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변하므로
섣부른 미래예측 대신
끊임없는 혁신 꾀해야

노동을 ‘대가를 받고 제공하는 정신적·육체적 활동’이라고 좁은 의미로 개념 정의를 하면 농민은 노동자가 아니다. 이렇게 정의하면 농민 뿐 만 아니라 상인·수공업자도 노동자가 아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노비나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을 노동자로 간주했지만, 농민은 자기 소유의 토지에서 자기만의 사업을 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자’라는 개념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농민이 농촌에서 쫓겨 도시로 와서 임금을 받고 일하면서 시작됐다. 그때부터 노동력을 사고파는 노동시장이 형성되었다.

출가와 재가의 노동

부처님 당시는 농경사회에 수공업이 새롭게 등장한 시대였다. 농업생산성이 급격하게 향상돼 잉여농작물이 발생했고, 모두가 농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게 되자 수공업이 발달했다. 인도는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 등 4계급으로 이뤄진 사회였다. 이중에서 수드라는 노동자계급이었으나 나머지는 노동자라고 부르기가 적절하지 않다.

노동을 넓게 해석하면 생존을 위해 필요한 모든 정신적·육체적 활동이다. 농민·상인·수공업자는 대가를 받고 일하는 노동자라고 보기 어렵지만 생존을 위해 정신적·육체적 활동을 한다. 부자 상인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재물을 축적했으면서도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면 노동이라고 하기는 부적절하다.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재물의 축적을 위해 일하는 것은 불교적 삶이 아니라고 오해하기 쉽다. 〈중아함경〉에는 “만약 옷을 축적하여 선법이 증대하고 악법이 쇠퇴한다면 나는 그런 옷을 축적해도 좋다고 설한다. 옷 뿐 만이 아닌 음식·도구·주택·촌락 등도 마찬가지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부처님은 경제문제에 관해 재가자와 출가자를 구분하셨다. 재가자의 경우 생존을 위한 노동을 넘어서는 재물의 축적도 올바른 방법이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셨다. 부처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꿀벌처럼 열심히 일하라.’고도 하셨다. 또 ‘재물이 많으면 한량없는 복을 얻는다.’고 말씀하셨다. 경전은 재물이 많으면 좋은 집, 좋은 음식, 좋은 옷을 입고 친구와 이웃을 돕고 승가에 보시도 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근면은 농민·상인·수공업자·노동자 모두에게 필요한 노동의 덕목이었다. 연기의 세계에서 근면은 자신은 물론 타인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재가자와 달리 출가자는 노동을 하지 않았으며 걸식에 의존해 살았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재가자는 생존수단을 제공하고, 출가자는 그 대가로 법(法, 다르마)을 제공하므로 세간의 비난처럼 일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수도생활을 정신노동으로 생각했으며, 출가자는 노동에 종사하지 말고 오직 수행에만 전념하도록 했다. 출가자에게는 농사일이나 상업 등의 일체의 노동과 생산활동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근본율장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농사나 장사일과 같은 생산노동을 직접적으로 금하고 있는 계율조항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직업적인 생산노동이 아닌 출가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일과 노동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상당부분 허용하고 계신다는 견해도 있다. 중국은 물론 고려시대에도 출가자는 특수한 기술로 공예품을 생산했다.

부처님은 비록 출가자에게는 노동을 금했지만 재가자에게는 현재가 편안하고 즐겁기 위해서는 직업을 통해 독립적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하셨다. 스스로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경제적 자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다면 결코 생활이 편안할 수 없다는 것이다. 팔정도의 하나인 정명(正命)은 바른 직업 혹은 바른 생활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바른 노동도 정명에 포함되는 하위개념이라 하겠다.

출가자와 재가자는 서로 공생하는 관계에 있었다. 출가자는 법을 보시하고, 재가자는 음식과 옷을 보시했다. 이런 상호의존적인 관계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할 수도 있다. 경제생활이 수행에 장애가 되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재가자에게 법보시를 통해 기여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승가에서 경제생활을 금지한 것이지, 노동이나 생산을 경시한 것은 아니었다. 인도에서는 중국과는 달리 걸식만으로 충분히 승가가 유지될 수 있었다.

중국 선종에서는 사찰생활을 규율하는 규칙을 ‘청규(淸規)’라고 부른다. 당나라 때 백장회해(百丈懷海)가 제정한 백장청규가 대표적이다. 인도에서 전해온 율장의 내용은 중국의 현실에는 맞지 않아서 중국 선종의 사찰에 맞는 규칙을 제정한 것이다. 백장청규에는 여러 가지 규칙이 있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노동에 관한 규칙도 있다.

중국에서 황제가 불교교단을 비생산적인 집단으로 보고 탄압하자, 선종 교단은 스스로 생산활동을 영위함으로서 경제적 독립을 추구했다. 오랫동안 중국의 위정자나 유교·도교인은 “불교의 승려는 농사를 짓지 않고도 먹고, 베를 짜지도 않고 옷을 입는다.”고 비난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불교 교단의 강구책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 중국은 인도와 다른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중국의 선불교는 산악형 종교집단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걸식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의식주의 자급자족을 위한 생산적인 근로집단의 성격을 띠게 된다. 출가자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걸식만으로는 식량을 충당할 수 없게 되자 토지를 보시 받고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는 새로운 방식의 출현도 출가자가 노동을 하게 되는 이유의 하나이다. 중국 선종에서 출가자의 노동은 단순히 생존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에 그치지 않고 수행의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노동에 임할 때는 참선과 같이하여야 하고, 소리 내어 농담을 하거나 큰소리로 웃어서는 안 되며, 남보다 뛰어남을 자랑하거나 능력을 드러내려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노동과 좌선이 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백장청규에는 여러 가지 규칙이 있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노동에 관한 규칙도 있다. 사진은 단양 영춘면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는 천태종 스님과 신도들.

근로소득과 바람직한 경제관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저임금 노동자의 비율이 두 번째로 높고, 노동시간도 두 번째로 길 정도로 노동환경이 열악하다. 일부 대기업 노조원을 제외하고 노조가 결성되지 않은 대부분의 노동자에겐 최저임금보다 약간 높은 수준의 임금이 현실이다. 더구나 동남아 노동자와 중국 거주 조선족은 우리나라에서 저임금은 물론이고, 인권이 보장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다.

경전에는 가장 첨예한 경제관계의 하나인 노사관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중아함경〉은 “상전은 다섯 가지 일로써 종이나 하인을 가엾이 생각하고 불쌍히 여겨 구제하여야 하나니. …… 첫째는 그 힘에 따라 일을 시킨다. 둘째는 때에 따라 먹인다. 셋째는 그 힘에 따라 마시게 한다. 넷째는 날마다 쉬게 한다. 다섯째는 병이 나면 약을 준다. …… 만일 사람이 종이나 하인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면 반드시 흥하고 쇠하지 않느니라.”고 설해져 있다. 부처님은 노동자에게 적정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라고 지시하면서 ‘사미에게도, 절을 지키는 사람에게도 그들이 일을 하면 돈을 지불하라.’고 말씀하셨다. 사찰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노동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경전은 아랫사람의 능력에 따라 일을 시키되 △음식 △휴식 △의료복지 등을 제공해야 함은 물론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고 설한다. 아랫사람도 윗사람에 대해 열심히 일하고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가 성실과 상호 사랑으로 맺어져야 한다.

요즘 젊은 세대는 저축이 어려운 시대라고 말한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보면 직장은 겨우 쓸 정도의 봉급만 지불한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과거에 비해 돈을 쓰고 싶은 곳이 너무 많기에 저축이 어려운지도 모른다. 영국 여성의 49.2%가 소비중독으로 인해 채무불이행상태라는 조사도 있다. 젊은 세대는 저축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부채로 허덕인다. 과거 세대는 자식 걱정, 노후 대비 등의 이유로 습관적 소비 억제 경향이 있어서 필요 이상의 돈을 쌓아두기도 했다. 젊은 세대와 과거 세대의 대조적인 경제관에 대해 부처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

〈잡아함경〉을 보면 소득의 1/4은 저축해 예기치 못한 일에 대비하라고 하셨다. 소득이 너무 낮아 저축이 안 된다면 모르지만 과도한 소비로 저축이 안 된다면 부처님의 뜻에 어긋난다. 과거 세대가 자식 걱정, 노후 대비 등으로 저축한 것은 바로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욕심으로 지나치게 돈을 쌓아두고 인색한 것을 준엄하게 꾸짖으셨다. 저축만 하다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인색하게 삶을 마감하는 것도 부처님 뜻에 어긋난다.

불교적으로 바람직한 삶이란 중도 절제의 단순 소박한 삶을 살며 남는 돈은 미래를 위해 저축하는 것이다. 소득이 부족해서 생존이 위태로운 경우는 나라에서 구제해주어야 한다. 경전은 배고프면 음식을 주고, 집이 없으면 머물 곳을 주고, 아프면 치료해주어야 한다고 설한다. 부자는 축적한 재산을 좋은 일을 위해 써야 한다. 〈율장〉은 ‘여성출가자는 너무 남루한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설한다. 단순 소박한 삶을 살더라도 어느 정도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수준의 소비는 허용된다고 보아야한다. 모든 문화적 욕구를 억제하고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수단만 충족하며 사는 것은 불교적 삶이 아니다.

국내 여러 호텔에서도 로봇이 룸서비스를 한다. 마카오의 한 카지노에서는 딜러가 로봇이다. 그래서 ‘노동의 종말’과 ‘직업의 소멸’을 예고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시대의 대처

인공지능과 로봇시대가 급격하게 도래하고 있다. 국내 여러 호텔에서도 로봇이 룸서비스를 한다. 마카오의 한 카지노에서는 딜러가 로봇이다. 독일에서는 2022년부터 자율주행 버스의 운행을 시작할 법적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호텔의 직원, 카지노의 직원, 운전기사가 해고되는 것은 이미 시작된 현실이다. 물론 인공지능과 로봇시대에도 없어지는 직업 못지않게 새로 생기는 직업도 있다. 문제는 없어지는 직업만큼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수 있느냐는 점이다. 금융기업 골드만삭스는 수천 명의 애널리스트를 해고했는데, 새롭게 채용한 데이터 전문가는 수천 명에 훨씬 못 미친다. 노동에 관한 각종 연구를 보면 없어지는 직업만큼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

‘노동의 종말’과 ‘직업의 소멸’을 예고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서 일할 수 없다면 노동에 의해 먹고 사는 공식이 무너진다. 정부는 저출산 대책으로 출산을 장려하지만 태어나서 일자리를 갖지 못하는 인구가 대부분이라면 정부가 생존을 책임져야 한다. 정부가 책임질 게 아니라면 출산 장려를 하지 말아야 한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누구에게나 일정 소득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제가 관심을 끈다. 스위스에서는 월 300만 원을 지불하는 기본소득제를 도입하기 위해 국민투표에 회부했으나 부결된 바 있다. 핀란드에서는 기본소득제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실험 중이다.

기본소득제 외에 다른 해결책으로 가짜 직업(Fake Jobs)이 거론된다. 불필요한 일을 하거나 적정 인원보다 더 많은 인원이 일을 하게 해 직업을 억지로 창출하는 방법이다. 인간은 놀고먹기만 하면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기에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인간의 권리로 보고 정부가 ‘억지 직업’이라도 제공하는 것이다.

비록 여러 가지 예측이 나오고 있지만 과거를 회고해보면 대부분의 미래 예측은 틀렸다. 비관도 낙관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며 담담하게 최선을 다하는 중도적 대처 방안이 불교적 해법이다. 모든 것이 변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계는 예측불가능의 세계이므로 끊임없이 변해야한다. 혁신은 불교적 삶의 특성이다.

또 하나의 해법은 교육이다. 〈별역잡아함경〉은 “온갖 기술을 먼저 배우고, 다음에 온갖 재물과 보물 모으되…….”라고 설한다. 부처님은 최고로 축복할만한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많이 배우고 기술을 몸에 익히며 편안한 마음으로 일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중아함경〉은 “처음에는 먼저 기술을 배워라. 그 다음으로는 재물을 구하고, …….”라고 설한다. 〈중아함경〉은 또 “마땅히 먼저 기예를 익히라. 그래야만 재물을 얻으리…….”라고 설한다.

인공지능과 로봇시대에는 과거의 지식이 금방 쓸모없게 된다. 직업을 잃으면 교육을 통해 재취업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이제 평생교육은 소수가 아닌 모든 사람의 필수사항이다. 최고의 교육은 무엇을 배우는가가 아니라 무엇이든 배울 수 있는 학습역량의 배양이며,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대처할 수 있는 적응능력의 습득이다. 21세기에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종교라는 불교, 과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종교인 불교는 인공지능과 로봇 시대에도 여전히 삶의 해답을 주리라 확신한다. 오직 모를 뿐이라고 생각하고 비관도 낙관도 하지 말고 혁신과 교육훈련에 매진해야 한다.

윤성식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고려대와 미국 오하이오대 졸업 후 일리노이대에서 석사, UC버클리대에서 경영학박사를 받았다. 또 동국대에서 불교학 석·박사를 받았다. 2004년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과 국회 공직자윤리위원장, 미국 텍사스대학(오스틴) 경영대학원 교수를 맡은 바 있다. 저서로 〈부처님의 부자 수업〉·〈예측불가능한 시대에 행복하게 사는 법〉 등 다수가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