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으로 통하는 찰나를 포착한
한 편의 선화(禪畵) 같은 작품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1908~2004)의 삶과 그의 사진작품을 대하면서 나는 선사(禪師)의 삶을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이는 그가 삶의 어느 지점에선가 불자가 된 까닭도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전부터 그의 삶과 작품은 불교적이었고 선이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눈에 보이는 외형적 삶과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삶을 다 아우른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본래 마음자리를 그려내고 대중에게 알려주기 위해 선사들은 흔히 상징과 함축으로 가득한 선시와 선문답을 사용했다. 나 역시 젊은 시절 다양한 선시와 선문답을 보면서 비록 머리로 이해할 수는 없어도 무언가 나의 남루한 삶 저 너머에 있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곳을 흘낏 보여주는 것만 같아 가슴 뛰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선시와 선문답 역시 언어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이런 간극, 즉 일상세계와 초월세계 사이에 또는 언어의 세계와 언어를 넘어선 세계 사이에 그림과 사진을 비롯한 시각예술이 등장한다. 한 장의 그림과 한 컷의 사진은 보는 이를 시공을 초월한 그곳으로 단숨에 이동시켜주는 힘이 있다. 바로 예술에 내재된 힘이다. 예술은 이 두 세계 사이에서 중간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할 수 있다.

1970년 미국 영화 Southern Exposures 촬영장에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1970년 미국 영화 Southern Exposures 촬영장에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한 발짝 떨어져서 무심하게

브레송은 ‘숨을 죽이고 모든 것이 무상한 찰나의 현실로 수렴되는 순간’ 셔터를 누른다고 말한다. 그런 사진을 찍으려면 무심하게 대상에서 거리를 두고 그 무엇도 증명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텅 빈 마음으로 집중력 있게 대상에 몰입해 들어갈 때 카메라 렌즈의 사각틀은 그 무엇도 다 허용해준다. 그때 작가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다.”

자신은 ‘사진가(Photographer)’가 아니라 ‘그저 삶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라고 말한 브레송은 카메라를 ‘직관과 즉흥성을 허용하는 스케치북’이라 말한다. 스케치(Drawing)는 브레송이 처음으로 부모가 아닌 본인의 의지에 따라 배웠던 첫사랑과 같은 것이었고, 또 생의 후반에 잠시 카메라를 내려놨다 다시 몰두한 마지막 사랑이기도 하다. 즉 스케치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찰나의 삶을 카메라로 포획한 것이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찰나에 작가는 대상에 대해 질문과 대답을 동시에 하며 ‘찰나의 장인’인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질문과 대답을 동시에 하려면 작가는 대상 속으로 들어가고 그 대상에 관여해야 한다. 그것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 브레송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그리하려면 집중·절제된 마음·민감성·기하학적 감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작품 '생 자라르 역 뒤에서'.
작품 '생 자라르 역 뒤에서'.

내·외면의 조화, 내용과 형식의 조화

하나의 사진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그 내용에 대해 브레송은 내면세계와 외면세계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 두 세계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결과 둘이 하나로 모아지고 바로 그 하나의 세계와 소통해야 작가가 원하는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내용은 형식에서 분리될 수 없다. 형식이란 면·선·가치의 상호작용을 엄격하게 구조화하는 것이다. 바로 이 구조화를 통해 개념과 감정은 구체화되고 소통 가능해진다. 그렇게 소통 가능한 시각적 구조화를 찰나에 이루기 위해 브레송은 늘 다각도로 노력했고, 그를 통해 사진가로서의 본능적 감각을 키웠다.

찰나의 순간과 마음의 눈

브레송은 삶을 대하는 마음이 불교를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었다고 말하곤 했다. 브레송의 두 번째 아내이며 사진작가인 마틴 프랑크는 달라이라마에게 남편을 ‘격동 속의 불자(Buddhist in turbulence)’라고 말했다. 이는 쉼 없이 자신이 사랑한 삶의 찰나를 포착하기 위해 분주히 세계 곳곳을 다녔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피사체를 두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부지런히 다각도로 다가갔던 모습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1946년 브레송과 함께 뉴올리언스에서 작업을 했던 미국 소설가 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 ‘티파니에서 아침을’·‘인 콜드 블러드’ 등)는 브레송의 모습을 ‘격앙한 잠자리처럼 거리를 춤추고 다녔다.’고 묘사했다. 세 대의 라이카 카메라를 목에 걸고, 한 대는 눈에 바짝 붙이고 찰칵찰칵 강렬한 기쁨으로 셔터를 눌러대는 모습이 ‘카메라는 신체의 일부가 된 듯했고 몰입의 정도는 종교적’이었다고 카포티는 말한다. 이렇게 재빠르게 발을 움직이며 거리에서 사진을 찍는 브레송의 모습은 1962년 제작된 그의 다큐멘터리에 담기기도 했다.

출간서의 제목 역시 매우 불교적이다. 그의 작품집 제목은 〈찰나의 순간(Images à la Sauvette)〉인데 표지 디자인은 친구인 화가 마티스가 그려주었다. 마티스는 브레송이 케임브리지대학 막달렌대학에서 미술과 문학을 공부한 후 파리로 이주해 보헤미안 예술가들과 떠들썩한 파티를 하며 살던 시절 사귄 친구 중 한 명으로, 마티스의 초상도 1944년에 촬영한 바 있다. 작품집의 영문판 제목은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으로 번역되었다. 자신의 사진철학과 사진세계를 서술하고 동료 사진가들의 모습을 담은 브레송의 저서 역시 제목이 〈마음의 눈(The Mind’s Eye)〉이다. 이 책에서 그는 불교를 ‘종교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다. 다만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 정신을 다스리는 수단이고, 자비를 통해 그런 평정심을 남에게 제공하는 수단’이라고 정의했다.

작품 '간디의 장례식'.
작품 '간디의 장례식'.

선불교·티베트불교에
관심 많았던 행동주의자

선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 작가는 또한 티베트불교와도 인연이 많았다. 자신의 정치성향을 늘 분명히 밝히고 살았고 또 행동으로 옮겼던 작가는 티베트 관련 의식을 고양시키는 운동에도 참여했고, 달라이라마의 사진도 촬영했다.

옳다고 믿는 것을 서슴없이 표현하고 행동했던 브레송은 그에 앞선 스페인 내전에서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다큐 필름을 세 편이나 제작했고, 2차대전 때는 병사로 자진 입대했다가 독일군에게 잡혀 전쟁포로로 3년을 갇혀 지내기도 했다. 고국에서는 그가 전사했다고 생각했지만 세 번의 탈출 시도 끝에 마침내 성공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브레송 회고전을 준비하고 있던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을 깜짝 놀래키기도 했다.

작품 '마지막 왕조 황실의 내시'. 1948년 황궁을 나오는 마지막 내시의 모습.
작품 '마지막 왕조 황실의 내시'. 1948년 황궁을 나오는 마지막 내시의 모습.

인간과 삶을 매일 새로운 눈으로 봐야

“단 하나 중요한 것은 인간과 그들의 삶, 삶의 풍요로움이다. 나는 그저 민감한 마음으로 그에 임하면 된다. 내게 사진은 삶의 방식이다. 나의 머리와 가슴과 눈을 지금 보이는 대상에 함께 두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내재된 생명과 하나가 되는 것이나 사진이 삶의 방식이라 말하는 것은 ‘선은 종교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선불교와 동일 선상에 있다.

찰나를 제대로 포착하려면 살아있는 생명인 나(주체)가 대상(객체)과 생명으로서 교류해야만 한다. “지금 내가 보는 것 앞에서 나는 살아있어야 하고, 현실과 씨름하며, 습관과 일상을 버려야 한다. 언제나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오가며 볼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 일종의 춤처럼 나는 즉각적·자동적·직관적 스케치를 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대상을 ‘작업하는’ 과시적 보도사진은 사진이 아니라고 그는 공공연히 말했다.

이런 브레송의 철학은 사찰과 자연을 관조적인 시각으로 촬영했던 관조 스님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은 나와 상대를 동시에 정화시킨다. 사진을 찍으면서 나 자신이 정화되고, 사진을 보면서 사람들이 정화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던 관조 스님 역시 브레송처럼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같은 곳을 여러 번 가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봄·여름·가을·겨울 계절마다 가고, 아침·낮·저녁에 각기 다른 햇빛·습도·온도에서 찍을 정도로 세심했다고 한다.

작품 '부처님 발치에서 기도하는 사람'.
작품 '부처님 발치에서 기도하는 사람'.

직조업 후계자에서 미술로 전환

1908년 파리 근교의 마을에서 직조업을 하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서 가업을 이으리라 기대를 받았던 브레송은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세 번이나 낙방했고, 이후 부모도 그가 하는 일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미술을 공부하며 스케치와 그림에 몰두했지만, 사진에 매료된 이유는 그것이 매우 ‘빨리할 수 있는 스케치’였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을 놓치면 영원히 사라지게 될 이미지를 잡기 위해서 말이다. 보도사진으로도 이름을 알린 그는 현대를 형성한 주요 사건과 함께 하며 세계적 작품을 많이 남겼다. 간디 사진을 촬영하러 갔던 다음날 간디가 저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는 간디 장례식까지 촬영하게 되었다. 수많은 인도 국민이 간디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하려 모여들어 발디딜 틈이 없었다. 사진은 간디가 거주하던 비를라하우스와 줌나강변 화장터로 가는 길에 모인 사람들을 보여준다. 조금이라도 잘 보려고 탑의 꼭대기에 위태롭게 서있는 사람도 보인다. 1948년의 중국 내란, 1949년 상해가 공산당의 손에 넘어가는 사건도 취재했다. 1948년 궁을 나오는 마지막 내시 사진도 그 중 하나다. 오른손에 간단한 봇짐을 들고 걸어나오는 늙은 내시는 세월을 초월한듯한 익살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고 그 뒤로 내시를 등지고 걸어가는 사람의 실루엣이 긴 그림자와 함께 훌륭한 기하학적 구조를 이룬 사진이다. 1954년에는 소련의 내부를 7년 만에 촬영 허가받은 최초의 서양 사진가로서 다양한 작품을 촬영해 서구에 소개했다. 브레송의 활동 시기는 아직 텔레비전이 등장하기 전으로, 사람들은 〈라이프(Life)〉·〈하퍼스 버자(Harper’s Bazaar)〉 등의 잡지에 나온 사진을 통해 세상을 접할 수 있었다. 그의 사진은 이들 잡지 표지를 장식하곤 했다.

작품 '무프타르 거리'.
작품 '무프타르 거리'.

거리 사진의 대가

하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유명한 사건이나 인물을 촬영한 보도사진이 아니라 그가 카메라에 담아낸 보통사람들의 사진이다. ‘사진은 삶’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가 눈에 뜨이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플래시를 절대 사용하지 않았고, 은빛 라이카 카메라가 햇빛에 반짝이지 않도록 검은 테이프로 감아 가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카메라를 감추고,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가 완전한 각도와 구도로 나올 때까지 무한한 인내심으로 기다리곤 했다.

소위 ‘거리 사진(Street photography)’ 또는 ‘염탐꾼 사진(Fly-on-the wall photography)’으로 알려진 그의 대표적 사진들을 찍기 위해선 자신의 얼굴이 대중에게 알려져선 안 되었다. 그래서 심지어 1975년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을 때조차도 종이로 얼굴을 가리고 받았을 정도였다.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을 애정의 눈으로 포착한 사진의 대표적 예로 ‘무프타르 거리(Rue Mouffetard; 1954)’를 들 수 있다. 무프타르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에 속하며 고대에는 로마로 통하는 거리였다. 식당·바·치즈 가게·빵집·과일 가게 등이 골목 사이로 늘어선 이 거리는 예술가들이 사랑한 거리였고 브레송도 인근에 살았다고 한다. 이 동네에 잠시 살았던 헤밍웨이는 이 거리를 ‘비좁지만 늘 사람들로 붐비는 매력적인 시장 골목’이라고 묘사했다. 밝은 분위기의 사진은 커다란 와인병을 양손에 들고 자랑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띤 채 길모퉁이를 도는 소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부모의 심부름을 제대로 했다는 소년의 뿌듯한 기분이 당당하게 어깨를 편 모습에서 감지된다. 아마도 아버지의 막걸리 심부름을 하던 우리나라 옛 소년들의 모습이기도 하리라. 왼쪽 뒤로는 그런 소년의 모습을 감탄하듯 미소를 띠고 바라보는 두 소녀의 모습이 있어 소년의 자랑스러움을 완성하고 있다.

또 다른 작품 ‘생 자라르 역 뒤에서(Behind the Gare Saint-Lazare; Place de l'Europe, 1932)’를 보자. 철도역 공사를 하는데 비가 와서 물이 고인 곳을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순간, 그의 뛰는 모습이 아래 고인 물에 비치고 배경에 잡힌 포스터에는 유사한 포즈를 취한 댄서가 그와 쌍벽을 이루고 있다. 이 장면을 찍는 상황에 대해 브레송은 말한다. “공사장 주변으로 판자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판자 사이 좁은 공간에 카메라 렌즈를 대고 기다렸다. 간격이 좁아서 렌즈 한편이 가려져서 사진 왼쪽이 잘린 듯 보인다.” 보통 공사장은 사진으로 담기에 이상적인 장소는 아니다. 그런 평범하다 못해 열악하기까지 한 곳에서 브레송은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진 최고의 순간을 기다린 것이다. 빗물이 고인 진흙탕을 개의치 않고 즐겁게 뛰어넘는 한 남자를 그의 발이 땅에 닿기 전에 순간적으로 캐치한 순발력과 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어떤 환경에서도 즐거움은 찾을 수 있다는 삶의 긍정성이 보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불교 사진으로는 스리랑카의 갈 비하라(Gal Vihara)에 모셔진 거대한 와불을 촬영한 것이 있다. ‘부처님 발치에서 기도하는 사람(Man Praying at the Foot of Buddha)’이라는 제목의 본 사진은 거대한 와불의 발치만을 클로즈업한 채 그 옆에서 스리랑카 전통복장을 입고 경건하게 기도하는 젊은 남자를 담고 있다. 브레송의 작품은 아니지만 와불의 전경을 담은 다른 사진과 비교하면 브레송이 얼마나 일반사진과 다른 시각을 취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자연 풍경이지만 거의 추상화처럼 보이는 사진도 있다. ‘브리(Brie)’는 브레송이 얼마나 단순하게 선적인 시선으로 구도를 잡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브리 치즈로도 유명한 브리에서 1968년 촬영한 들판과 가로수길을 보여주는데 이곳은 이렇게 평온하지만 당시 파리는 ‘68운동’으로 혁명의 기운이 시민 사이에 만연했다고 한다.

작품 '브리(Brie)'.
작품 '브리(Brie)'.

마음의 눈을 뜨고 보라

“사진을 찍을 때 한쪽 눈을 감는 이유는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이며, 찰나에 승부를 거는 이유는 사진의 발견이 곧 나의 발견이기 때문”이라고 브레송은 말했다. 선화처럼 명상을 유도하는 그의 사진작품은 우리에게 이원적 인식을 넘어서서 깊이 바라보라고 초대하고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