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대 도시 서라벌
아시아 최대 사찰 황룡사
세계에 알릴 절호의 기회

경주시 항공사진과 합성한 황룡사 조감도. 〈사진=경주시〉

1300년 전 한반도의 수도는 서울이 아닌 서라벌(현재의 경주)이었다. 당시 서라벌은 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세계 4대 도시(동로마 콘스탄티노플·이슬람 바그다드·중국 장안) 중 하나로, 신라의 왕경(王京)은 한민족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손꼽을 만하다.

그 중심에 황룡사와 9층 목탑이 우뚝 서 있었다. 황룡사는 553년(신라 진흥왕 14년) 창건된 신라 최대의 사찰이지만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골의 침입 때 소실됐다. 643년(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세워진 9층 목탑도 이때 함께 소실됐다.

현재 터만 남은 ‘경주 황룡사지’는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17만호 100만 명 살던 대도시

2014년 정부는 신라왕경과 황룡사를 복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탈리아 로마나 그리스 아테네에 맞먹는 세계적인 유적 도시로 복원하겠다는 야심찬 구상이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대한 훼손 논란으로 잠시 제동이 걸리기도 했지만 2019년 12월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사업에 탄력이 붙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경주시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불탄 황룡사와 9층 목탑 복원사업을 추진할 방침이다. 이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멀지 않은 훗날 우리는 경주를 방문했을 때 높이 80m가 넘는 황룡사 9층 목탑과 함께 불국사의 10배 규모에 달하는 황룡사의 옛 모습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9월 1일 ‘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00’ 주제 영상관에서는 1300년 전 서라벌을 복원한 바 있다. 이 디지털 복원된 영상물은 약 200만 명이 관람했다. 당시에는 ‘서라벌 프로젝트’라고 불렸는데, 신라왕경을 가상현실로 재현한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한국 디지털 복원 역사뿐 만아니라 세계디지털헤리티지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프로젝트였다. ‘서라벌 프로젝트’는 최첨단 기술인 가상현실과 문화유산과의 접합을 시도했던 기념비적 프로젝트다.

‘서라벌 프로젝트’의 영상은 경덕왕 때 신라왕경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당시 신라는 불교문화의 융성이 극에 이를 때였다. 현재 경주는 인구가 10만 명도 안 되는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8세기 당시 서라벌은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고, 집이 17만 호에 달하는 대도시였다. 실크로드의 맨 끝인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중앙에 위치한 이슬람의 바그다드, 중국의 장안은 비단길을 통해 활발히 문물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서라벌은 이슬람이나 로마제국에도 알려져 있었다.

현재 정부와 경주시는 신라왕경 핵심유적 범위를 기존 8대 사업에서 남산일원 복원정비까지 포함해 15대 사업으로 확대했다. 기존 사업이 황룡사지 외에 경주 월성·동궁과 월지·첨성대·대릉원·동부사적·춘양교지와 월성교지였다면, 추가된 사업은 인왕동 사지·천관사지·낭산 일원·사천왕사지·분황사지·구황동 원지 유적·미탄사지 등이다. 이에 따라 예산도 9450억 원에서 1조 53억 원으로 늘어났다. 5년마다 문화재청이 종합계획을 수립하면, 경주시가 연간 시행계획을 수립해 진행하게 된다. 이 중 황룡사 9층 목탑에 대한 사업비는 1300억 원이다.

통일신라 당시 신라왕경 서라벌을 디지털 복원한 모습.

불국사의 8배 규모 황룡사

황룡사는 지난 2007년부터 한국문화유산 복원사업의 대표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 20년 동안 각계각층에서 ‘디지털 복원’을 하자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됐지만, 천문학적인 복원 비용 때문에 진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800년 전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된 황룡사는 현재 초석(礎石)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는 고증을 통해 가상공간에서 디지털 복원을 선행해야할 최적의 소재라고 할 수 있다. 1930년 일본학자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 1899~2002)가 건축학회지인 〈건축잡지(建築雜誌)〉에 황룡사의 복원 평면배치도를 발표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황룡사 복원과 관련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황룡사는 동양 최대 사찰이었다. 경내 면적은 불국사의 8배(3만여 평)로 황룡사 중금당(中金堂)만 따지고 본다면 서울 남대문(南大門)의 6배 규모다. 황룡사는 진흥왕부터 선덕여왕까지 4대에 걸쳐 9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완공된 대사찰이다. 가람배치는 남쪽으로부터 중문·탑·중금당 좌우에 동서금당이 자리 잡았으며, 동·서·남 회랑을 갖춘 1탑 3금당의 독특한 양식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규모는 동서(중문을 포함한 남화랑의 길이) 약 270m 남북 약 110m다.

“층층다리는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수많은 산과 물이 한 눈에 트이네. …… 돌아보니 동쪽 도읍의 많은 집이 벌집과 개미구멍처럼 아련히 보이네.”

고려 명종 때 시인 노봉(老峯) 김극기(金克己)가 황룡사 9층 목탑에 올라 읊은 시다. 높이가 80m를 넘었다는 장대한 목탑의 위용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는 1238년 몽골 침략 당시 불길 속에서 사라진 9층 목탑에 다시 오를 수 있을까? 신라인이 온 힘을 기울여 만든 황룡사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제로온’에서 디지털 복원한 9층 목탑 건립 전의 황룡사.

고증자료 부족, 21세기 식 건립

하지만 황룡사 복원사업은 논란의 한 가운데 있다. 당시 건물 형태나 목탑의 모양, 건축양식 등에 대한 자료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특히 목탑은 뜨거운 감자다. 목탑이 21세기 식으로 ‘중창’ 되어야 한다는 입장과 건축양식을 고증할 길이 없으니 복원이든 중건이든 ‘말살’해야 한다는 견해가 맞서고 있다.

실제 1920년대 후반 후지시마 가이지로가 처음 목탑 복원안을 만든 이래 지금까지 제시된 목탑 복원안은 8개가 넘는다. 이렇게 복원안이 엇갈리다보니 국립중앙박물관·국립경주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천안 독립기념관에 놓여있는 모형도도 제각각의 모습을 하는 등 사실상 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다.

더욱이 황룡사 복원의 하이라이트인 82m 높이의 9층 목탑 복원안은 정도가 더 심해서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즉, 학술적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문화재 복원은 완벽한 증거가 갖춰졌을 때만 시행한다. 이런 상황에서 복원의 근거를 제시하지도 못한 채 건물 복원에 나서는 게 옳은 일일까? 만약 훗날 잘못된 복원이란 게 밝혀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 정부 입장은 ‘완벽한 고증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사료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원형에 집착하기보다 21세기 식으로 황룡사를 건립하는 방향으로 접근하겠다는 것이다. 신라인들이 황룡사 건립에 100여 년 동안 국력을 기울였듯, 복원도 사회 각 분야에서 수십 년간 힘을 합쳐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진행해야 한다. 문제는 석탑과 달리 외세의 침입 때마다 목탑들이 소실되다보니, 황룡사 9층 목탑 복원의 실마리가 될 만한 문화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욱이 9층 목탑만 세운다고 끝나는 일도 아니다. 그 안에 어떤 조각상이 있었는지, 오랑캐가 가져다 바다에 빠뜨렸다는 ‘황룡사대종’은 어떻게 생겼는지 그 누구도 모른다. ‘황룡사대종’은 〈삼국유사〉에 구리 49만 7581근을 사용해 길이 1장 3촌, 두께 9촌 규모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신라 범종 중 최대 규모인 성덕대왕신종의 4배 규모다.

황룡사 9층 목탑의 3D모델링 작업과정.

여러 가지 황룡사 복원안

경주를 대표하는 관광코스는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당시 복원한 불국사는 제대로 복원이 된 사찰이 아니다. 제대로 된 고증이 이뤄지지 않아 연못이 있던 자리는 흙으로 메워져 있고, 규모도 창건 당시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황룡사에 비하면 불국사는 나은 경우다. 황룡사는 육중한 기단과 심초석(心礎石)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그 자리에 세계 최고의 목조건축물이 있었다는 걸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황룡사는 반드시 복원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물 복원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디지털이 항상 과거의 유산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디지털 복원은 언제든지 새로운 이론, 혹은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쉽게 수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실제 황룡사 복원에 나서기 전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수천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한번 건물을 세우고 나면 부수고 다시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실제 황룡사를 짓기 전에 디지털로 구현해 보는 게 중요한 것이다.

황룡사는 지난 70년 동안 축적해온 고증 자료를 기반으로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3D모델링 기술을 통해 디지털로 복원할 수 있다. 황룡사 9층 목탑의 주춧돌의 크기, 배치 상태를 통한 원형 추정, 황룡사의 기와(치미) 크기, 대웅전 규모를 기반으로 황룡사 전체 가람배치의 복원도 가능하다.

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하는 복원 관련 연구는 대체적으로 유력한 지배 학설과 그에 반대되는 학설, 지금까지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받지 못한 방계 연구들이 고루 존재한다. 그러므로 황룡사 9층 목탑을 디지털 복원할 때는 192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90년 동안 축적된 모든 복원안에 대해 고찰해야 한다. 황룡사 가상공간 3D모델링 작업은 현재 학계에서 황룡사 복원 모델로 가장 인정하는 김동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의 황룡사 복원안을 근간으로 제작했다.

이 작업은 유적지 현장 3D스캔 작업과 고증 자료 확보, 3D모델링을 통한 황룡사의 가상디지털 복원, 가상현실(Virtual Reality)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HMD, Head Mounted Display]을 위한 프로그래밍 작업 등 세 가지 단계를 거쳐 진행됐다.

황룡사역사문화관에 복원된 9층 목탑. 〈사진=경주시〉

증강현실 콘텐츠와 복원

황룡사 가상현실 콘텐츠는 VR HMD기술을 응용, 폐허가 된 황룡사 목탑을 디지털로 가상 복원해 유적을 대체(代替) 체험하게 한다. 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아 출입이 불가능한 황룡사와 9층 목탑 내부를 직접 걸어 다니는 것 같은 체험 효과를 제공한다.

아울러 황룡사 같은 고대 건축물을 복원할 때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소요된다. 그리고 복원된 장소에 와야만 건축물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상현실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인터넷에 접속해서 가상체험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 디지털 가상관광(假想觀光, Virtual Travel)의 활용까지도 제시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황룡사 가상현실 디지털 복원 활용의 최종목표는 가상현실 기술을 통해 제한적 접근만 가능했던 문화유산을 보다 자유롭게 체험할 수 있는 플랫폼 확립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로써 전통적인 관광과 상호보완이 가능한 가상문화재체험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 수도 있을 것이다.

VR HMD는 머리 부분에 헤드셋을 장착한 후 가상의 입체화면을 볼 수 있게 하는 장치다. HMD 안에 삽입된 고굴절 렌즈는 좁은 평면 디스플레이를 오목하게 굽어진 파노라마 디스플레이 영상으로 제공한다. 넓은 시야각을 제공해 체험자의 시각적 몰입감을 극대화시켜서 마치 사용자가 현실 공간 속에 빠져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몽골군에 의해 황룡사 9층 목탑이 불타는 현장도 체험할 수 있다.

이렇듯 황룡사 가상현실 콘텐츠는 상호작용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Interface)에 주안점을 두었다. 종래 문화재 체험이 일방적인 영상시청에 치우쳤다면, 가상현실 콘텐츠는 사용자에게 자율성을 부여해 대상 문화재를 능동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한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황룡사 가상현실 작업이후 경주 황룡사지 현장을 대상으로 하는 증강현실 작업을 실시했다. 황룡사의 가람은 크게 남문을 시작으로 중문·중앙금당·동금당·서금당·황룡사 9층 목탑으로 배치되어 있다. 새롭게 선보이게 된 황룡사 중문과 남회랑의 증강현실 디지털 복원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012년부터 진행한 황룡사 복원 심화연구의 결과물이다. 증강현실 작업은 2018년 2월부터 8월 완성한 1차 증강현실 콘텐츠버전을 2019년 8월부터 2020년 7월까지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중문은 2층 규모로 건물의 네 면에 모두 지붕이 있는 우진각 형태와 1층 규모의 맞배지붕 등 두 가지로 구현했고, 남회랑도 중문에 맞춰 두 가지 형태로 만들었다.

옛 황룡사의 모습을 그대로 느껴보도록 하기 위해 태양의 각도에 따른 그림자를 계산했고, 건물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체험하는 것처럼 현장감을 최대한 끌어 올렸다. 이렇게 증강현실 기술로 적용한 황룡사 디지털 복원은 고대 건축유적의 실물 복원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불어넣었다.

디지털 복원을 실시하면 신라왕경과 황룡사가 실제 복원이 되었을 때를 미리 예상해 볼 수 있다. 가상공간에서 실제 건축을 상정한 가상건축은 실제 복원공사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건축적인 시행착오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선(先) 시뮬레이션 효과를 충분히 담당해 줄 수 있을 것이다.

646년 신라 선덕여왕이 세웠던 황룡사 9층 목탑에는 당시 신라를 둘러싸고 있던 아홉 개 나라를 정복하려는 염원이 담겨있었다. 21세기에 다시 세워질 황룡사와 9층 목탑에는 한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1000년 전 ‘문화의 힘’을 세계만방에 과시하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HMD 가상현실을 통해 체험하는 황룡사.

박진호
문화재 디지털복원전문가. 한양대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한 후 동국대 미술사학과에서 석사, 상명대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라벌 왕경·백제 무령왕릉·고구려 고분벽화·바미안 석불·앙코르와트를 디지털 복원했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디지털 석굴암을 전시하는 등 20여 년 간 70개의 디지털 복원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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