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교단과 계율〉을 쓴 사토 미츠오(佐藤 密雄)는 다이쇼(大正)대학 교수와 학장을 지냈다. 저서로 〈원시불교교단의 연구〉·〈대승경〉·〈율장〉 등이 있다. 이 책을 번역한 김호성 선생은 “평생 초기불교와 계율에 대해 연구한 필자가 방대한 율장의 문헌을 정리하여 불교교단의 성립과 계율 그리고 승가의 구성원으로서 지녀야 할 여러 가지 생활규범에 대하여 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이 책은 비구·비구니 계율과 실제 교단의 운영과 규범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한국불교의 비구·비구니계는 〈사분율〉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기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는 중국의 박산향로에서 그 모태를 찾을 수 있지만, 백제의 독창성과 뛰어난 조형성을 담아낸 백제 금속공예기술의 최고 걸작이라 말할 수 있다.이 향로는 백제가 패망하던 서기 660년 6월 사비(현 부여) 능산리 절터[陵寺址]에 묻혔다가 1993년 12월 발견됐다. 발굴 당시 향로는 진흙 속에 묻혀 있었던 덕분에 녹이 슨 흔적도 없었고, 부식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청동에 도금을 했을 당시의 찬란한 황금빛은 퇴색했고, 조각의 섬세함은 무뎌져 있었다. 그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살려 백
‘철의 나라’로 불렸던 금관가야는 기름진 평야에서 생산한 쌀과 질 좋은 철을 기반으로 성장해 초기 가야연맹을 주도했다. 금관가야의 중심지는 현재의 김해시다. 시가지를 관통하는 해반천 일대에서 금관가야와 관련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현대에 들어 김해시는 우리나라의 산업화 흐름에 따라 점차 공업도시로 변모했다. 특히 1980년대에 대규모 공단이 들어서면서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많아졌고, 결혼 등의 이유로 정착하는 인구도 늘었다. 김해시는 이주민들이 정착해 원주민과 잘 어우러지도록 다양한 정책을 마련, 지원했다.김해는 가야문화와 다문
장안사(長安寺)는 강원도 회양군 장양면 장연리(현 강원도 금강군 내 금강리)의 장경봉(長慶峯) 아래 위치했던 고찰이다. 551년 고구려 혜 량(惠亮) 법사가 신라에 귀화하면서 왕명으로 창건했고, 773년에 진표(眞表) 율사가 중수했다.970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982년에 회정(懷正) 선사 등이 중건했 다. 1343년에는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 기씨(奇氏)가 사찰을 중 창했다.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영건(營建)활동이 이어졌으며, 1728년에 묘현(玅玄) 선사가 사찰을 중창하면서 대가람의 면모를 갖췄다. 김 홍도(金
이인 2019년 作색색, 어떤 것_99x70cm_종이에 아크릴릭
불교의 나라 미얀마에서 일어난 군부 쿠데타와 뒤이은 민중시위는 정치에 대한 불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미얀마 만달레이 인근의 식당 앞에 걸린 아웅 산 수치와 그녀의 아버지 아웅 산 장군의 사진.불교의 나라 미얀마가 아비지옥이 되어가고 있다. 미얀마의 국부 아웅 산(Aung San, 1915~1947)의 딸인 아웅 산 수치가 이끄는 국민민주연맹(NLD)이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전체 의석의 62.4%를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자 지난 2월 1일 미얀마군 최고사령관인 민 아웅 흘라잉(Min Aung Hlaing) 대장이 쿠데타를
어둠 묻은 새벽빛이 조금씩 물러서고 어스름한 빛이 버스 위로 흘러내리는, 새벽인 듯 아침인 듯 오전 6시 출발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내 손을 끌어당겼다.“남자 그거 별거 아닌기라.”아마도 언니처럼 연애하면서 결혼을 당기기라도 할 것 같았는지 어머니는 남자의 값을 깎아 내리려는 듯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나에게서 남자라는 인물의 정을 완전히 떼어버리려는 마음 그것이었다. 오직 무엇인가를 이루고 사회적으로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라는 당부의 시작을 나에게 풀어 놓는 일이었을 것이다.“연애 같은 거 하지 말고
보현사는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妙香山)에 위치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묘향산에 360여 개의 암자가 있었고, 보현사(普賢寺)가 묘향산의 대표 사찰이었다고 적고 있다.의상대사가 784년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묘향사보현사사적기〉에 따르면 1042년 탐밀(探密) 대사와 굉확(宏廓) 대사가 창건했다. 크고 작은 보수와 함께 여섯 차례 중창이 있었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현재 북한 불교의 총본산 역할을 하고 있다.
대학생활의 묘미는 기숙사 생활이며, 기숙사 생활에서 룸메이트는 꽤 중요하다. 이 때문에 새 학기에는 늘 좋은 사람과 룸메이트가 되길 기대했다. 2학년 2학기에 룸메이트로 A가 배정됐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주변사람에게 A가 어떤 사람인지 물었는데, “걔 엄청 이기적인 애라 같이 방 쓰면 힘들 거야.”라는 말을 듣고 걱정만 쌓였다.그러나 막상 같이 생활해 본 A는 말수가 적은 성실하고 얌전한 친구였다. 특이하게도 수정과를 좋아해서 자주 마셨는데, 방에서도 은은한 계피향이 났다. 나는 평소 수정과를 좋아하지 않았고, 방에서 나는 계피향은
100년 전, 일제는 개항 후 군산을 전라도의 곡창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수탈하는 거점 지역으로 삼고 항만·철도 등을 건설했다. 물자와 자금이 유통되자 일본인 인구도 늘었고, 이들을 위한 주택·은행 등 사회기반 시설들이 세워졌다. 광복 후에는 타 지역에 비해 개발이 느리고 더뎠는데 이로 인해 당시에 세워진 대부분의 건축물이 보존됐다.군산시는 2009년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은 건축물들을 보존·복원해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근대문화거리’를 조성했다. 아울러 ‘군산 시간여행’이라는 테마를 활용해 △탁류길 △아리랑길 △비단강길 등 스탬
노동을 ‘대가를 받고 제공하는 정신적·육체적 활동’이라고 좁은 의미로 개념 정의를 하면 농민은 노동자가 아니다. 이렇게 정의하면 농민 뿐 만 아니라 상인·수공업자도 노동자가 아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노비나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을 노동자로 간주했지만, 농민은 자기 소유의 토지에서 자기만의 사업을 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자’라는 개념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농민이 농촌에서 쫓겨 도시로 와서 임금을 받고 일하면서 시작됐다. 그때부터 노동력을 사고파는 노동시장이 형성되었다.출가와 재가의 노동부처님 당시는 농경사회에 수공업이 새롭게
불교예술 분야는 타종교에 비해 지원이나 상업적인 부분이 뒤처져 먹고 살기 힘든 분야다. 하지만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척박한 불교예술 분야에서 꾸준히 연극과 뮤지컬을 제작해온 이가 있다. 최근 설립된 (사)한국불교예술문화총연합회의 회장에 선출된 정광진(68·법명 法性) J&C코리아뮤지컬컴퍼니 대표다. 지난 2020년 3월 15일, 정광진 회장이 연출한 연극 ‘이뭣꼬!’의 전국 순회공연을 준비하던 소수의 불자 연극인들이 한국불교연극연합회 창립에 뜻을 모았다. 이에 정 회장을 비롯한 원로 배우들은 일 년에 걸쳐 전국 사찰을 돌며 지역
부처님, 말먹이용 보리를 드시다부처님께서는 한때 나레루(Narelu)의 님바(Nimba) 나무 인근에 있는 베란자(Veranja) 마을에서 500명의 비구 제자와 함께 머물고 있었다. 베란자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한 브라만(婆羅門)이 부처님께서 자신의 마을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부처님의 훌륭한 명성을 접한 브라만은 부처님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가 여러 가지 질문을 했고, 부처님께서는 자상하게 대답해주었다. 브라만은 부처님 법문을 듣고 감복하여 부처님을 찬탄했다. 그 자리에서 브라만은 즉시 불법승 삼보에 귀의했다. 그리
프롬은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인간의 행동에 관심을 가졌다.그는 자유가 인간에게독립성과 합리성을 부여하지만인간을 고립시켜 불안에 싸인무력한 존재로 만든다고 보았다.그래서 인간은 자유라는무거운 짐으로부터 도피해새로운 의존과 복종의 대상을 찾거나적극적인 자유의 실현을 위해 나아가는갈림길에 서게 된다고 말했다.‘자유’.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말이다. 자유는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누군가의 구속에서 헤어 나와 마음대로 사는 것도 자유이고, 하루하루 근근이 버티는 팍팍한 살림에서 벗어나 돈 걱정
루스탐이 받은 선물페르시아의 전설적인 영웅 ‘루스탐’이 노인 한 사람을 구해주었습니다. 늦은 밤 별빛이 초롱초롱한 밤하늘 아래 모닥불을 피워놓고 마주 앉은 영웅 루스탐과 노인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노인이 이렇게 말했지요.“저를 구해주셨으니 아름다운 것을 선물하고 싶습니다.”하지만 전쟁터에서 살다가 죽어야 할 운명인 루스탐에게 그런 바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저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모닥불의 따뜻함과 나른함, 피어오르는 연기에서 나는 냄새, 그리고 머리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저 별들의 아름다움까
1300년 전 한반도의 수도는 서울이 아닌 서라벌(현재의 경주)이었다. 당시 서라벌은 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세계 4대 도시(동로마 콘스탄티노플·이슬람 바그다드·중국 장안) 중 하나로, 신라의 왕경(王京)은 한민족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손꼽을 만하다.그 중심에 황룡사와 9층 목탑이 우뚝 서 있었다. 황룡사는 553년(신라 진흥왕 14년) 창건된 신라 최대의 사찰이지만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골의 침입 때 소실됐다. 643년(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세워진 9층 목탑도 이때 함께 소실됐다.현재 터만 남은 ‘경주
유마거사 문병은 누가 감당할까?[부처님의 10대 제자-2]• 무대 - 인도 바이샬리 성• 주요 등장인물 - 부처님, 유마거사, 사리불을 비롯한 부처님의 십대제자.• 주요 전개과정사리불이 유마거사 문병을 할 수 없다고 물러서자, 부처님께서는 마하 목건련과 수보리 등 나머지 10대 제자에게 차례로 유마거사 문병을 부촉한다. 그러나 모두 그 소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물러서면서 유마거사와 법담(法談)을 하다가 꺾인 이야기를 상세하게 아뢴다.지혜제일이라는 사리불이 물러났습니다. 유마거사 문병 사절을 감당할 수 없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불교문화 스며든 궁궐‘서로 닮은 듯 다른 듯’무더운 여름이 시작됐다. 코로나19의 기세는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나들이가 쉽지 않은 시절을 감안해, 서울의 5대 궁궐을 독자여러분 대신 둘러봤다. 고풍스런 궁궐은 분명 숭유억불(崇儒抑佛) 시대에 지어졌지만, 그 속에는 불교문화가 적지 않게 스며들어 있다. 닮은 듯 다른 궁궐과 사찰로의 여행을 〈금강〉과 함께 떠나보자. 궁궐건축은 사찰건축과 많이 닮았다. 한 공간 내에서 진입에 따른 여러 개의 문이 주요 전각까지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
‘루카다 나트야(Rūkada Nātya)’는 스리랑카의 전통 줄 인형극이다. 마을공동체에서 농한기에 가벼운 여흥 삼아 부처님의 전생담 등 도덕적인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를 공연한다. 이 줄 인형극은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학자들은 ‘줄 인형극’이란 용어를 여러 형태로 정의하는데, 주로 나무로 제작한 인형에 그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의 의지가 더해졌다고 풀이한다. 줄 인형극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고려시대부터 부처님오신날 관등놀이로 행했던 ‘망석중놀이’가 있었고, 미얀
‘베를린 불교의 집’의 창건베를린 불교의 집(Das buddhistische Haus in Berlin)은 파울 달케(Paul Dahlke, 1865~1928)가 1924년 완공한 사찰이다. 불교가 대중화 되지 않았던 1920년대에 세워진 몇 안 되는 사찰 중 하나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남방불교사원이다. 불교의 집은 베를린과 바로 옆 행정구역인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경계지역인 프로나우(Frohnau)에 위치해 있는데, 베를린 북서부행 전철 노선의 마지막 정거장이라 베를린 중심부에서도 한 시간 이상 소요된다. 유럽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