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호, 낙화 눈보라와 무화과나무 가지의 새순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낙화 눈보라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 초입에 큰 벚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여러 날 밤낮에 벚꽃을 활짝 피우고 있더니 오늘 낮에는 그 꽃잎들을 바람결에 날려 보내고 있었다. 작고, 얇고, 연하게 분홍의 색감이 있고, 또 어떤 것은 흰빛인 잎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첫 눈보라 같았다. 전혀 차갑지는 않고 다만 설렘만 있는 첫 눈보라 같았다. 낙화이되 이런 장관이 또 있을까 싶었다. 저 낙화의 장관이 봄날의 표정이요 봄날의 문양이 아닐까 싶었다. 떠나갈 적에 저와 같은 뒷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닷새 엿새 밤낮에 걸쳐 벚나무는 꽃을 모두 떠나보낼 것이다.

어머니를 위한 노래

알고 지내는 시인이 있어서 그가 내게 신작 가곡의 가사 짓는 일을 여러 번 권유해왔는데, 올해는 그의 권유를 받아들여 미숙하지만 그 일을 해보기로 했다. 가사를 짓는 일은 해본 적이 없어서 출근과 퇴근할 때마다 승용차에서 가곡들을 애써 들었다.

오가며 들은 가곡들의 가사 가운데 ‘강 건너 봄이 오듯’의 가사가 마음에 들어 여러 날 흥얼거렸다. 새봄의 도래를 노래한 이 곡의 가사 일부는 이러했다. “앞강에 살얼음은 언제나 풀릴거나 짐 실은 배가 저만큼 새벽안개 헤쳐 왔네 연분홍 꽃다발 한 아름 안고서 물 건너 우련한 빛을 우련한 빛을 강마을에 내리누나 (중략) 내 마음 어둔 골에 나의 봄 풀어놓아 화사한 그리움 말없이 그리움 말없이 말없이 흐르는구나” 예전 가곡의 가사가 대체로 단형의 구조였다면 이 가곡의 가사는 그보다는 좀 더 메시지와 비유적인 표현을 담고 있었는데, 작곡가가 아주 유려하게 음을 입혀 놓은 듯했다.

나는 내 어머니를 위한 가사를 하나 쓰고 싶었고, 궁리 끝에 처음으로 가사를 완성했다. 제목은 ‘Mother’라고 붙였다. “어머니 어머니 이제 내 옷을 짓지 말아요 꽃을 봄바람을 꿈을 내일을 화려해 가을처럼 화려해요 어머니가 지은 옷은 보아요 이 많고 많은 옷을 내 입을 수 있을까요 어느 계절에 이 옷의 햇살을 이 옷의 따뜻함을 이 옷에 봉우리 강물 바다를 담을 수 있어요 어머니 어머니 이제 내 옷을 짓지 말아요” 이 가사에서 ‘옷’은 상징적인 뜻이 담겨 있다. 항용 우리의 어머니가 자녀에게 베푸는 그 큰 사랑의 구체적인 내용을 ‘옷’이라는 것에 담았다. 내가 입을 옷을 평생 지어온 내 어머니를 위한 작은 보답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작곡가가 이 가사에 또 어떤 음을 입힐지 자못 궁금하고, 그 곡조를 들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노부부의 식당

가끔 들르는 동네 밥집이 한 곳 있다. 이 밥집은 이른 아침에 문을 연다. 마당 한쪽에는 꽃을 심어 화단을 만들었다. 얼마 전에 갔더니 유채꽃이 노랗게 피어 있었다. 부추나 쪽파 같은 것을 심어도 놓았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예닐곱 개의 식탁이 놓여 있다. 작은 밥집이다.

손님이 많이 붐비지도 않는다. 노부부가 손님을 맞이한다. 두 분의 음성은 나직하고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둘 사이에는 주고받는 말이 별로 없다. 구태여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식당이다. 두 분 모두 연세가 일흔 살은 족히 넘기신 듯하다. 나는 들를 때마다 청국장을 시켜 먹는다. 청국장을 시키면 할머니가 반찬들을 담아내고, 그것을 할아버지가 챙겨 가져다준다. 할머니가 청국장을 보글보글 끓여 놓으면 그것을 또 할아버지가 옮겨 손님 앞에 내려놓는다.

이 식당 청국장은 고향집에서 먹던 청국장 맛이 난다. 어제도 식당에 가서 청국장을 시켰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반찬들을 내 앞에 내려놓을 때 그릇을 쥐고 든 손이 많이 떨리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밥을 다 먹고 나올 때 카운터에 올려둔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사진 속에서 할아버지가 아이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손주냐고 여쭸더니 할아버지는 손주 얘기를 한참 했다. 그 얘길 다 듣는 동안 막 들어온 손님이 주문한 청국장이 맛있게 다 끓었다. 청국장 냄새가 내 몸에 한 번 더 배어들었다.

삼처전심(三處傳心)

부처님께서는 세 곳에서 가섭존자에게 마음을 전하셨다. 첫 번째는 급고독원에서 설법을 하실 때 가섭존자가 뒤늦게 누더기처럼 해진 옷을 입고 왔는데, 그때 부처님께서 앉으신 자리의 반을 나눠 가섭존자를 앉게 했다. 두 번째는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존자가 그 뜻을 알아 미소를 지었다. 세 번째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을 때 가섭존자가 먼 곳에서 이르러 몹시 슬프게 통곡을 하자 부처님께서 발을 관 밖으로 내놓으셨다. 이 세 곳에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을 전하셨다. 윽박지르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 요즘에 다시 생각해보니 이 삼처전심은 참으로 아름다운 통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듣기 좋은 말만 해요”

육지에 사는 문우들이 제주에 내려와서 사흘을 함께 보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한 명이 “우리, 듣기 좋은 말만 해요.”라고 제안을 했다. 썩 괜찮은 제안이라고 여겨서 따르기로 했다. ‘듣기 좋은 말’은 환심을 사려는 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비방하는 말이나 때에 맞지 않은 말, 사실이 아닌 말, 부드러운 말씨를 갖추지 못해서 거친 말, 무의미한 말, 성난 마음으로 하는 말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니까 대체로는 선의를 갖고 하는 말이 ‘듣기 좋은 말’일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제안을 따르려고 하니 말을 꺼낼 때에 주저하는 것이 생겼다. 그리고 말을 가려서 꺼내게 되었다. 평소에 내가 얼마나 무턱대고 말을 입 바깥으로 꺼내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듣기 좋은 말’을 서로 주고받으니 친교가 훨씬 곱고 매끄러운 느낌이었고, 후의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사흘을 단꿈처럼 함께 보냈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은 이 사흘 동안에 익히고 했던 일을 앞으로 오랫동안 되풀이하는 것일 테다.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무화과나무 가지의 새순

나목 상태였던 나무들의 가지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무화과나무에도 새순이 움트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어떤 활동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일은 썩 매력적이다. 게다가 생명의 기운이 다시 성하기를 바랄 적에는 기다림이 더욱 간절해진다.

요란하지 않고 조용하며 찬찬하게 봄비가 두어 차례 지나가더니 그저께 아침에 무화과나무 가지에 새순이 뾰조록 올라오는 것을 마침내 보았다. 나는 참았던 탄성을 길게 기쁘게 내뱉었다. 마치 기다리던 시외버스가 정류장에 막 도착하기라도 했을 때처럼. 저 새순에서 무화과나무는 앞으로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잎을 펼치고, 그늘을 넓게 드리우고, 열매를 맺고, 열매에 달콤한 맛을 부드럽게 채울 것이다.

그러는 동안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저 밭의 주인인 할머니는 풀을 뽑고, 또 풀을 뽑고, 풀을 뽑다 그늘에 아무렇게나 앉아 다리를 뻗어 잠시 쉬고, 또 풀을 뽑고, 그러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열매가 익으면 아침 식전에 무화과를 따 광주리에 담고, 그 광주리를 이고 시장에 가서 팔 것이다. 난전에 앉아 무화과를 쌓아놓고 사람들의 손을 잡아끌며 잘 익은 무화과를 팔 것이다. 물론 나는 매일매일 무화과나무가 있는 밭을 바라보며 생명의 싱싱한 기운을 얻을 것이다. 이제 저 새순으로부터 무화과나무의 대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삶과 죽음이 물과 얼음 같으니

큰스님의 사십구재가 있어 절에 갔다. 큰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금강경〉·〈지장경〉·〈아미타경〉을 하루 세 번 독송하고 아미타불 염불을 놓지 않고 계속하셨던 분이다. 사부대중은 큰스님을 그리워하며 함께 기도를 올렸다.

“돌고 도는 생사윤회 자기 업을 따르오니 오고 감을 슬퍼 말고 환희로써 발심하여 무명업장 밝히시면 무거운 짐 모두 벗고 삼악도를 뛰어넘어 극락세계 가오리다. 이 세상에 처음 올 때 영가님은 누구셨고 사바 일생 마치시고 가시는 이 누구신가. 물이 얼어 얼음 되고 얼음 녹아 물이 되듯 이 세상의 삶과 죽음 물과 얼음 같으오니 육친으로 맺은 정을 가벼웁게 거두시고 청정해진 업식으로 극락왕생 하옵소서.”

벚꽃이 피어 세상이 보다 환하고, 새의 고운 울음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이쪽으로 건너오는 날이었다. 절에는 주련이 걸려 있었는데, 주련에는 “내 삶에서 절정의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와 “내 생애에서 가장 귀중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 주련을 내 마음의 전각에도 걸었다.

돌에 물을 뿌려요

내 사는 집 주변 곳곳에는 돌담이 있다. 곳곳에 돌을 쌓아 올릴 만큼 돌이 많기도 하다. 길에서 집까지 나 있는 좁은 골목을 ‘올레’라고 하는데 대개 이 올레는 양쪽에 돌담을 쌓아놓았다. 돌담은 보기에는 아늑한 운치가 있지만 쌓기 어렵고 또 비바람에 무너지기 일쑤여서 간수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집안일 가운데 하나는 돌담을 쌓는 일이기도 하다.

새로 쌓은 돌담 아래에 꽃을 심고 조리개로 물을 주고 있는데 한 사람이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막 심은 꽃이나 묘목에 물을 줄 때는 해뜨기 전이나 해진 후에 흠뻑 주고, 새로 쌓은 돌담 돌에도 물을 뿌리세요.” 물을 줄 때 물을 주는 시늉만 하듯 땅의 겉만 적시지 말고, 땅 속 뿌리까지 젖도록 충분히 주고, 그럴 때 돌담 돌에 함께 물을 뿌리면 돌에 이끼가 올라와 훨씬 인공의 느낌이 덜하게 돼 자연스럽다는 얘기였다. 그는 내 작은 밭에 막 심어놓은 어린 감귤나무에게 다가가더니 감귤나무의 꽃망울을 하나하나 따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꽃망울을 따줘야 어린 묘목이 빨리 성장하게 된다고도 했다. 시골로 들어와 산 지 세 해째가 되었지만, 역시나 내 농사일이 크게 부실함을 또 한 번 알게 되었다.

문태준
시인.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맨발〉·〈가재미〉·〈그늘의 발달〉·〈먼 곳〉·〈우리들의 마지막 얼굴〉·〈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노작문학상·애지문학상·서정시학작품상·목월문학상·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BBS 제주불교방송 총괄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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