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소녀의 눈앞에 드넓은 바다가 펼쳐졌다

어둠 묻은 새벽빛이 조금씩 물러서고 어스름한 빛이 버스 위로 흘러내리는, 새벽인 듯 아침인 듯 오전 6시 출발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내 손을 끌어당겼다.

“남자 그거 별거 아닌기라.”

아마도 언니처럼 연애하면서 결혼을 당기기라도 할 것 같았는지 어머니는 남자의 값을 깎아 내리려는 듯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나에게서 남자라는 인물의 정을 완전히 떼어버리려는 마음 그것이었다. 오직 무엇인가를 이루고 사회적으로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라는 당부의 시작을 나에게 풀어 놓는 일이었을 것이다.

“연애 같은 거 하지 말고. 니는 알았제? 니는…….”

어머니는 다급하게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말을 이었다.

“니는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너 숙모 봐라. 공부 많이 항께 많은 사람들이 받들고 아들도 많이 낳는 거 봤제? 우짜든가 공부해야 된데이. 그라고 니는 돈도 벌어라. 살아봉께 여자도 돈이 필요하더라. 그라고 여자로서 행복하거레이.”

“부산 차부(車部, 종착지)에 주인언니가 나올끼다. 걱정말거레이.”

버스에 오를 때까지 손에 힘을 주던 어머니의 당부는 뜨거웠다.

버스에 올랐다. 어머니가 한 말은 내 마음 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마음은 고향과 집과 익숙한 친구와 헤어져 낯선 곳으로 가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집을 처음 떠나는 마음이 오죽했을까? 어머니는 그 두려움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당부만 뼈저린 말로, 내 머릿속으로, 뼛속으로, 살 속으로 밀어 넣기에 여념 없었다.

그러니 그 말이 그 순간에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겠는가? 어머니의 말은 미운 사람이 준 편지를 꼬깃꼬깃 주머니에 넣어뒀다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꺼내 읽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 그때 어머니가 이런 말을 했었지.’ 그런 식으로 그런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남자타령은 나마저도 연애하고 결혼한다는 말이 나올까 싶어 입구부터 틀어막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곧 복’이었으므로 자신이 부러워하는 숙모님의 팔자가 곧 ‘여자의 복’이라 단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부를 하면 복이 온다.’는 말을 비유해 숙모님을 거론했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받들어 모신다.’는 말에 어머니의 뼈아픈 굴욕이 깔려있다는 걸 왜 모르겠는가? 누구에게도 고개를 들지 못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어머니는 딸 하나를 성공시키는데 몸부림을 쳤다고 기억한다. 어머니는 충분히 그랬을 것이다.

“보이소! 우리 딸이 성공했어요! 이 세상 사람들아, 들어보이소. 우리 딸이 성공 했다캉케요.”

그렇게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절규의 목소리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절정의 외침을, 본심을 터트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대상이 나였을까? 나는 사실 어머니의 기대에서 완전히 빠져 나가고 싶었다. ‘어머니의 기대’라는 상자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완벽하게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1959년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물려준 자산

떠나기 전날 밤, 아버지가 불렀다.

“니 에미 등쌀에 널 보내기는 하지만 걱정이 많다. 내가 생각하기에 너는 글씨가 좋지 않아. 글씨 공부 겸, 문장 공부 겸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라. 만약 편지가 마음에 들면 용돈을 매달 올려주마.”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때부터 일기를 쓰시던 분이라 글씨와 문장에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께 물었다. 나에게 처음으로 너무 진지하셔서 나도 처음으로 진지하게 물었다

“아버지는 내가 어떻게 성장했으면 좋겠습니까?”

“아버지는 네가……. 니 친구들이 ‘달자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에요.’라고 한다면 더 바랄게 없다.”

아버지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무섭도록 진지했다고 기억된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을까? 절대로 아니다. 어머니는 늘 ‘약속은 완전 빵점’이라고 말했었다. ‘약속’이란 단어만큼은 아버지가 입에 올려선 안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할머니·할아버지 등 우리 가족에게 약속은 아버지의 단어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께 ‘말만 번지르르하게’라는 표현을 빼놓지 않았다.

“니 애비는 말 하나는 기생 오라버니처럼 말쑥하니라. 행동이 따라야지. 암 그렇고말고.”

어쩌면 아버지는 자신이 지키지 못하는 단어를, 지키려고 노력해도 도저히 안 되는 단어를 딸에게 넘기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아버지가 최초로 나에게 넘긴 자산이었다. 증여라고 해야 할까? 그것이 ‘약속’이었다. 당신에게 약속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희망을 이루고 결단력을 키우는 덕목으로 중요했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의 고민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중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아버지의 일기장을 엿보다 놀란 적이 있다. 아니 큰 충격이었다.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고 집에 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아버지의 일기장은 축축해 있었다.

“나는 오늘도 홀로 울었다.”

이 문장이 일기장마다 흐르고 있었다. 다 가졌는데, 아버지는 다 가졌는데. 돈·명예·가족·친구·여자 다 가졌는데. 홀로 우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보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왜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없을까? 이 세상에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돈, 권력, 예술, 폭력 아니면 지식이나 종교의식일까? 나는 어렸지만 고민했다. 어쩌면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것은 문학 그 중에서도 시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혼자 뜨거워지는 사춘기 때의 일이다. 아마도 문학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아버지는 천생 떠돌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가족이 늘어 붙박이가 된 게 아버지 갈등의 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김삿갓처럼 모자하나 눌러 쓰고 세상을 목적 없이 돌아다녀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아버진 가족을 두고 거기 묶여진 존재가 아니라 훨훨 날아다니는 그런 영혼이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일기장만이 아버지를 이해하는 벗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마음을 받아주는, 말도 안 되는 마음까지 받아주는 벗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쓸 것을 약속했다.

“옥체만강하옵시고”

아마도 어머니는 버스가 출발한 후에도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다. 기도하면서. 버스에 탄 저 딸이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기쁨이기를 소망하면서. 그런데 그 일은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나는 어머니의 말을 주섬주섬 마음에 담기는 했지만 그 말을 숙지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간밤에 잠도 설치지 않았던가? 버스 속에서 곧 잠이 들고, 그러다 잠속에서 두려움이 밀려오고, 다시 잠에 들고, 다시 두렵고. 그렇게 부산에 도착했다.

아, 부산. 처음 발을 내딛는 부산이라는 도시는 고향과 달리 북적거렸다. 어디선가 비릿한 바다 내음이 풍겨오는 듯했다. 처음 느껴지는 냄새였다. 조금 설레었다. 약간의 흥분도 있었다. 나는 하숙집으로 갔다.

나는 어머니의 세 가지 당부보다 아버지의 ‘편지 잘 쓰면 용돈 올려준다.’는 말이 더 다급했고, 만족도가 높았다. 어머니의 말은 막연했고 실제로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고 해야 옳다.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돈 벌고, 그리고 행복하라.’는 것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머니의 말은 서서히 내 마음을 떠났다. 반면 아버지가 준다는 용돈은 현실적으로 내 마음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용돈이 넉넉해야 친구도 사귀고 외로운 부산생활에서 덜 외로운 생활이 되리라는 짐작은 틀리지 않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나는 첫날밤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편지지 가장 위에 ‘부모님 전 상서’라고 쓰고, ‘옥체만강하옵시고’ 어쩌구 그렇게 썼다.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형식이었고, 당연히 아버지는 이런 구식 서간체를 좋아하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 달 용돈은 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전화만 왔다. 나는 혼이 났다. 편지는 그렇게 쓰는 게 아니라 마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아버지답지 않게 큰소리로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울었고, 잠을 설쳤으며, 무섭기도 했다. 그리고 학교를 다니면서 며칠 고민을 했고, 아주 좋은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다.

아버지 말대로라면 마음을 전하는 것이 편지인데, ‘마음전하기’에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궁금해 하는 점, 마음 풀어쓰기, 하숙집 주인과 밥, 학교생활, 부산이라는 도시, 친구와의 관계에 대해, 또 모르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마음의 변화 같은 것 등 아주 사소한 것을 적기 시작했다. 고향과 가족을 떠나게 된 마음의 색깔들도 적었다.

“가족은 떠나오면서 더 가까워졌습니다.”라는 표현을 아버지는 특히 많이 칭찬했다. 용돈은 올라갔다. 그러나 아버지를 완전히 감동시킨 글은 하숙집 아들이 읽다만, 책꽂이에서 무턱대고 뽑아낸 책에서 발췌한 글이었다. 슬쩍 내 말처럼 끼워 넣었다. 나도 왠지 근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베껴 쓴 글은 영국 넬슨제독에 관한 글이었다. 사실 당시는 넬슨제독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넬슨제독은 죽음을 맞이하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겼다.

“오늘 자기의 일을 완성하는 영국인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아버지 저도 오늘 일을 늘 완성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적은 대목에서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고 하셨다. ‘내가 딸 하나는 잘 두었구나.’하시던 아버지의 전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용돈은 다시 올라갔다. 나는 조금씩 오만해졌고, 더 좋은 방법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기막힌 방법 하나를 생각해냈다. 나는 학교 앞 서점에서 산 ‘명언집’이었다.

명언집에는 이 세상에서 살던 사람 그리고 살고 있는 전 세계의 유명한 분들이 한 명언이 수록돼 있었다. ‘야아, 잘 됐다!’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촌 냄새 물씬 풍긴 전학생

우선 내가 훔친 글이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는 내 나이와 내 생활에 밀착된 글이어야 했고, 너무 많은 글을 가져와도 들킬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나는 편지 하나에 두 개쯤 유명인의 글을 가져왔고, 자연스러운 배치를 시작했다. 글 도둑질은 조금씩 늘었다. 점점 능란한 글 도둑이 되어갔다.

지금 기억으로 명언집에는 각 나라의 속담·〈성경〉·〈탈무드〉 외에 톨스토이·스탕달·소크라테스 등 무수한 유명인들의 말이 수록돼 있었다. 세상에 이런 말의 열매들이 있다니. 나는 몇 권의 명언집을 다시 샀고, 나의 편지는 아버지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때로 아버지는 하숙집으로 전화를 걸어 탄복할 만큼 기뻐하시면서 울먹거렸다.

“달자야! 니가 이렇게 글을 잘 쓸 줄 에비가 몰랐다. 애비는 부러울 게 없다.”

그리고 나의 용돈은 점점 더 올랐다. 이달의 용돈이 남았는데 다음 달의 용돈이 오기도 했다. 문인을 꿈꾸던 아버지가 딸의 문학향기에 감동했고, 그 감동은 사실 가짜였다는 것은 아버지만 모르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아버지도 속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점점 더 현란해지는 딸의 편지를 아버지가 왜 몰랐겠는가?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모방을 하면서 창의력도 살쪄간다는 것까지 알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친구들을 데리고 광복동 ‘청탑’이라는 양식집에 가서 멋진 ‘서양 밥’을 사기도 하면서 우쭐거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용돈은 남아돌았고, 친구들도 많았는데 마음이 허전했다. 내일이 막막했다. 이렇게 베끼기에 골몰하고 용돈은 넉넉하지만 이것이 내가 꿈꾸는 미래와 관계가 있는 것인지 고민했다.

학교가 끝나면 홀로 송도·광안리·해운대를 돌면서 막막하게 바다를 보는 일에 집중하기도 했다. 내가 부산에 살고 있다면 바다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지, 보고 또 봐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 강하게 작용한 것은 그럴듯한 폼이었다. 소위 겉멋이라고 해야 할까?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보아야 하지, 그래서 무슨 생각도 없이 피곤하도록 바다를 보면서 걷고 또 걸었다.

머리카락에서 바다냄새가 났다. 손과 발, 목덜미에서도 바다냄새가 났다. 나는 바다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내 모든 몸에는 바다가 출렁거렸고, 더듬으면 바다가 만져졌다.

바다는 물이지만 그것이 미래에 타오를 내 불꽃의 씨앗인지 그때는 몰랐다. 물은 불이 되고 불은 물이 되어 흐르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산으로 빼곡히 둘러선 고향에서 바다까지 온 이유는 무엇인가? 엄마 말대로 공부하러? 돈 벌러? 행복 하러?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에게 밥만 사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내가 그 무엇이 되어야 친구들도 나를 반길 것이다. 고향에서 전학을 왔을 때 2학년 같은 반 친구들은 날 보고 웃었다. ‘촌티가 난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나와 짝을 하려고 하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선생님이 자기 옆에 나를 앉힐까봐 눈치를 보는 듯도 했다. 그때 나와 짝이 되겠다고 손을 들어준 아이가 명자였다. 명자와 바다도 함께 갔었다.

전학 온 날 자리에 앉으니 명자가 이렇게 물었다.

“니 여기 머할라꼬 왔노?”

‘시골에서 학교 다니지 왜 왔느냐?’ 그런 뜻이었다. 그래서 나름 근사하게 대답했다.

“응, 나 바다보려고 왔어.”

교실은 웃음바다로 변했다. 비웃음이었다. 바다는 우리 교실 창문으로도 보였다. 흔한 것이 바다였다. 바다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 그래서 아이들은 나를 비웃었던 것이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너무 흔하게 보는 바다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같이 보이는 것은 산뿐이었던 곳에서 처음 바다를 보는 일이야 말로 바다를 진정으로 보는 것인지 몰랐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웃는 아이들도 별것 아니었다. 우리 고향친구들보다 더 멋지거나 세련되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허리가 잘록했을까? 머리모양이 조금 말끔했을까? 그들은 내게서 촌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촌 냄새’. 지금 생각하면 그처럼 귀한 냄새도 세상에 드물었을 것이다. 그리운 고향냄새. 그래 두고 보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신달자
시인.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첫 시집 〈봉헌문자〉를 비롯해 수필집 〈나이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백치애인〉,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 수많은 작품을 펴냈다. 만해대상 문예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공초 오상순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달진문학상(시부문),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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