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라는 큰 쥐 잡고도
무심하고 태평스러운
고양이가 되어보세요.”

루스탐이 받은 선물

페르시아의 전설적인 영웅 ‘루스탐’이 노인 한 사람을 구해주었습니다. 늦은 밤 별빛이 초롱초롱한 밤하늘 아래 모닥불을 피워놓고 마주 앉은 영웅 루스탐과 노인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노인이 이렇게 말했지요.

“저를 구해주셨으니 아름다운 것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살다가 죽어야 할 운명인 루스탐에게 그런 바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모닥불의 따뜻함과 나른함, 피어오르는 연기에서 나는 냄새, 그리고 머리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저 별들의 아름다움까지. 아름다운 모든 것이 이미 여기에 다 있는데, 바랄 게 뭐가 더 있겠습니까?”

그러자 노인이 모닥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한 줌 취하고, 불길 한 자락을 끌어와서 더하고, 가장 빛나는 별 두 개를 따서 두 손 안에 모두 담은 뒤 그 속에 ‘후’하고 숨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런 뒤에 두 손을 루스탐 앞으로 내밀더니 살며시 벌렸습니다. 그 속에서 무엇이 나왔을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나, 고양이입니다. 조그만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노인의 손아귀 속에 앉아 있었지요. 털은 연기처럼 잿빛이고, 두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한 자락 빨간 불길 같은 혀를 지니고 있었습니다.(진중권 지음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 p28~29)

영웅이 구한 노인은 마술사였고, 생명을 구해준 대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서 주었는데 그게 고양이라는 이야기, 어떠신가요? 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생명이 있겠습니까마는, 고양이의 매력은 특별합니다. 고혹적이고 매력적이고 싸늘하면서도 아지랑이같이 아득하고 솜사탕처럼 달콤합니다.

수행자를 닮은 동물

지금 당신의 집안 어딘가에 나와 같은 고양이나 개가 있나요? 녀석을 가만 바라보시겠습니까? 만약 녀석이 개라면 주인의 관심을 기다리던 차였기에 한달음에 달려와 주인의 손을 핥고 꼬리를 치겠지요.

하지만 우리들 고양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가가지 않습니다. 그저 물끄러미 지켜봅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고 멈춰 있지요. 상대가 몸이 달아 다가올 때까지 가만히 지켜볼 뿐입니다. 노려보지도 않습니다. 최대한 몸에 힘을 빼고 상대에게 집중합니다.

‘관조’라고 하기에는 집중력이 상당하고, ‘관찰’이라고 하기에는 짐짓 무관심한 것 같고, ‘응시’라고 하기에는 눈 말고도 제3의 감각으로 상대를 바라봅니다. 이것이 우리들 고양이의 자세입니다. 마치 꼼짝도 하지 않고 삼매에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에 수행자에 비유할 때가 많습니다.

경전에서는 부처님 제자들이 참선의 경지에 들어 이리저리 사색하고 골똘히 사유하는 것을 “마치 고양이가 문기둥이나 쓰레기통이나 하수구에서 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생각하고 궁리하고 이리저리 궁구하듯 한다.”고 말합니다(대림 스님 번역본 〈맛지마 니까야〉). 사실 이 비유는 부처님과 승가를 시샘하던 타종교인이 수행자의 모습을 고양이에 빗대 폄하한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아주 멋지지 않나요? 마음공부의 주제를 골똘히 생각하고 사무치게 생각하되 생각에 휘말리거나 휘둘리지 않아야 하는 수행자의 자세를 고양이가 먹잇감을 노리는 모습에 비유한 것은 〈대방광불화엄경〉에 담긴 ‘입법계품(入法界品)’에도 등장합니다.

“선남자여, 고양이가 쥐를 잠깐만 보아도 쥐가 구멍에 들어가 나오지 못하듯이 보살마하살이 보리심을 내는 것도 그와 같아서 지혜의 눈으로 번뇌와 업을 잠깐만 보아도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 나오지 못하느니라.”

티베트 한 사원에 살고 있는 고양이. 고양이 뒤로 보이는 티베트 불화가 인상적이다.

고요함으로 번뇌·업장 무너뜨려

상대가 악한이든 먹잇감이든 화두이든 번뇌이든 업이든 가만히 노려보고 겁을 주어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힘은 억세고 뻣뻣하고 우람한 체격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들 고양이 몸처럼 부드럽고 유연하고 힘을 다 빼어버린 그 끝에 자연스럽게 상대를 제압하는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지요. 강한 것보다 부드러운 것이 이깁니다.

좁디좁은 틈도 능수능란하게 들고나는 우리들 고양이에게 감탄한 세상 사람들은 ‘고양이 액체설’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었습니다. 어찌나 부드럽고 유연한지 흐르는 물과 같다는 것인데, 초기경전인 〈디가 니까야〉 에는 수문장이 성문과 성벽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을 고양이 한 마리가 드나드는 정도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것에 빗댄 문장도 있습니다. 몸집으로 따진다면 개미나 생쥐 한 마리가 드나들 틈이라 해야 맞겠지만 고양이 한 마리의 출입을 언급하는 것은, 그 큰 몸집을 움직여도 세상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는 것을 에둘러 말하고 있지요. 그런 걸 보면 도둑고양이라는 오명으로 불렸던 것도, 무엇을 훔쳐갔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잠든 세상을 조용히 활보하면서 움직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번뇌에 짓눌려 업을 짓는 무명 암흑의 세상을 악마 파순에게 들키지 않고서 고요히 살금살금 건너가는 수행자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지 않습니까?

그 조용함이 화두를 뚫고 번뇌를 깨고 업장을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조용히 엄청난 일을 벌이지만 사람들은 팡파르를 울리며 자신의 행위를 공표합니다. 아직도 번뇌를 다 떨치려면 억겁의 세월을 수행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수행합네.’ 하며 일으키는 마음 한 자락, 행동 한 가지가 악마에게 들켜서 윤회의 파도에 휩쓸리는 걸 모르는 딱한 사람들이지요. 상(相)을 내지 말라는 말을 귀 아프도록 들어오고 있지 않았던가요? 우리들 고양이는 하지 않는 듯 보여도 해야 할 일은 다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자취를 남들에게 들키지 않을 뿐이지요.

흑역사가 된 고양이 전설

우리 고양이들이 이렇게 극도로 조심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양이의 흑역사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배가 고팠던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고양이는 쥐구멍 하나를 발견하고서 그 속을 들여다보며 쥐가 빨리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쥐새끼 한 마리가 이런 위험을 모른 채 구멍에서 나와 놀았습니다. 고양이가 그걸 놓칠 리가 없지요. 워낙 굶주린 탓에 번개보다 더 빠르게 쥐새끼를 채어서 꿀떡 삼키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산채로 고양이 뱃속에 삼켜져 버린 쥐가 날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작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급기야 고양이 내장을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정작 굶주려서 먹잇감을 산채로 삼켜버린 고양이는 자기 내장이 뜯겨버렸고, 아픔을 이기지 못해 동쪽으로 서쪽으로 내달리게 됐습니다. 뱃속의 쥐새끼가 힘줄이며 근육이며 피를 먹어 치울 때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데굴데굴 굴렀고, 그러다 고양이는 허망하게 숨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고양이와 쥐의 관계에서 고양이는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언제든 변하기 마련이고 늘 요동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지요. 굶주려서 삼킨 먹잇감에 오히려 잡혀 먹힌 이 고양이 전설은 두고두고 고양이 세계에 전해내려 오고 있지요.

즉,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서 자신의 눈과 귀, 코와 혀 등 몸을 단속하지 못한 채 세상을 대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온갖 장난과 위험에 휘말리게 되고, 세상의 모양과 소리와 냄새와 맛에 탐착하게 됩니다. 그러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탐욕의 불길에 몸도 마음도 타버리고 마는 법입니다.

마음공부니 수행이니 하는 것에 전혀 관심 없는 범부라면 차라리 낫습니다. 욕망을 품고 그 욕망을 채우는 일생을 살다 가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욕망을 다스리겠노라 마음을 낸 사람이라면 조심해야 합니다. 공부가 무르익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단속하고 또 단속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더 거센 욕망의 불길에 타버리고, 그러다 결국 수행을 포기하고 오히려 더 큰 실패와 좌절과 괴로움을 겪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잡아함경〉 제47권 1,260 ‘묘경’)

라오스의 한 동자승이 새끼고양이를 품에 안고 있다.

그대는 고양이

대상이 무엇이건 그 대상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매우 유연한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노려본다고만 해서 될 일도 아니고, 힘을 쓴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그 대상과 하나가 되어 대상에 먹혀버리지 않는 것, 이것 참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우리들 고양이가 하듯이 한번 따라해 보면 감을 잡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지요. 자꾸만 말로 설명해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말만 하면 논쟁이 벌어지고, 논쟁만 일삼다가 정작 아무도 평상심으로 살지 못하게 됩니다. 저 유명한 남전 스님 일화를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큰 절에 스님들이 두 패로 나뉘어 고양이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었지요. 말은 말을 부르고 말만 하게 되고 말만 하다 끝나니 그보다 더 허망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끝날 줄 모르는 고양이에 대한 논쟁을 목격한 남전 스님께서 문제의 새끼고양이 목덜미를 움켜쥐고 또 다른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들고서 외쳤지요.

“말하라. 그러면 이 고양이를 살릴 것이요, 그러지 못하면 이 고양이를 죽일 것이다.[道得即救, 道不得即斬却也]”

순간 고요해졌습니다. 누구도 어떤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토록 장황하고 현란하게 쏟아내던 말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모든 이가 무슨 말을 해야 저 고양이를 살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느라 시간을 허비했고, 결국 불쌍한 고양이는 목이 베이고 말았습니다.

우리들 고양이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다들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 중에 단 한 스님이라도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스승의 손에서 고양이를 빼앗아들고 뛰쳐나갔다면 그 귀한 생명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자꾸 말을 하려면 말에 집어 삼키고 맙니다. 그 틀을 깨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됩니다. ‘평상심이 도(道)’라는 말을 듣고서 “그게 뭔데요?”라고 묻는다면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평상심으로 살지 못합니다. 지금 곧 고양이가 되어보시지요. 어느 사이 화두라는 큰 쥐를 거뜬하게 잡고서도 무심하고 태평스레 그날 하루를 살게 될 것입니다.

이미령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전번역가이자 불교대학 전임강사·북칼럼니스트이며, 경전이야기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붓다 한 말씀〉·〈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이미령의 명작산책〉·〈시시한 인생은 없다〉 등이 있다. 또 〈직지〉·〈대당서역기〉 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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