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유럽불교회의 열린
유럽 최고(最古)의
남방불교사원

‘베를린 불교의 집’ 정문을 지나 올라가면 보이는 본채.

‘베를린 불교의 집’의 창건

베를린 불교의 집(Das buddhistische Haus in Berlin)은 파울 달케(Paul Dahlke, 1865~1928)가 1924년 완공한 사찰이다. 불교가 대중화 되지 않았던 1920년대에 세워진 몇 안 되는 사찰 중 하나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남방불교사원이다. 불교의 집은 베를린과 바로 옆 행정구역인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경계지역인 프로나우(Frohnau)에 위치해 있는데, 베를린 북서부행 전철 노선의 마지막 정거장이라 베를린 중심부에서도 한 시간 이상 소요된다. 유럽의 수도는 대개 아시아의 수도에 비해 규모가 작은 경우가 많지만 베를린은 서울에 비해 면적이 50% 가량 더 넓고 구역마다 고유의 개성이 강하다.

베를린이 원래 이렇게 컸던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규모의 베를린은 1920년에 산업화와 인구 유입에 발맞춘 ‘베를린시 확장법안(Groß Berlin Plan-Gesetz)’이 통과되면서 확장된 도시의 형태이다. 이전에는 규모가 약 4분의 1 정도였는데, 그 당시 베를린 주변의 크고 작은 마을들이 베를린시에 포함되면서 현재의 구역으로 확장됐다. 베를린 북부의 작은 마을이었던 프로나우 지역 역시 1920년에 베를린시에 통합되었고, 도시 외곽에 투자와 개발을 유치하기 위한 당시 정부의 노력이 마침 불교사찰을 지을 부지를 찾고 있던 달케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베를린시 확장계획과 달케의 불교사원 건축프로젝트 시기가 맞물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달케는 원래 베를린이 아니라 쥘트섬(Sylt, 덴마크와 가까운 북해의 섬)에 불교사찰과 스투파(Stūpa) 건설을 꿈꾸었다. 그러나 쥘트섬에 5헥타르나 되는 부지를 매입해 건축설계를 준비하던 중 쥘트섬과 독일 본토를 연결하는 다리, 힌든부르크담(Hindenburgdamm)이 곧 세워진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추후 쥘트섬에 많은 관광객이 유입될 것을 우려했고, 고요한 환경에서 수행을 하고자 했던 달케는 더 이상 쥘트섬에 불교사원을 세우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때마침 베를린시 확장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이였는데, 이미 베를린에 거주하며 의사로 일한 적이 있었던 그는 계획을 수정해 베를린 외곽에서 그의 뜻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베를린 도심에서 한 시간 반가량 떨어진 프로나우는 작고 한산한 마을이다. 역 주변의 풍경.

쥘트섬과 독일의 불교

달케가 우려했던 것처럼 쥘트는 곧 인기 관광휴양지가 되었다. 쥘트섬은 현대 독일인들에게 한국의 제주도와 같은 곳이다. 대부분이 해변이나 골프를 즐기러 가는 장소이지만 사실 이 섬은 독일불교사에 있어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본래 베를린이 아닌 쥘트에 불교사찰을 세우고자 했던 달케는 본격적으로 계획에 착수하기 전인 1904년에 스리랑카 스타일의 집을 지었다. 이후 계획이 변경되어 불교의 집을 베를린 프로나우에 지었지만, 달케는 쥘트 부지를 팔지 않고 1927년에 4m 정도의 스투파를 원래 계획대로 쥘트에 세웠다.

달케의 스리랑카식 가택이나 스투파는 당시 상당히 이목을 끌었을 것이다. 달케의 스투파는 나치 집권기에 공항부지 확보를 위해 철거되어 본래의 모습이 유실되었고, 현재는 불상이 대신 안치돼 있다. 이 스투파가 보존되었더라면 유럽 최초의 불탑이 되었을 것이다.

독일불교사에서 또 한 명의 초기 불자 역시 쥘트섬에 머물렀다. 부유한 중국 가문의 가정의였던 요나스 오토(Johannes Ferdinand Otto, 1889~1969)가 주인공이다. 그는 중국에 거주하던 중에 불자가 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1948년부터 쥘트에서 6년을 보냈다.

달케 만큼이나 불교에 심취해 있었던 오토는 1949년 쥘트에서 파울 달케의 동명이인 조카인 파울 달케(1919년 생)를 만나 삼촌 파울 달케가 이룩한 불교사원 건축프로젝트 이야기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쥘트섬에 불교센터가 들어선 것은 1993년에 이르러서이다. 현재 쥘트섬의 불교센터는 까르마 까규파(Karma Kagyupa) 전통을 따르고 있다.

‘베를린 불교의 집’ 정문.

파울 달케와 아소카 위라라트나

달케가 불자가 된 계기는 아마도 1898년에 떠난 실론(현 스리랑카)을 포함한 세계일주였을 것이다. 달케는 여행 전 이미 쇼펜하우어의 대표작을 통해 불교에 대한 철학적 연구가 유럽에서 유행했던 시기의 불교 해석을 접한 적이 있었다. 그는 1900년에 실론을 재방문해 팔리어와 불교를 공부했고, 실론 불교계 인사들과 교류했다.

귀국 후 달케의 본업은 여전히 의사였지만, 그는 의료 관련 글보다 불교 관련 글을 더 많이 남겼다. 불교를 주제로 다양한 집필활동을 했는데, 1903년부터 1928년까지 18건의 출판 기록이 남아 있다. 1917년부터 1922년까지는 5권의 불교 정기간행물 〈신불교매거진(Neubuddhistische Zeitschrift)〉을 발간했고, 죽기 전까지 모음집(Brockensammlung)을 발행했는데 달케 사후에도 1938년까지 달케의 누이가 모음집을 계속 발행했다고 한다. 또한 1919년과 1923년 사이에는 니까야와 팔리 경전을 번역하는 작업에도 매진했을 정도로 달케는 불교에 열정적이었다.

1924년 완공된 베를린 불교의 집은 100년의 역사만큼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겪었고, 다양한 인물들의 헌신으로 그 존재가 지속될 수 있었다. 1928년 달케가 타계한 후에는 그의 친지들이 사찰을 돌보고 달케의 뜻을 이어가려 노력했다. 하지만 나치 집권기에는 활동이 불가능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점점 주변 부지를 매도해야 했다. 전후에는 망명자들을 수용해 돌보기도 했는데 지속적으로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가 1957년 마침내 아소카 위라라트나(Asoka Weeraratna, 1918~1999) 가 부지와 건물을 함께 매수했다.

위라라트나는 부유한 보석상의 아들로 태어나 불교학교를 졸업한 모범적인 불교신자였다. 그는 당시 스리랑카 콜롬보(Colombo)에 있던 독일 달마굽타회(The German Dharmaduta Society)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사업차 1951년 독일을 처음 방문 했던 당시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은 사람들이 새로운 도덕관 및 삶의 지침을 필요로 하는 것을 깊이 느꼈고, 이를 계기로 독일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나누기로 결심한다.

실론으로 돌아온 위라라트나는 그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이듬해인 1952년 독일 달마굽타회를 창립했다. 베를린 불교의 집을 위한 실론 불자들의 활발한 모금활동을 통해 마침내 1957년 달케가 세운 불교의 집은 유럽 최초의 남방불교사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위라라트나는 실론 불교와 독일 사이의 교두보 역할을 하다가 1964년 당시 실론에서 많은 존경을 받던 마타라 스리 나나라마 마하 테라(Matara Sri Ñānārāma Mahā Thera, 1901~1992)를 만나 큰 깨달음을 얻은 후 1972년 출가해 미티리갈라 다마니산티 테라(Mitirigala Dhammanisanthi Thera)로 남은 생을 살았다.

본채의 사방의 벽에는 역사 속 현장이 담긴 사진이 빼곡히 걸려 있었고, 캐비닛에는 중요 출판물과 유물이 소중히 전시돼 있다.

현재의 ‘베를린 불교의 집’

한 시간 반가량의 여정 후 도착한 프로나우는 작고 한산한 마을이었다. 프로나우 역에서 ‘불교의 집’까지 십여 분을 걷는 동안 보이는 집들 역시 한 시간 전 베를린 도심의 주택 외관과는 너무나 달라 같은 베를린이 맞는지 놀랄 정도였다. 베를린 불교의 집은 주택가 길 끝에 위치해 있었는데, 정문 바로 옆에는 파울 달케를 기리는 팻말이 있고, 그 옆에 베를린 지역 공사 팻말도 세워져 있었다. 베를린 불교의 집은 1995년에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독일 정부의 관리와 보호를 받고 있다.

정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니 정원과 법당, 본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코로나19 방역 지침 탓인지 방문자가 없어 불교의 집은 한적했다. 앞뜰 화초를 가꾸는 독일인 노부부 외에는 인적이 없어 혼자 차분히 둘러볼 수 있었다. 본채에 들어서자 목조 건물의 구조와 오랜 세월이 베어난 전체적인 색감과 느낌에서 공간에 스며있는 시간과 역사가 느껴졌다. 사방의 벽에는 역사 속 현장이 담긴 사진이 빼곡히 걸려 있었고, 캐비닛에는 중요 출판물과 유물이 소중히 전시돼 있었는데 그 모습에서 위신(威信)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빛바랜 사진으로 느껴지는 역사 외에 본채에서 눈에 띄는 것은 많은 책과 토론을 위한 공간이었다. 인적이 없어도 코로나19 전에 어떻게 활용되었던 공간이었는지 절로 상상이 되었다. 한편에는 세계종교·철학·불교학 등과 관련된 책이 잘 정돈돼 있었고, 그 앞에는 큰 타원형 원탁이 놓여있어 둘러앉아 토론을 하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또 다른 한편에는 지역사회와 어떻게 소통하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팸플릿들이 구비돼 있었는데 그 주제 중에 동물복지·인권 등이 눈에 띄었다. 스리랑카 아동을 위한 독일복지재단 이름으로 발행된 2021년 달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스리랑카 현지와도 교류가 활발한 모양이다.

원탁 주변에도 이미 다양한 주제의 서적이 구비되어 있었지만, 더 많은 불교 관련 서적과 경전이 본채에 별도로 마련된 도서관에 잘 정돈돼 있었다. 싱할라어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어·버마어 등 다른 남방불교 국가 언어와 영어·독어·일본어 등의 언어로 구비돼 있었다. 단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법회나 불경강독회도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것 같았다. 벽에는 중간 중간 위인들이 남긴 불교 관련 명언이 붙어 있었다. 법당은 본채에서 나와 오른쪽에 따로 마련돼 있는데 법회보다는 수행을 집중적으로 하는 공간으로 마련한 듯 보였다.

몇 년 후 ‘베를린 불교의 집’은 100주년을 맞이한다. 초대 유럽불교회의(European Buddhist Congress)가 1933년 베를린 불교의 집 근처에서 개최되었을 만큼 유럽불교사에 있어서 베를린 불교의 집은 의미 있는 장소이다. 지난 100년간 수많은 사람이 몸과 마음의 휴식 또는 지혜를 찾아서 이 공간에 머무르며 의지했을 것이다. 100년의 세월을 지킨 적막한 공간에서 불상 앞에 앉아 또 100년 후에 누군가가 베를린 불교의 집을 방문해 어떤 글을 남길지 상상해 보았다. 어서 베를린 불교의 집이 활기를 되찾기를 바라며 다시 분주한 베를린 시가지로 발길을 돌렸다.

본채 안의 전경.
본채에 별도로 마련된 도서관.
법당은 본채에서 나와 오른 쪽에 따로 마련돼 있는데 법회보다는 수행을 집중적으로 하는 공간으로 마련한 듯 보였다(좌). 우측은 안뜰의 전경.

이혜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한국불교를 공부하고 현재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수학중이다. 불교와 전쟁, 불교와 국가의 관계, 불교 개념의 제도화 과정을 중심으로 연구하며 그 외 세계의 비전통적 고등교육기관에도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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