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살리는 처방,
초기불교 정신에 담겨있다

미얀마 바간의 사원과 일출.

〈초기불교교단과 계율〉을 쓴 사토 미츠오(佐藤 密雄)는 다이쇼(大正)대학 교수와 학장을 지냈다. 저서로 〈원시불교교단의 연구〉·〈대승경〉·〈율장〉 등이 있다. 이 책을 번역한 김호성 선생은 “평생 초기불교와 계율에 대해 연구한 필자가 방대한 율장의 문헌을 정리하여 불교교단의 성립과 계율 그리고 승가의 구성원으로서 지녀야 할 여러 가지 생활규범에 대하여 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이 책은 비구·비구니 계율과 실제 교단의 운영과 규범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한국불교의 비구·비구니계는 〈사분율〉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남북 율전의 비교 검토를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승가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이 책과 함께 늘 궁금했던 2,60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붓다 이전의 인도

현재의 파키스탄인 인더스강 유역의 모헨조다로(Mohenjodaro)와 하랍파(Harappa)에서 1921년 발굴된 인더스문명은 고도의 문화적 도시생활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며, 그 후에도 발굴 지역은 확대되고 연구도 계속되고 있다. 이 인더스문명은 청동기 문화이며, 기원전 2,000년을 중심으로 약 1,0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코카서스 북방이 원주지로 추정되는 아리아인은 유럽으로 가서 유럽인의 조상이 된 그룹과 이란·인도로 들어오는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이중 후자는 서파키스탄의 초원지대에 정착하고 있다가 한 그룹은 이란으로 향하고, 다른 한 그룹은 인도로 들어왔는데 이들이 인도·아리아인의 조상이다. 그들은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서북 인도로 들어와 인더스강 상류의 판잡(Panjab) 지방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때가 기원전 13세기경으로 추정되며, 여기서 그들은 농경생활을 시작한다.

가부장제를 취하고, 대가족·씨족·부족 단계의 사회조직을 이루었으며, 부족의 장을 ‘왕(Rajan)’이라고 불렀다. 농경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현상에 지배당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해·달·바람·비·천둥 그리고 그것들이 생활이나 일에 미치는 힘 등을 두려워하여 그때그때 가장 힘 있는 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교체하면서 기도하는 종교적 사상이 형성되었다. 그와 같은 신들을 찬양하는 노래 혹은 강력한 파괴의 신을 달래는 찬가가 지어지고 편집되어 베다(Veda)성전(聖典)이 성립하기에 이르렀다.

베다는 리그베다(Rig-Veda), 사마베다(Sama-Veda), 야주르베다(Yajur-Veda),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의 네 가지가 있다. 학자들이 추정하기로 가장 오래된 리그베다에는 아리아인들의 인도 이입 이전에 지어진 찬가도 있으며, 대개 기원전 1,500~1,000년 사이에 성립된 것이라고 한다.

아리아인은 판잡보다 더욱 기름진 땅을 찾아 동남쪽으로 이주하여 갠지스강과 야무나 강의 중간에 있는 평원에 정착했는데, 여기서 촌락을 이루고 살면서 씨족제의 농촌을 성립시켰다. 4대 베다도 이곳에 정주하고 있을 때 편집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이 무렵 사성제가 성립되었다는 점이다. 지금도 인도 근대화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 카스트, 즉 계급의 문제인데, 그 기본적 형태는 네 계급이다. 사성은 사제(司祭)에 속하는 바라문(Brahman), 왕족인 크샤트리아(Ksatriya), 농업·상업 등에 종사하는 바이샤(Vaisya), 노예인 수드라(Sudra)이다. 이중 바라문은 베다를 소유하고, 여러 신을 제사하는 계급이기 때문에 신의(神意) 또는 신력(神力)을 움직여서 인간의 행·불행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바라문·크샤트리아·바이샤 세 계급이 아리아인이며 베다 성전의 백성이다. 제4계급인 수드라는 아리아인이 인도에 침입하였을 때 정복당한 원주민이다. 이들은 베다성전을 듣는 것도 읽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고, 다른 종교적 혜택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처럼 시장에서 사고파는 식의 노예는 아니었다.

갠지스강과 야무나강의 중간지대에서 성립한 바라문 문화는 갠지스강을 따라가다가 갠지스와 야무나의 합류 지점에서 동남쪽으로 확 트인 지대로 내려갔다. 그곳은 갠지스강 중류지대로서 그 후 인도문화사의 중심지가 된 곳이다. 이때가 대략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 사이이며, 바라문의 사상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용감한 크샤트리아들이 이때 나타났다. 이들 중에는 원주민과의 혼혈도 있어서 새로운 민족이 형성되었는데, 그 결과 바라문들이 규정한 신성한 사성계급의 질서 내지는 세계관을 무시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이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불교와 같은 혁신적인 종교사상·종교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삽화=배종훈〉

붓다의 깨달음과 교단 형성

당시의 도시는 붓다가 태어난 석가족이 살던 카필라처럼 소수 귀족에 의한 공화정이었으며, 중소도시를 중심으로 한 소국분립의 형태였다. 이러한 소국들을 합병한 대국이 형성될 무렵 불교승가가 성립된다. 불교교단은 기원전 5세기 후반 무렵 성립하였다.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의 입멸(80세)을 기준으로 하는 최근의 연대론에 따르면, 기원전 383년에 붓다는 입멸했다. 따라서 붓다가 35세에 깨달음을 얻고, 그해에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는 최초의 설법을 행하여 교단을 결성했다고 한다면, 불교 승가의 성립은 기원전 428년이 된다.

붓다 최초의 설법은 성도의 땅 가야(Gaya)에서부터 바라나시(Varanasi)로 북상하여 이루어졌다. 붓다는 그가 고행을 포기했다고 비난하면서 떠난 다섯 비구를 녹야원(鹿野園)에서 만났다. 붓다는 비속한 쾌락과 어리석은 고행을 떠난 ‘중도(中道)’로서 정견·정사·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의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과, 고·집·멸·도의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설했다. 다섯 사람 가운데 먼저 교진여(Kaundinya)가 그 도리를 깨달았다. 그리고 붓다에게 “저는 출가하여 구족계를 얻고자 합니다.”라고 사뢰었다. 붓다는 이를 받아들여 “오라 비구여. 법은 잘 설해졌다. 바르게 고를 멸하기 위해서 범행(梵行)을 행하라.”고 대답했는데 〈율장〉 ‘대품’은 이 “오라 비구여~”가 구족계였다고 한다.

불교 최초의 승가 구성원들은 붓다로부터 직접 수구(受具)를 받았다. 이리하여 붓다의 교단은 모두 61명이 되었다. 붓다는 새로운 가르침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자 각자 다른 방향으로 포교의 길을 떠나게 하고 붓다 자신도 혼자서 우루벨라로 향했다. 붓다는 각자 포교하는 지역에서 원하는 사람에게 직접 수구를 주어도 좋다고 제자들에게 권한을 위임했다. 수구의 방식으로는 지원자가 삭발하고, 의발 등 비구에게 필요한 것을 갖춘 다음, 비구를 향해 꿇어앉아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삼귀의를 세 번 외우도록 했다. 붓다는 비구들에게 “이 삼귀의를 외는 것으로서 출가케 하고 구족계를 주도록 허락한다.”고 했다.

출가자는 옷은 떨어진 것을 주워서 입고, 먹는 것은 걸식과 시여에 의지했다. 원칙적으로 동굴이나 나무 밑을 거처로 삼고, 종교적인 실천 수행은 선정(禪定)과 고행을 주로 했다. 그리고 그들 중 지도자를 ‘사문(Sramana)’이라고 불렀는데, 붓다도 제자들로부터 ‘대사문’이라고 불렸다. 붓다는 입멸 직전까지 전도와 교화를 계속하면서 종교적 활동을 쉬지 않았다. 바라문의 임서자(林棲者)나 유행자(遊行者)와 같이 말년에 가서 고독하게, 남모르게 사라져버리는 죽음의 방식은 불교의 출가자가 지향하는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출가자의 세계에서는 혈통에 의한 계급의 차별이 없었으며 평등했다. 사회적으로 출가자는 바라문과 마찬가지로 존경받았다. 어제까지 왕의 노예였더라도 오늘 출가하면 왕도 예배를 했다.

사리불이 불교로 개종하기 전에 불제자 ‘아설시(Asvajit)’를 만났을 때 물었다.

“그대의 모든 감각기관은 맑고 피부색은 빛난다. 그대는 누구를 의지하여 출가했는가? 누구를 스승으로 삼고 있는가? 누구의 법을 즐기는가?”

아설시는 대답했다.

“석가족에서 출가한 대사문 석가세존에 의하여 출가했다. 그 세존을 스승으로 삼고 있다. 그 세존의 법을 즐기고 있다.”

이 문답은 하나의 정형구가 되어 출가자들 사이에 처음 만나면 나누게 되었던 것이라고 〈율장〉에 전한다.

붓다는 승가를 이루어가면서 고향을 방문했는데, 이때 출가하기 전에 낳은 아들 라훌라를 비롯한 거의 모든 일족을 출가·입단하게 했다. 또한 석가족 부녀자들의 원(願)으로 여성을 위한 비구니 승가를 성립하고 입단을 인정한다. 여기에 양모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나 출가하기 전의 아내인 야소다라를 포함한 많은 석가족 여성들이 출가하게 된다.

〈삽화=배종훈〉

사의법이 현대인에 주는 교훈

석가족의 나라는 망했으나, 출가하여 붓다의 승가에 들어가면 그가 어느 부족 출신이든 모두 ‘석가족의 아들’(釋子, Sakyaputra)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후대에 출가해 불교교단에 입단할 때 법명 혹은 계명을 부여받는 것 역시 석가족의 아들이라는 의미에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석가족의 왕국은 지금도 영원한 ‘법(Dharma)의 왕국’으로서 세계적 규모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승가에 들어와서 비구가 되는 자에게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사의법(四依法)을 설해주도록 되어 있다.

1. 출가자는 걸식으로 살아가며, 목숨을 마칠 때까지 이에 힘써야 한다. 승차식(僧次食)·별청식(別請食)·청식(請食)·행주식(行籌食)·십오일식(十五日食)·월초일식(月初日食)등의 예외는 인정된다.

2. 출가자는 분소의(糞掃衣)에 의지하여 살아가며, 목숨을 마칠 때까지 이에 힘써야 한다. 아마의(亞麻衣)·면의(綿衣)·야잠의(野蠶衣)·갈의(褐衣)·저의(紵衣) 등의 예외는 인정된다.

3. 출가자는 수하좌(樹下坐)에 의하여 살아가며, 목숨을 마칠 때까지 이에 힘써야 한다. 정사(精舍)·평복옥(平覆屋)·전루(殿樓)·누방(樓房)·땅굴 등의 예외는 인정된다.

4. 출가자는 진기약(陳棄藥)에 의해서 살아가며, 목숨을 마칠 때까지 이에 힘써야 한다. 숙소(熟蘇)·생소(生蘇)·유(油)·밀(蜜)·당(糖) 등의 예외는 인정된다.

초기 승가에서는 이 사의법이 지켜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칙에 어긋난 예외조항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원칙대로 지켜졌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식생활은 걸식에 의지했다. 인도의 일반 사회인들은 출가자에게 음식 등을 희사하는 행위는 내세에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는 원인이 된다고 믿었다. ‘분소의’는 다 쓰고 버린 헝겊조각을 주워 만든 의복을 말한다. ‘수하좌’는 나무 밑이나 바위에서 잠자고, 좌선하는 것으로 집 안에 눕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진기약’이란 소의 오줌을 끓인 것으로 매우 쓰며 복통 등에 약이 된다.

붓다 당시 사람들은 법을 듣고 신자가 되었으며, 진지하게 불도에 정진하는 비구의 승가생활이 있었을 뿐이다. 눈은 땅으로 향하고 우아하게 걸으며 위의(威儀)를 갖춰 걸식을 행하는 비구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믿음을 일으켰다. 예배하는 신자 앞에 의연히 서기 위해서는 격렬하고도 엄격한 수도를 통한 자신(自信)이 필요했다. 소수의 나쁜 비구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마치 바다가 시체를 떠밀어내고 오물을 정화하는 것처럼 승가는 모든 것을 정화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지금 무서운 신호를 보내고 있다. 빙산이 급속도로 녹아가고 기상이변이 빈발한다. 현대 문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서유럽에서 속수무책의 물 폭탄이 쏟아져 1,0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초현실적이다. 필자는 지구를 살리기 위한 최선의 처방이 이 책[불교] 안에 있다고 본다. 불교에 담긴 채식과 검소·절약·자연보호의 정신이 지구 재앙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다. 특히 붓다 당시의 초기불교는 그런 정신의 총화였다. 21세기의 현대인이 초기 불교정신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자효 ― 시인. KBS 유럽총국장·SBS 이사·한국방송기자클럽회장을 역임했다. 시집 〈신라행〉·〈세한도〉·시집소개서 〈잠들지 못한 밤에 시를 읽었습니다〉·번역서 〈이사도라 나의 사랑 나의 예술〉을 펴냈다. 공초문학상·유심작품상·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사)구상선생기념사업회장, 지용회장을 맡고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