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 개항한 원도심
100년 전 사찰·가옥에는
희미한 수탈의 흔적도

군산 세관.
탁류길 코스. 〈출처=군산시청〉

100년 전, 일제는 개항 후 군산을 전라도의 곡창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수탈하는 거점 지역으로 삼고 항만·철도 등을 건설했다. 물자와 자금이 유통되자 일본인 인구도 늘었고, 이들을 위한 주택·은행 등 사회기반 시설들이 세워졌다. 광복 후에는 타 지역에 비해 개발이 느리고 더뎠는데 이로 인해 당시에 세워진 대부분의 건축물이 보존됐다.

군산시는 2009년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은 건축물들을 보존·복원해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근대문화거리’를 조성했다. 아울러 ‘군산 시간여행’이라는 테마를 활용해 △탁류길 △아리랑길 △비단강길 등 스탬프 투어 코스를 만들었다. 이중 ‘탁류길’은 채만식((蔡萬植, 1902~1950)의 장편소설 〈탁류(濁流)〉의 작중 인물들이 거닐던 거리를 따라 △부잔교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군산세관 △해망굴 △월명공원 △신흥동 일본식가옥 △초원사진관 △동국사 등 군산의 원도심을 두루 둘러볼 수 있는 코스다.

쌀이 산처럼 쌓인, 쌀 없는 도시

“… 이러케 에들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黃海) 바다에다가 깨여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채 얼러 좌르르 쏘다져 바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언덕으로 대처(大處) 하나가 올라안젓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 얘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도입부다. 소설은 1930년대 군산을 무대로 전개되는데, 일제의 수탈과 터전을 잃은 조선인의 생활상을 ‘초봉’이라는 인물의 삶에 투영해 그려냈다. 아버지 정 주사가 미두장(米豆場, 쌀의 시세를 이용해 약속으로만 거래하는 일종의 투기장)에서 가산을 탕진하면서 초봉의 수난이 시작되는데, 작중 인물들의 이야기 배경이 원도심 일대다.

일제는 옥구평야·김제평야 등 호남지역에서 생산한 쌀을 원활하게 운송하고자 철도·항만 등 다양한 시설을 건설했다. ‘뜬다리부두’로 불리는 ‘부잔교’도 그 중 하나다. 부잔교는 조차(潮差, 밀물과 썰물의 수위 차이)와 상관없이 대형선박을 항구에 접안하기 위해 조성한 시설이다. 수위에 따라 상하로 움직이는 다리와 다리에 연결된 콘크리트 함선이 일체형으로 구성됐다. 부잔교는 현재 안전상의 이유로 출입이 불가능하다.

부잔교가 건설됐을 당시에는 주로 현미를 일본의 오사카·고베·도쿄에 공급했다. 일제가 본토의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진행했지만, 생산량은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했다. 또 미곡생산량에 비해 수탈량이 높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1933년에는 전체 쌀 생산량의 53.4%가 일본으로 반출됐다.

쌀값은 계속 치솟았고, 조선인들은 쌀겨나 잡곡에 풀잎을 섞어 먹거나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했는데 이마저도 어려워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인들은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등 삶이 더욱 피폐해졌다. 이렇게 군산은 전국에서 쌀이 가장 많이 모이는 ‘쌀 없는 도시’가 됐다.

1930년대 군산미 미곡반출 선적 광경. 일본으로 반출되는 쌀이 군산항에 쌓여있다. 건물 뒤로 부잔교가 보인다. <사진=군산시청>

바닷길을 따라 나있는 산책로에서 해망동 방향으로 약간 걸으면 과거 위락시설로 사용됐던 ‘장미갤러리’를 볼 수 있다. 그 앞에는 〈탁류〉의 주요 등장인물들의 동상이 줄지어 서있다. 장미갤러리는 지역명인 ‘장미동’에서 이름을 따왔다. 장미꽃에서 유래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감출 장(藏), 쌀 미(米)를 사용해 ‘쌀이 없는 동네’라는 뜻이다.

장미갤러리에서 해망동 방향으로 50m정도 걸으면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 나온다. 이곳은 군산의 근대문화와 해양문화를 테마로 한 특화박물관으로 △해양물류역사관 △독립영웅관 △근대생활관 △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됐다. 박물관의 백미는 근대생활관이다.

이곳은 1930년 군산에 존재했던 열한채의 건물을 재현해 근대 거리를 조성한 공간이다. 당시 사람들이 사용한 생필품을 볼 수 있으며, 미두장, 인력거꾼 등 다양한 체험도 가능하다. 관람 후에는 박물관 테라스에 설치된 천리안으로 부잔교와 바다에 나가있는 어선, 인근 건물을 볼 수 있다.

근대역사박물관 옆에는 한국은행 본점·서울역사와 함께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3대 서양고전주의 건축물인 ‘호남관세전시관’이 나온다. 본래 군산세관으로 사용됐다. 과거에는 많은 부속 건물이 있었지만 모두 헐리고 본관 건물만 남아있다.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를 보며 천천히 걷다보면 해망굴이 나온다. 해망굴은 해망동과 군산 시내를 연결하기 위해 월명산 북쪽 끝자락을 뚫어 만든 길이 131m, 높이 4.5m의 터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터널로 쌀과 수산물 등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지나다녔다. 현재는 보행자만 통과 가능하다.

해망굴을 지나면 흥천사 옆으로 보이는 오르막길이 있다. 길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풀꽃들을 따라 천천히 오르면 군산 시민의 쉼터인 월명공원이 나온다. 공원에서는 더위를 피해 나무그늘 밑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주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잔교는 일제가 원활한 쌀수탈을 위해 조차와 관계없이 대형선박을 항구에 접안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영화 속 그 장면에 서다

월명공원에서 내려와 월명로를 따라 조금 걸으면 신흥동이다. 신흥동은 일제강점기 군산의 유지들이 거주하던 지역이다. 이곳에는 아직 적산가옥(敵産家屋)이 많이 남아 있는데, 비교적 최근에 지은 건물들과 서로 어우러져 이채로운 풍경을 자아낸다.

이러한 모습은 관광객의 발길을 이끄는 동시에 영화 촬영지로 주목받게 했다. 특히 ‘히로쓰 가옥’이라 불리는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장군의 아들(1990)’, ‘바람의 파이터(2004)’, ‘타짜(2006)’, ‘범죄와의 전쟁(2011)’ 등 많은 영화에 등장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포목점을 운영했던 ‘히로쓰 게이샤브로’가 거주했던 곳으로, 건축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담쟁이덩굴이 어지러이 뻗어있는 적갈색 담벼락을 따라가 태극기가 걸린 입구로 들어가면 잘 손질된 정원과 2층으로 된 목조건물을 볼 수 있다. 정원은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며 찾아온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몇 년 전까지는 내부도 관람할 수 있었지만, 요즘에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외부만 개방한다.

가옥을 나오면 관람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곳이 보인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 촬영지 ‘초원사진관’이다. 나름대로 질서를 정해 순서대로 기념촬영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이곳은 원래 인근 카페의 차고였는데, 영화 촬영지를 물색하던 제작진이 주인의 동의를 받아 사진관으로 개조했다. 영화촬영이 끝난 뒤 철거했지만, 군산시가 나서서 건물과 영화에 사용됐던 사진기·선풍기·앨범 등의 소품까지 복원했다. 관광객을 위해 무료로 개방하고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초원사진관 옆에는 시화가 그려진 담벼락이 줄지어 있다. 담장을 따라 걷다보면 옛 건물을 활용한 독립서점과 카페,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진 좁은 골목,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어르신들의 모습에 저절로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신흥동 골목에 있는 독립서점. 그 옆 골목에서 마을 주민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하지만 이곳의 주민들에게는 낯선 이들의 발걸음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군산 토박이 홍득남 씨(여, 76)는 “관광 오는 사람이 많아져서 동네가 젊어졌다. 사람들이 많이 와야 여기저기 발전을 할 수 있다.”면서도 “ 관광하러 와서 허락도 없이 아무데나 사진을 찍고 고함을 치거나 쓰레기를 버리고, 집안을 기웃거리는 경우도 있어서 불편하다. 관광 오는 건 좋지만 여기에 사람이 산다는 걸 잊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할머니 말씀에 나 스스로도 들뜬 마음이 앞서 이 곳에 거주하는 주민에 대한 배려심을 잠시 잊은 건 아닌지 되돌아봤다. ‘여기에도 사람이 산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걷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소녀상 서있는 일본식 사찰

동국사(東國寺)는 군산에 남은 일제강점기 건물 중에서도 돋보인다. 동국사로 향하는 길은 높이 솟아있어 멀리서도 보이는 대웅전의 지붕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다. 일주문을 넘어서면 작은 마당과 단층의 대웅전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국사는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우치다(內田佛觀) 스님이 일본조계지에 세운 포교소 ‘금강선사(또는 금강사)’에서 출발했다. 우치다 스님은 1913년 신도들의 시주를 받아 지금의 자리에 대웅전과 요사채를 세웠다.

우거진 대숲 아래의 대웅전은 일본에서 가져온 삼나무로 지었는데, 대들보만 백두산 금강송을 사용했다. 에도시대(江戶時代)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대웅전과 요사채는 연결돼있고, 건물 외벽에 창문이 많고 처마에 아무런 장식이 없다는 게 특징이다.

동국사는 1945년 광복과 함께 미군정에 몰수됐다가 1955년 (재)불교전북교당에서 인수했다. 당시 전북종무원장이었던 김남곡 스님(1913~1983)이 ‘우리나라의 절’이라는 뜻을 담아 ‘동국사’로 등기를 냈다.

국가등록문화재인 동국사 대웅전에는 소조석가여래삼존상(塑造釋迦如來三尊像)이 봉안돼있다. 1650년 제작된 소조석가여래삼존상은 본래 금산사 대장전에 있었다. 광복 후 조동종의 스님들이 불상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자, 김남곡 스님이 금산사에 양해를 구하고 동국사에 봉안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측에 가섭, 우측에 아난존자가 위치했다. 불상에서는 총 373점의 복장유물이 나왔다. 소조석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은 2011년 보물로 지정됐다.

동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소녀상 뒤로 참사비가 보인다.

대웅전 건물 왼편에는 범종과 작은 연못이 있다. 그 뒤로 일본 위안부 문제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과 ‘참사문비’가 나란히 보인다. 가로 3m, 세로 2m 크기의 참사문비는 2012년 일본의 조동종 스님들이 일제의 만행과 자신들의 첨병(尖兵) 역할을 참회하고 용서를 구했던 참사문 일부를 발췌해 한국어와 일본어로 음각한 비석이다.

‘우리 조동종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태평양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해외 포교라는 미명 하에 당시 정치권력이 자행한 아시아 지배야욕에 가담하거나 영합하여 수많은 아시아인의 인권을 침해해왔다….’

위 글귀로 시작하는 참사비에는 조동종 스님들의 솔직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 담겼다. 고향이 그리운 듯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소녀상과 참사비를 함께 바라보니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올라왔다.

군산에는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다. 군산시에서는 이러한 유산들을 보존·복원해 수탈의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군산의 길을 걷다보니 새삼스럽게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의 말이 떠오른다. 많은 사람이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군산의 원도심을 거닐며 아픈 역사를 올바로 바라보고 공감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 동국사 대웅전의 모습. 동국사는 일본의 삼나무를 사용해 지었는데, 대들보만 백두산 금강송을 활용했다.
신흥동의 ‘달빛마을 추억길’ 골목 전경.
장미갤러리 앞에는 소설 〈탁류〉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동상이 줄지어 서 있다.
초원사진관 인근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 관광객들의 기념사진 단골촬영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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