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을 허망으로 해석
佛法과 현실
양분한 전개 아쉬워

구운몽도의 일부.
구운몽도의 일부.

조신 스님의 꿈속 세상은 참으로 괴로웠지요? 오늘은 괴로운 꿈 이야기와는 좀 다른 꿈 이야기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구운몽(九雲夢)〉 이야기입니다. 글자 그대로 ‘아홉 구름의 꿈’이라는 뜻이지요. 아홉 구름이란 이 소설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성진 스님과 팔선녀를 가리킵니다. 즉, 그 아홉 사람의 꿈이란 말이지요. 본디 스님과 선녀인데 계(戒)를 범하여 하계로 쫓겨나지요. 이 속세에서 좋은 인연을 엮어 가면서 잘 살다 깨어보니 한바탕의 꿈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조신 스님의 꿈이 괴롭디괴로운 꿈이었다면, 성진 스님의 꿈은 정말 너무도 즐겁고 달콤한 꿈입니다. 그 꿈을 통해 무언가 교훈을 주는 측면은 분명 있는데, 그 꿈 자체가 너무 황홀해서 ‘이런 정도의 꿈이라면 헛되다고 하더라도 한 번 꾸어봄직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까지 드는 이야기이지요. 저도 젊은 시절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좀 들었습니다. 그 꿈이라는 삶이 너무 즐거워서, 요즘 용어로 ‘힐링’이 되더라고요. 헛된 꿈이라는 교훈과 달콤한 꿈이 주는 위안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되는 측면이 있어요. 그래서 오늘은 작정하고 그 두 측면의 무게를 달아가면서 좀 자세히 살펴볼까 합니다.

너무 이야기를 앞질러 나가면 재미 없다고요? 알겠습니다. 우선 〈구운몽〉이라는 소설을 간단히 소개하고 그 큰 이야기 줄거리를 알아본 다음에 중요한 부분을 뜯어 보도록 하지요. 우선 〈구운몽〉이라는 소설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쓴 한글소설입니다. 예전에는 언문소설이라고 비하했지요?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로해드리기 위해서 쓴 소설이라네요. 원래 한문 소설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라는 학설도 있습니다만 그 이야기는 넘어가지요. 아무튼 김만중의 효심에서 나온 소설이며, 그 배경은 중국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김만중이 쓴 한글소설 .
김만중이 쓴 한글소설 〈구운몽〉.

성진 스님과 팔선녀의 미래생일까

중국에 형산(衡山)이라는 산, 보통 남악(南岳) 형산이라고 하는 산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 그 산에 육관대사라는 덕 높은 스님이 계셨다네요. 그리고 그 밑에 성진이라는 뛰어난 젊은 제자가 있었고요. 그리고 또 그 산에 위부인이라는 여신선(女神仙)이 또 있었고, 그 신선을 모시는 팔선녀가 있었답니다. 각각 형산의 다른 구역에 머물렀는데, 어떤 계기로 성진 스님과 팔선녀가 만나게 됩니다. 선남선녀가 만나게 되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 일어나지요. 서로 마음에 끌려 번뇌를 일으킵니다. 신통력 대단한 스승이 환히 들여다보고 꾸짖어 내칩니다. “그런 정신으로 수행해도 소용없다!” 마찬가지 이유로 팔선녀도 쫓겨나지요. 그리고 인연 따라 각각 다른 곳에 태어납니다.

성진 스님은 양소유라는 이름으로, 팔선녀는 각각 정경패·이소화·전채봉·계섬월·가춘운·적경홍·심요연·백능파라는 이름의 여인으로 태어납니다. 물론 양소유는 학식과 재주를 겸비한 절세미남으로, 팔선녀는 역시 뛰어난 재주와 품성을 지닌 절세미녀로요. 팔선녀의 신분은 정말 다양합니다. 공주도 있고, 기녀도 있고, 검객도 있고, 동정용의 딸도 있습니다. 이렇게 절세미남과 절세미녀들이 엮어가는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구운몽〉의 내용이지요. 물론 말씀드린 대로 “깨어보니 일장춘몽이었더라!”는 것이지만, 그들이 엮어가는 이야기는 그저 달달합니다. 전생의 연분인지 만나기만 하면 사랑에 빠지네요. 그것도 플라토닉 러브 같은 게 아니고, 거의 곧바로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즐기는 것으로 직행합니다. “그 즐거움을 어이 다 기록하겠는가!”라고 나옵니다요. 어려운 말이라 잘 모르겠다고요? 분명 내숭이라고 생각되기에 설명 않고 넘어갑니다.

거기다 그 절세미녀들이 질투심도 전혀 없어요. 한 낭군을 함께 모시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확고한 지향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두어 개 들어볼까요?

“우리 두 사람이 진실로 뜻하던 군자를 만나거든 서로 천거하여 함께 한 사람을 섬겨 백 년을 해로하자.”(적경홍과 계섬월의 이야기)

“첩은 소저를 따라 한 사람을 섬기고자 하오니, 원컨대 소저는 버리지 마십시오.”(가춘운이 정경패에게 하는 말)

두 예만 들었지만 여덟 여성이 모두 이렇습니다. 그리고 남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여자의 투기는 예부터 있는데 너는 어찌 이토록 인후(仁厚)하냐?”(태후가 자기 딸 이소화공주에게 하는 말)

일부다처를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관, 여성의 질투를 인정하면서도 질투없는 것을 찬탄하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남성 중심 사회의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일 뿐이라고요? 아니면 김만중이 지니고 있던 여성에 대한 꿈을 소설 속에 표현한 것일까요?

아무튼 이렇게 전부 천사띠인, 팔선녀가 환생한 여인들과 인연을 맺어가는 성진 스님의 환생 양소유…. 정말 신나는 인생살이를 이어갑니다. 과거에 급제하여 승상이라는 높은 지위에 오르고, 공주를 아내로 맞아 부마가 되고, 반란군을 토벌하는 혁혁한 공을 세우고……. 살맛 나는 인생이죠? 부럽다는 생각 안 드세요?

그렇게 여덟 여인의 지아비로 살던 양소유지만 늙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야기가 갑자기 삶의 덧없음을 탄식하는 쪽으로 흘러갑니다. 어느 가을날, 좋은 경치를 구경하던 양소유가 옥퉁소를 부는데, 그 소리가 참으로 슬픕니다. 부인들이 그 까닭을 묻자 그 이유를 설명하네요.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구운몽도 8폭 병풍(九雲夢圖八幅屛風), 지본채색 비단장황, 136.5 x 391cm, 국립민속박물관.
구운몽도 8폭 병풍(九雲夢圖八幅屛風), 지본채색 비단장황, 136.5 x 391cm, 국립민속박물관.

성진 스님이 꾼 한바탕 꿈일까?

“동쪽을 바라보니 진시황의 아방궁이 보이고, 서쪽을 바라보니……. 그 위대했던 영웅들 지금은 어디에 있단 말이요. 내 그대들과 한평생 즐겁게 지냈지만 이제 이별을 할 때가 온 것 같으니, 그 슬픈 마음이 퉁소 소리에 드러난 것이요.”

한문 문학에 관심이 있는 분은 금방 알아채실 것 같은데, 소동파 적벽부의 틀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느낌입니다. 적벽강 뱃놀이에서 슬프게 퉁소를 부는 손님이 있어 그 소리가 슬픈 까닭을 물으니 그 손님이 답하는 대목이죠. “동쪽으로 무창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하구를 바라보니…….”하면서 옛 영웅 조조의 자취를 이야기하고, 우리의 삶이 덧없음을 이야기합니다. 그 슬픈 마음을 담았기에 퉁소 소리가 슬픈 것이라고. 김만중이 소동파를 좋아했던 모양이지요.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유교·도교·불교를 비교하면서 자신은 불교에 인연이 있는 듯하니 그 길을 가리라고 말합니다.

“천하에 세 가지 도가 있으니 유도(儒道)·선도(仙道)·불도(彿道)라오. 유도는 윤리와 기강을 밝히고 사업을 귀하게 여겨 이름을 죽은 후에 전할 따름이요, 선도는 허망하니 족히 구할 것 아닌데, 오직 불도는 내 근래에 꿈을 꾸면 항상 부들방석 위에서 참선하는 것이 불가에 반드시 인연이 있는 것 같소. 내 장차 …… 남해를 건너 관음(觀音)께 뵈고, 의대(義臺)에 올라 문수보살(文殊菩薩)에 예불하여, 불생불멸의 도를 얻고자 하나, 다만 그대들과 함께 반평생을 서로 따르다가 장차 멀리 이별하려 하니 자연 비창한 마음이 퉁소 소리에 나타났던 것이오.”

정말 뜬금없이 불도의 인연을 이야기하며, 부인들과 이별하여 그 길을 걷겠다는 양소유 승상님! 그런데 천사띠 부인들은 슬퍼하기보다 찬탄을 하네요.

“상공이 번화한 중에 이 마음이 있으니 분명 하늘의 뜻입니다. 첩 등 여덟 사람이 마땅히 아침저녁으로 예불하여 상공을 기다릴 것이니, 상공은 밝은 스승을 얻어 큰 도를 깨달은 후에 첩 등을 가르치십시오.”

그래서 양소유가 기뻐하며 이제 작별을 하려 하는 장면에 거룩한 스님 한 분이 등장합니다. 양소유의 전신이었던 성진 스님의 스승 육관대사지요.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래 살 만했더냐?”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너무 압축하면 싱겁다 하실 테니 좀 자세히 말해보지요. 이 대목이 바로 〈구운몽〉 이야기의 핵심이니까요.

육관대사가 이러저러한 이야기 끝에 신통을 부리니 갑자기 광경이 휙 바뀝니다.

“말을 마치지 못하여 구름이 걷히며 노승과 두 부인 육 낭자는 간데없었다. 승상이 크게 놀라 자세히 보니 누대 궁궐은 간데없고, 몸은 홀로 작은 암자 가운데 앉아 있었다. 손으로 머리를 만지니 새로 깎은 흔적이 송송하고 백팔염주가 목에 걸려 있으니…….”

어리둥절해 있는 양소유-성진 스님에게 육관대사가 큰 소리로 묻지요.

“성진아, 인간 세상의 재미가 어떠하더냐?”

그제야 자신의 과거를 알고 참회하는 성진 스님에게 육관대사는 꿈이 꿈이 아닌 소식을 전해줍니다.

“네 흥을 띠어 갔다가 흥이 다하여 왔으니 내가 무슨 간섭하겠느냐? 또 네가 세상과 꿈을 다르게 아니, 네 꿈을 오히려 깨지 못하였구나.”

한평생을 산 것이 너의 뜻이었고, 내가 벌을 내린 것이 아니란 말이죠? 시침떼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이 업을 짓고, 한세상을 만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꿈이고 이것은 현실이라는 구별조차도 하나의 분별일 뿐이라는, 좀 심오한 이야기입니다. 장자의 호랑나비 꿈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내가 호랑나비 꿈을 꾼 것인가, 호랑나비가 장주 꿈을 꾸는 것인가?” 장자는 그런 분별조차 넘어서야 정말 큰 꿈을 깨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건 꿈이야, 이건 현실이야 하고 따지는 것은 꿈속에서 꿈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네요.

이런 깨달음의 마당에 팔선녀도 함께하네요.

“저희들이 위부인을 모시는 몸으로, 배운 것이 없기에 정욕을 금치 못해 중한 책망을 입었는데, 사부께서 구제하심을 입어 한 꿈을 깨었으니, 원컨대 제자되어 길이 같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팔선녀도 육관대사 밑에서 불법을 배웁니다. 〈구운몽〉은 이렇게 불법 만세로 끝나지요.

“한마음으로 불법에 나아가니 극락세계의 만만세 무궁한 즐거움이었다.”

1996년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한 창극 '구운몽'의 한 장면.
1996년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한 창극 '구운몽'의 한 장면.

空은 허망 아닌 연기의 실상

이렇게 거룩한 불법 찬탄으로 마무리되기에 ‘〈구운몽〉은 〈금강경〉의 공(空) 사상을 바탕으로 썼다, 불교의 무상(無常) 사상을 꿈 이야기로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는 등의 연구 결과물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측면들이 너무 많지요. 약간 제 선입견이 들어간 요약이겠지만, 지금까지 나간 이 글 속에서도 그런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세속에서 온갖 부귀영화와 쾌락을 즐기는 양소유의 삶 속에서는 전혀 불교적인 가르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달콤하고 즐거운 삶일 뿐이에요. 조신 스님의 삶의 괴로움을 절절히 느끼게 하는 꿈과는 다르지요. 지난 글에서 제가 말씀드렸었지요? ‘혹 괴로운 꿈 가운데 돌미륵 같은 것 캐신 적은 없으신가 하고요. 괴로움을 바로 보는 가운데 발심이 있고, 깨달음이 있는 것일 텐데 양소유의 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삶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 나가는 과정이 전혀 없어요. 그리고 뜬금없이 무상을 느끼고 불교 쪽으로 휙 방향을 틀어 버립니다. 전혀 이질적인 것을 이어 붙였다고 생각할 수밖에요. 이런 것을 불교적이라고 한다면 참으로 불교가 너무 싸구려가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런 꿈 이야기를 공사상과 연결시키는 것도 너무나 피상적인 이해입니다. ‘공’이란 것은 허망하다는 의미가 아니지요. 모든 법의 참된 모습을 공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연기(緣起)’의 실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꿈이로다!”하는 것과는 십만팔천리 거리가 있어요. 그리고 불교에서 ‘무상-덧없음’이라는 것도 감성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 모든 것은 덧없구나. 다 부질없어!”하는 식으로 이해하면 정말 큰 일이지요. 그래서 그 감상에 빠져 세상일을 하찮게 본다면, 그 결과가 무엇일까요? 정말 힘빠진 불자의 모습이 나와버리지요.

공이나 무상이나 모두 세상의 참모습입니다. 그것을 올바로 본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에 빠져 고통의 윤회를 이어 나가던 삶에서 벗어나 불세계를 건설하는 힘찬 부사의업(不思議業)을 지어나가는 바탕입니다. 그런데 〈구운몽〉 식으로 불교를 이해하면 세상살이는 덧없는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덧없는 꿈 이야기가 참으로 우리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맛깔나는 삶으로, 부럽디부러운 삶으로 묘사되지요. 그 꿈속에 있는 동안은 불법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니 불법을 생각하면 정말 달콤한 꿈에 초치는 것이지요. 그렇게 나가다가 갑자기 휙 방향 전환해서 ‘불법 만만세’를 외치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가 됩니다.

욕망이 중심인 이 세상에 몰입되어 허우적거리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삶이지요. 그런 미망에서 깨어나 참된 삶을 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 삶은 하찮은 꿈이야!”하고 팽개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삶이 깨달음의 바탕이며, 또 그 속에 한 걸음 한 걸음 지혜와 자비의 빛을 드러내는 불퇴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지요. 〈구운몽〉이 덧없는 삶에 매달리는 것은 훌쩍 뛰어넘어 불법의 위대함을 말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불교적이지요. 그것도 재미있게 꾸며냈다는 점에서는 찬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 가르침과 현실의 삶을 두 쪽으로 나눠버린 혐의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 〈구운몽〉을 읽으면서 불교를 배우기보다 그 달콤한 꿈에만 취할 위험도 좀 있어요. 그래선 안 되지요. 이런 자리를 빌어 슬그머니 전에 지었던 게송 하나 읊어 볼까요?

“부질없는 짓 하염없이 하는 것이 본디 우리 집안의 가풍이런가?”

‘덧없음’이라는 실상을 바로 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불퇴전의 삶을 일구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으로 제 분수 넘은 짓을 이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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