려하셨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동참한 대중 중에서 쉬지 않고 아침까지 오체투지로 관음정근을 하면서 절을 올린 사람은 스님과 저 밖에 없었습니다. 관음정근을 하면서 스님의 목소리가 낮아지면 제가 목소리를 높이고 제 목소리가 작아지면 스님이 높여주고 이렇게 아침까지 절을 하였습니다.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성륜사에서 정성과 생명력이 듬뿍 담긴 사찰음식으로 법전 회장의 말 뜻을 상기하며 저녁공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친 덕분에 기운을 받아 3,000배 수행을 마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침공양을 마치고 청화 스님이 계시는 토굴에 올라가 친견하고 법문을 들었는데 토굴 벽면에 부처님의 6년 고행상이 모셔져 있는 것을 보고 스님의 평소 수행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후 평생을 음식에 대한 고마움과 절제를 실천하기 위해 오관게를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공양미 한톨의 무게

1983년 삼보법회(현 사단법인 대한불교삼보회)에서 교리를 배우던 어머니들이 생활 속에서 자비를 실천하자는 서원을 세우고 창립한 게 ‘불교어머니회’입니다. 초기 보살행에 나섰던 곳은 교도소·구치소·양로원·복지시설 등이었습니다.

1991년 군법사의 요청으로 우연히 위문 방문하여 군법당의 열악한 환경을 본 어머니회 회원들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군포교를 시작했습니다. 젊은 불자들을 포교하기 위해 논산 제2훈련소 호국연무사에서 훈련병을 대상으로 하는 수계식을 주도해왔습니다. 힘든 훈련을 받은 장병들에게 불교 신행을 통해 안락하고 안정적인 마음으로 훈련에 임하고 자대에 배치되어서도 신행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불연의 끈을 이어주었습니다.

수계를 받는 장병은 매월 5,000여 명 정도 되었습니다. 수계 제자에게 계첩과 불서, 단주와 호신불을 나누어 주고 떡공양을 했습니다. 공양할 떡을 만들기 위해서는 쌀이 필요했는데, 이 쌀을 지원해 준 사찰이 봉은사와 인천 용화사였습니다. 매달 200kg 정도를 지원해 주셨는데 제가 화곡동에 소재한 방앗간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당시 저는 삼보법회 총무부장 소임을 맡고 있어서 제 트럭을 사용해 무상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봉은사 곳간에서 쌀을 내어 주는 스님이 저를 배달꾼 취급하며 “저기 쌀 가지고 가. 승가대학에 보내야 할 쌀인데 왜 이렇게 엉뚱한 곳에 주는지 모르겠어.”라며 퉁명스럽게 뒷짐을 지고 서 계신 채 불만을 토로하셨습니다. 그래서 봉은사에 떡쌀을 가지러 가는 날이 가장 싫었습니다. 쌀을 40kg 마대에 담아 보관하니 참 무거웠습니다. 20kg 소금마대도 무거운데 40kg는 벅찼습니다. 아무도 거들어 주지 않으니 혼자 40kg 가마니 다섯 자루를 멀리 떨어진 트럭까지 짊어지고 가서 싣고 나면 입에서 단내가 올라왔던 기억이 납니다.

‘쌀 한 톨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가 아닐런지요? 한 톨의 쌀 안에는 비와 햇살과 바람과 천둥과 외로운 별빛도 들어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짊어지고 나른 쌀의 무게는 농민의 땀과 공양미를 올린 신도들의 정성으로 승가대학 학인 스님들에게 수행의 양식이 되었고, 논산훈련소를 거쳐간 수십만 눈푸른 젊은이들이 부처님께 다가갈 수 있게 길을 열었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인천 용화사에서는 부처님께 올린 공양물을 정재로 생각하고 소중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새로움을 발견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 10평 정도 되는 저온고에 쌀·잡곡·마른나물·과일 등 공양물을 신선하게 보관하는 것을 보고 식재료의 소중함과 사찰음식으로 이어지는 가치를 잘 지키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저온고에서 신선하게 보관하면 위생적이고 손실이 적어서 농부들의 땀방울이 고스란히 보존되고, 공양물을 올리는 신도들의 정성이 오롯이 담기며, 신선한 공양물이 사부대중의 건강을 지키는 사찰요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용화사의 후원에서 올라온 음식은 종류도 다양하고 풍성했고 정성이 듬뿍 담긴 사찰음식이었습니다. 사부대중에게 차별 없이 제공되는 공양 덕분에 저도 쌀을 가지러 간 날은 용화사에서 좋은 사찰음식을 접할 수 있어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용화선원에 계시는 수좌 스님들은 수행하시는데 힘이 드셔서 좋은 음식을 드시나 보다.’ 생각할 정도로 맛과 영양은 물론 정갈하다는 느낌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불교어머니회에서는 10여 년 동안 780여 평의 호국연무사 중창불사를 회향하고 25만 명의 장병을 부처님의 품안으로 이끌었습니다. 저도 10년이 지나면서 2000년도 초반에 쌀 운반을 멈추게 되었으며, 불교어머니회는 32년이 지난 지금도 논산훈련소 호국연무사 신병을 위한 수계첩을 만들고 있습니다.

진리의 꽃밭(화엄)에서 살아가기

신안군 임자도는 역사·문화적으로 불교의 성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1681년 6월 숙종 7년에 명나라에서 일본으로 가던 무역선이 1차로 영광 칠산 앞바다에서 난파되고 해류를 따라 표류, 2차로 임자도에 닿았습니다. 표류선에서 1,000여 권의 불서가 발견되었고 나주 관아에서 수습해 왕실로 보내게 됩니다. 수습하지 못하고 해안가에 흩어져 있던 불서를 영광 불갑사에 주석하시던 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 스님께서 수습해 7종 154권으로 복각해 낙안읍성 징광사(澄光寺)에 목판으로 보관했습니다. 백암성총 스님의 입적 후 1769년까지 총 12종 88권이 복각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숭유배불의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임자도에서 백암성총 스님이 수습한 명나라 가흥대장경 안에 수록된 〈화엄경소초〉는 조선 후기 불교를 꽃피우게 한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임자도는 27개 마을에 교회가 14곳이고, 불교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저는 15년간 임자도에 〈화엄경소초〉가 전래되어 온 역사의 증표로 유적비를 세우기 위하여 발원 기도를 해왔습니다. (BTN 신행이야기 ‘가피’ 유억근·이정심 부부편 참고) 2019년 삼보회에서 백암성총의 사상과 화엄의 꽃을 피운 역사를 조명하기 위하여 ‘진리의 꽃밭(화엄)에서 아름답게 살아가기’란 주제로 제45회 여름불교대학을 개설해 종범 스님과 역사적 사실을 논문으로 발표하신 이종수 교수님을 비롯해 9명의 법사진과 함께 회향했습니다. 2022년 문화관광체육부와 신안군의 지원으로 임자도에 ‘팔정도의 길’ 조성과 〈화엄경소초〉 전래에 대한 사업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사업 범위 안에 섬을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발우공양을 대대적으로 시연하여 발우공양에 담긴 깊은 가치를 모든 대중과 함께 나누는 장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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