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 년 전 금관가야
그 찬란함 숨 쉬는
다문화 화합의 길

김해 수로왕릉 입구.

‘철의 나라’로 불렸던 금관가야는 기름진 평야에서 생산한 쌀과 질 좋은 철을 기반으로 성장해 초기 가야연맹을 주도했다. 금관가야의 중심지는 현재의 김해시다. 시가지를 관통하는 해반천 일대에서 금관가야와 관련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현대에 들어 김해시는 우리나라의 산업화 흐름에 따라 점차 공업도시로 변모했다. 특히 1980년대에 대규모 공단이 들어서면서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많아졌고, 결혼 등의 이유로 정착하는 인구도 늘었다. 김해시는 이주민들이 정착해 원주민과 잘 어우러지도록 다양한 정책을 마련, 지원했다.

김해는 가야문화와 다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으로, 시에서는 두 문화의 특색을 모두 느낄 수 있 는 다양한 도보 여행길을 조성했다. 그중 가야사 누리길은 △김해 수로왕릉 △대성동고분박물관 △구지봉 △수로왕비릉 △김해읍성 북문 △종로길 등을 모두 둘러볼 수 있는 5km 코스다.

한반도 최초 국제 결혼한 왕

龜何龜何 首其現也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 구지가(龜旨歌)

서기 42년 변한 지역을 다스리던 아홉 명의 우두머리 구간(九干)과 백성들이 언덕에 올라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췄다. 그러자 하늘에서 6개의 알이 담긴 황금상자가 내려왔는데, 가장 먼저 알을 깨고 나온 ‘수로(首露)’가 금관가야를 다스렸다. 〈삼국유사〉 ‘기이(紀異)편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하는 김수로왕(首露王, ?~199)의 탄강설화(誕降說話)다.

탄강설화의 배경인 구지봉은 부산-김해 경전철의 박물관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해있다. 박물관역 2번 출구로 나와 해반천을 건너면 넓은 광장에 우뚝 서있는 ‘김해 시민의 종’을 볼 수 있다. 2009년 11월 가야 토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시민의 종은 금관가야의 문화·전통을 계승하고, 김해시민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고자 조성했다. 조성 당시 김해시민 3만 2,600여 명이 24억 4,000여만 원의 성금을 모금, 기탁했다. 종각 1층 전시실에서 모금에 참여한 시민들의 명패를 볼 수 있다. 2층에 설치된 종은 무게 21톤, 높이 3.78m에 달하며, 김수로왕의 탄강설화가 양각돼 있다.

‘김해 시민의 종’의 모습.

시민의 종 뒤편의 구봉초등학교를 지나면 국립김해박물관이 나온다. 1998년 7월 29일 개관했는데, 해반천 일대에서 출토된 가야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금관가야는 질 좋은 철을 중국·왜(일본) 등과 교역했고, 한때 신라를 위협할 정도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을 통해 당시 융성했던 가야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박물관 야외마당 옆으로 난 오르막길을 오르면 바닥에 ‘가야사 누리길’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눈에 띤다. 표지석을 따라 오르면 탄강설화의 배경지인 구지봉의 정상이 나온다. 구릉의 모양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해 ‘구수봉’, ‘구봉’ 등으로도 불렸다. 언덕 한쪽에는 기반식고인돌(남방식고인돌 또는 바둑판식고인돌)이 있는데, 덮개돌에 ‘구지봉석(龜旨峯石)’이라고 적혀있다. ‘한석봉’으로 잘 알려진 조선 중기의 서예가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구지봉 언덕의 산책길은 수로왕의 왕비이자 김해 허 씨의 시조인 허황옥(許黃玉, ?~188)의 능역(陵域)과 이어진다. 수로왕비릉은 둘레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원형봉토분이다. 능역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몇 가지 건물과 파사석탑(婆娑石塔) 보호각이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서기 48년 가락국에 건너온 허황옥은 자신을 ‘아요디아 왕국의 공주’라고 소개했고, 도착한 직후 수로왕과 결혼한다. 한반도 최초의 국제결혼인 셈이다. 허황옥의 출신지인 아요디아 왕국은 인도 갠지스강 인근에 위치했던 아유타국(阿踰陀國)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최근까지 여러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허 왕후가 가야국에 도착하기 20여 년 전인 서기 20년경 아요디아 왕가는 쿠샨 왕조에 의해 왕도를 잃고 중국 사천성 안악현으로 이주해 허 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파사석탑은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허황옥은 가락국으로 올 때, 아유타국의 태자이자 승려인 ‘장유화상(허보옥)’과 함께 왔다고 전한다. 사찰 기록에 따르면 장유화상은 지금의 김해 장유동에 ‘장유사(長遊寺)’라는 절을 창건하고, 불교를 전파했다.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384) 재위 시절인 372년에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전해졌다는 기록과 비교할 때, 가야에 불교가 전파된 시기는 이보다 300년가량 앞섰다. 장유사에는 가락국 8대왕인 질지왕(銍知王, ?~492)이 세운 ‘장유화상사리탑’이 남아있으며, 수로왕 부부의 아들들과 관련된 ‘지리산 칠불사 설화’도 전하고 있다.

수로왕비릉에서 바라본 파사석탑 보호각. 능역 뒤로 김해 시가지가 보인다.

수로왕비릉에서 나와 수로왕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과거에는 수로왕비릉과 수로왕릉이 연결돼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중간 부분을 뚫어 도로를 내고 건물을 지었다. 5~10분 정도 걸으니 기다란 담장이 보인다. 금관가야와 김해 김 씨의 시조인 수로왕이 잠든 곳이다. 능역에는 △숭선전 △안향각 △전사청 △제기고 등 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건물이 세워져 있다.

액운을 막는다는 홍살문을 지나면, 낮은 담벼락 너머로 수로왕릉과 동물석상 등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저술한 〈지봉유설〉에 따르면 수로왕릉은 임진왜란 당시 도굴당하는 수모를 겪었는데, 내부에 순장(殉葬)의 흔적이 발견됐다. 가야와 관련된 작은 기록들을 바탕으로 과거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베일에 가려진 가야의 문화와 그 시대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샘솟는다.

김해 수로왕릉의 모습. 원형봉토분 앞에 동물 석상들이 줄지어 서있다.

수로왕릉 옆에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만남’을 주제로 조성된 테마공원 ‘수릉원’이 있다. 공원 곳곳에서 시민들이 무더위를 피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무향 가득한 수릉원의 이곳저곳을 천천히 걷다보면 더위도 한풀 가시는 느낌이다.

원도심에서 만난 불교문화

수릉원에서 김해향교를 지나 조금 걸으면 김해시에서 불법홍포(佛法弘布)에 앞장서고 있는 천태종 해성사가 나온다. 해성사는 1972년 12월에 신도회를 창립했고, 1973년 3월 김선이 불자가 부지를 시주해 1974년 4월에 회관건립 기공식을 봉행했다. 이때부터 해성사는 김해 불자들을 위한 청정도량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는 등의 큰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현재 신도들이 더 쾌적한 환경에서 수행에 전념하도록 새 불교회관을 건립 중이다. 2017년 12월에 불교회관 기공식을, 2020년 8월에 상량식을 진행했다. 재탄생할 도량과 해성사의 활약이 기대된다.

해성사에서 동상시장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촘촘하게 쌓은 석벽이 보이는데, 김해읍성 북문이다. 〈김해읍지(金海邑誌)〉에 따르면 김해읍성은 세종 16년(1434년)에 석성으로 축조됐고, 해동문·해서문·진남문·공진문 등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읍성철거정책으로 사대문을 모두 철거했는데, 김해시가 〈세종실록〉과 ‘김해부내지도’ 등을 바탕으로 공진문을 복원해 지금의 모습이 됐다.

김해읍성 북문의 모습. 김해시가 〈세종실록〉과 ‘김해부내지도’ 등을 바탕으로 복원했다.

김해읍성 북문에서 동상시장 방향으로 골목을 따라 내려가면 작은 정원처럼 보이는 연화사 일주문이 보인다. 연화사는 가야시대에는 호계사(虎溪寺)가, 조선시대에는 객사의 후원이 있던 자리다. 파사석탑도 원래 이곳에 있었는데, 1873년에 당시 김해부사였던 정현석(鄭顯奭, 1817~1899)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일주문을 지나면 왼편으로 옹기종기 놓인 작은 불상과 비석들 뒤로 ‘연화사 칠층 진신사리탑’이 보인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 중 3과를 봉안한 탑이다. 탑 옆에는 ‘가락고도궁허(駕洛古都宮墟)’라고 쓰인 비석 1기가 놓여있는데, 연화사가 과거 금관가야의 중궁이 있던 자리임을 알려준다.

연화사 칠층 진신사리탑의 모습.

연화사 대웅전은 작은 인공연못 위에 세워져 있어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은은히 들려오는 목탁소리를 들으며 그 아래 연못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함허정’이 있던 자리다. 함허정 맞은편에는 연자루(燕子樓)가 있었는데, 지금은 연자루의 기둥을 받치던 주춧돌만 남아있다. 연자루에서 바라본 김해시의 전경이 몹시 아름다워 김해에 방문한 사람들은 반드시 들렀다고 한다.

연화사 대웅전 맞은편에는 동상시장과 연결된 문이 있다. 그 옆에는 ‘김해읍 포교당 신도유공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 뒷면에 연화사의 연혁이 적혀있는데, 연화사의 전신은 일제강점기 때 세워진 김해불교포교당이다. 안타깝게도 1970년 11월 15일 화재로 소실됐다. 이후 1975년에 김한수(한일합섬 회장)·김택수(前 대한체육회장) 형제가 절을 다시 세워 김해 지역사회에 환원해 오늘날의 모습이 갖췄다.

다르지만 같은 우리

비석 옆에 있는 문을 빠져나오자 동상시장의 명물인 칼국수 타운이 나온다. 칸막이로 나뉜 작은 좌판을 지나자 구수한 냄새가 난다. 칼국수 타운에서 시장 내부로 들어오면 양옆으로 늘어선 매대와 다양한 상품이 보인다. 동상시장은 1945년경 형성됐는데, 지금은 150여 개 점포가 입점해 있다. 일반적인 전통시장과 달리 외국인을 위한 다국적 상품도 판매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김해 동상시장의 모습. 코로나19로 방문객이 많이 줄었다.

동상시장 옆에는 ‘종로길’이라고 불리는 외국인 글로벌타운이 있다. 여러 나라의 언어로 쓰인 간판이 곳곳에 걸려 있다. 외국인들을 위한 식재료점과 식당 등이 운집해 있어 ‘김해의 이태원’으로도 불린다. 필자가 방문한 날에는 코로나19 거리두기 4단계 여파로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평상시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오간다고 했다.

전통적인 농업도시였던 김해에는 1980년대 초 안동공단이 세워졌고, 부산·창원 등의 공장이 이전하기 시작했다. 이는 부산시의 지가 상승과 김해시의 적극적인 ‘공업장려정책’이 맞물린 결과다. 1995년 이후 김해시에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노동력을 보충할 이주노동자가 대거 유입됐고, 이 무렵부터 김해에서 외국인의 거주가 뚜렷하게 확인됐다.(전형남, ‘이주노동자 유입으로 인한 상업지역의 변화-김해시 구도심 지역을 사례로’, 2015)

‘김해의 이태원’이라 불리는 외국인 글로벌타운의 입구.

통계청의 지역통계 행정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2019년 12월 기준 김해시의 다문화가정(국제결혼을 한 부부와 그 자녀로 이루어진 가정)과 외국인 가구는 총 1만 406가구로 전체 가구의 4.8%를 차지한다. 김해시는 이주민의 원활한 정착을 돕고자 외국인을 위한 한글교실·다문화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다. 아울러 문화다양성 인식 확산을 위해 ‘무지개다리사업’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 중이다.

2년 6개월 전 결혼해 김해에 정착한 호주 출신의 케니(Keny) 씨(남, 38)는 “한국은 생활전반이 편리하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강좌나 다문화 프로그램 덕분에 무난하게 적응하고 있다.”면서도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외국인 커뮤니티 운영이 중단됐고,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이나 기회가 적어져 아쉬움이 크다. 하루빨리 다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운영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동상시장을 지나 경전철 수로왕릉역 방향으로 걸으면 회현동 행정복지센터가 나온다. 몇 달 전까지 이곳은 마루길·혜윰길·다솜길 등의 벽화거리가 조성돼 있었다. 김해시는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세월의 흔적이 쌓인 담벼락들을 11종의 벽화와 12종의 설치미술로 꾸몄다. 하지만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봉황동 유적정비 사업’ 대상에 포함되면서 대부분의 벽화와 조형물들은 철거된 상태였다.

회현동 입구에 세워진 노상용 작가의 ‘황세와 여의낭자’ 조형물.

이 밖에도 김해 가야사 누리길에는 △봉황동유적지 △김해민속박물관 △류공정(柳公井) △사충단 등 볼거리가 가득하다. 대체로 경사가 완만하고 길이 잘 정비돼 있어 천천히 둘러보기에 좋다. 가야사 누리길을 천천히 걷다보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김해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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