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와 연기와 자비로
현대 정치를 질타하다

불교의 나라 미얀마에서 일어난 군부 쿠데타와 뒤이은 민중시위는 정치에 대한 불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미얀마 만달레이 인근의 식당 앞에 걸린 아웅 산 수치와 그녀의 아버지 아웅 산 장군의 사진.

불교의 나라 미얀마가 아비지옥이 되어가고 있다. 미얀마의 국부 아웅 산(Aung San, 1915~1947)의 딸인 아웅 산 수치가 이끄는 국민민주연맹(NLD)이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전체 의석의 62.4%를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자 지난 2월 1일 미얀마군 최고사령관인 민 아웅 흘라잉(Min Aung Hlaing) 대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이에 항거하는 민중시위가 일어나자 군부는 이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자국민을 향한 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8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오자 민주 세력은 소수민족들과 손을 잡고 무장항쟁에 나서 미얀마는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미얀마의 민주체제는 허약했다. 1947년 2월 12일, 소수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영국과 팡롱협정(Panglong Agreement)을 맺어 자치공화국으로 독립했으나 네 윈(Ne Win, 1911~2002) 장군이 이끄는 군부가 1962년 3월 2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1988년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위가 일어났으나 3,000여 명이 사살되고 만여 명이 실종되는 유혈 진압으로 끝났다. 이 결과 네 윈이 실각하고 1990년에 자유총선이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군부 세력이 패했지만 군부는 선거를 무효화하고, 승려들을 필두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했다. 그리고 2015년 총선에서 민주화 세력이 승리해 집권했으나 불과 5년 만에 다시 무너지고 만 것이다. 무려 53년의 군부통치 이후 민주화의 기운을 잠시 맛본 미얀마인들이 현재 목숨으로 항거하고 있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력은 쿠데타를 저지하고자 하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와 중국이 군부를 엄호해 국제사회의 개입도 여의치 않다. 경건한 불교의 나라 미얀마가 어쩌다 이런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가? 도대체 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와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불교의 나라 미얀마와 유혈사태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앉아 있을 때 지나가던 미얀마 상인 형제 따뿌사(Tapussa)와 발리까(Bhallika)가 꿀을 바른 빵을 정성스레 공양했다. 공양 받은 대가로 줄 것이 없었던 석가모니는 자신의 머리카락 여덟 가닥을 뽑아 건넸다. 상인 형제는 고국으로 돌아와 머리카락을 임금에게 바쳤는데, 임금이 그 중 두 가닥을 봉안해 언덕에 묻고 쌓았다는 탑이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이다.

이후 쉐다곤 파고다는 미얀마인들의 정신적 고향이 되어 끊임없이 금과 진귀한 보석으로 장엄되고 있다. 그 장엄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니 2,500년 동안 지어지고 있는 건물이라고 하겠다. 오늘날 쉐다곤 파고다는 5,448개의 다이아몬드와 2,317개의 루비·사파이어·에메랄드 그리고 개수로는 2만 1,000개, 무게로는 60톤의 금판으로 치장돼 있다. 미얀마는 가난한 나라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인가? 그것은 ‘세상의 모든 보석으로도 한 번 진리를 전함만 못하다.’는 사무치는 사모의 마음 때문이다. 이토록 종교적인 미얀마인들이 겪고 있는 처참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삽화=배종훈>

나의 이 고민에 대한 해답을 방영준 성신여자대학교 명예교수의 최근 저서 〈붓다의 정치철학 탐구〉에서 찾아보았다. 인도와 네팔 접경 고대 카필라왕국의 태자였던 싯다르타는 왕이 될 운명이었다. 그는 타고난 명민함으로 전륜성왕의 길을 갈 수 있었다. 경전에서 전하는 젊은 싯다르타의 빼어난 지혜와 깊은 사색 그리고 단련된 육신은 모국을 강대국으로 만들 수 있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런 길이 카필라국의 입장에서는 훨씬 바람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버리고 스스로 수도자의 길로 나섰다.

신분제도가 지금보다도 훨씬 엄격했던 당시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수행자 싯다르타를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경전 이곳저곳에서 읽을 수 있다. 왕과 장자들도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큰 보시를 했다. 거기에는 분명 카필라국의 태자라는 후광도 있었을 것이다.

“붓다도 전륜성왕의 꿈을 꾼 적이 있다. 이에 관한 잡아함 〈작왕경(作王經)〉의 내용을 소개한다.

히말라야 부근 오두막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선정에 들어 이런 생각을 잠시 했다. ‘내가 왕이 되어 남을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는 일도 없고, 남의 것을 빼앗거나 빼앗김을 당하는 일도 없고, 남을 슬프게 할 일도 없고 스스로 슬플 일도 없도록 한결같이 법대로 행하고 법이 아닌 것은 행하지 않는 통치를 하면 어떨까?’ 붓다가 이런 생각을 하자 악마가 기뻐하며 유혹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사람의 욕심을 다 채우기 어렵다며 그 유혹을 뿌리쳤다.

이 경전의 내용은 민주적인 정의공동체를 구현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붓다는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더 근원적인 처방을 찾으신 것이리라. 붓다의 민주적인 정의공동체에 관한 관심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칠불쇠법(七不衰法)이다. 또한 가난과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이 왕과 국가가 할 가장 중요한 임무라는 것을 여러 왕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정치권력의 타락과 통치자의 위험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국가와 통치자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연기론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다. 연기법은 실체와 현상이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역동적인 복잡계로 보고 있다. 붓다가 꿈꾼 전륜성왕의 권위와 존엄은 민주적인 정의공동체를 구현하는 정법정치에서 나온다 하겠다.”(p186∼p187)

붓다가 생전에 가장 비통해한 것은 모국 카필라국의 멸망이었다.

“붓다는 코살라국의 위두다바 왕자가 샤카족을 멸족시키기 위해 행군하는 길목에 서서 세 번이나 일종의 1인 시위를 하면서 위두다바 왕자를 설득했다. 그러나 네 번째에는 샤카족이 지은 악업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개입하지 않았다. 샤카족의 멸망에 비통해하는 붓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붓다는 머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이런 사례를 든 것은 민족주의는 혈연의 관계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만큼 원초적이고 통합력이 강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혈연은 대개 실제적 혈연이 아니고 상징적이고 조작된 혈연이 많다. 그냥 같은 혈연이고 민족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정치 엘리트들은 이를 이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도 한다.”(p150)

중도와 정의의 정치

방 교수는 ‘불교가 지향하는 민족주의는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민족주의의 길’이라고 규정한다.

붓다 재세 시 중인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인 마가다국의 아자따삿뚜왕은 작지만 강한 부족국가 밧지국을 침략하고자 했다. 그는 전쟁에 앞서 대신 우사를 기원정사에 보내 부처님께 의견을 구한다.

“밧지국을 공격하고 싶은데 우리가 이기겠습니까?”

붓다는 직답을 하는 대신 옆에 있는 아난에게 오히려 질문한다.

“아난아, 밧지국 사람들이 자주 모여 의논하여 정사를 결정한다고 들었느냐?”

아난이 답한다.

“예, 부처님, 그렇게 들었습니다.”

“아난아, 그렇다면 그 나라는 날이 갈수록 왕성하여 오래도록 안온할 것이니 빼앗거나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질문을 비롯해 붓다가 던진 일곱 가지 질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유명한 ‘칠불쇠법’이다. 이 칠불쇠법을 현대적 의미와 용어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자주 소통하고 공감하고 있는가?
- 공직자들이 서로 화합하여 국민을 섬기는가?
- 모든 사람이 법과 규칙을 지키고 예를 따르는가?
-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과 어른을 대접하는가?
- 조상을 숭배하고 바람직한 전통문화를 보존·계승하는가?
- 가정이 행복하고 가정 윤리가 제대로 준수되는가?
- 윤리와 정신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은가?

<삽화=배종훈>

붓다는 질문을 마치고 왕사성에 흩어져 있던 제자들을 불러 이와 결이 비슷한 유형의 질문을 던져 불교공동체가 쇠퇴하지 않을 일곱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그리고 제자들과 작별하고 80노구를 이끌어 쿠시나가라까지 열반의 여정을 떠난다. 이렇게 만들어진 칠불쇠법은 붓다에게서 민주주의 근간인 공화주의자의 체취를 강하게 느끼게 한다.

“공화주의는 개인의 사적 권리보다는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덕을 강조한다. 또한 시민들이 덕을 가지고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 과정에서 공공선에 대한 헌신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공화주의는 민주주의가 일련의 절차적, 제도적 장치만으로는 제대로 작동하고 발전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적극적 시민으로서 정치에 대한 참여와 선출된 공직자의 시민에 대한 사회적, 도덕적 책임성의 윤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경쟁의 논리에 비중을 둔다면 공화주의는 참여의 윤리를 중요하게 내세운다.”(p133∼135)

“사회주의와 불교의 관계는 어떠한가? 불교는 연기법으로 모든 존재를 똑같이 소중하게 여기면서 차이를 존중하는 매우 높은 수준의 평등관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자유는 추상성이 높은 반면에 평등은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체감하기 쉽다. 부자유보다는 불평등이 더욱 사람을 분노케 만든다. 그리고 사회주의와 불교를 친화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그런데 그 사회주의가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인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중도의 이념을 지닌 불교는 자본주의에 대해 그렇듯 마르크스주의적 경제모델에 대해서도 양가적(兩價的) 입장을 취한다고 생각된다. 불교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는 자유와 창발성(創發性)에 바탕을 둔 열려 있는 경제체제인 동시에 인간의 소유욕과 탐욕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체제라고 본다. 마르크스주의 경제체제는 필수적인 재화와 평등 그리고 분배에 초점을 맞추며, 탐욕과 착취를 비난하는 인본주의적인 측면이 있다. 반면에 부정적인 측면은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쓰며 증오와 갈등을 조장하면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키고, 인간의 자발성과 창발성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사회생태론적인 경제이론과 실천이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슈마허(E.F. Shumacher)의 ‘불교 경제학’, 북친(M. Bookchin)의 ‘시장경제인가 아니면 도덕경제인가’가 대표적인 이론이고, 스리랑카의 ‘사르보다야 쉬라마다나’ 운동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이러한 운동을 일부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자주 공동체를 구현하여 생태 친화적 도덕경제를 실천하고자 하는 아나키즘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p145∼p146)

“붓다의 연기법을 적용한 정치는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일까? 만약 붓다가 전륜성왕이 되었다면 어떤 정치를 펼쳤을까? 아마도 ‘중정정치’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럼 중정정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미를 찾기 전에 ‘중정(中正)’이란 용어부터 살펴보자. 필자가 중정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중도(中道)와 정의(正義)의 결합어로 사용한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오래전부터 중정정치라는 용어에 매력을 느꼈고, 나름대로 중정정치로 표현할 수 있는 자료나 예를 찾고자 관심을 가져 왔다. 그러다가 미국의 에릭 리우(Erich Liu)와 닉 하나우어(Nick Hanauer)가 공저한 〈민주주의 정원(The Garden of Democracy)〉에서 중정정치의 틀을 발견했다.

모든 존재는 연기적이다. 연기적 존재는 공동체적이다. 바로 중생이다. 중생은 이미 공동체의 존재로서 공동체적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 바로 이것이 정원형 지성이고 중정정치가 구현할 핵심 가치라고 생각한다.”(p99∼p102)

여기에서 나는 이 책을 읽는 계기가 된 미얀마 사태로 돌아가야 하겠다. 미얀마의 한 수녀가 완전무장한 채 시위대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군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쏘지 말아줄 것을 간구하는 사진이 세계 언론에 보도됐다. 이 사진은 현대에 종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한다.

미얀마 사태가 수습 불능의 사태까지 치닫게 된 것은 정치인의 무소신, 무책임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다. 아웅 산 수치는 군부 독재에 항거한 미얀마 민주화의 아이콘이었다. 민중 희생의 피 위에서 건설된 그녀의 정부는 소수민족 로힝야족을 학살했다. 군부의 잔인한 인종 청소 행위를 그녀는 방관 내지 동조했다. 세계의 여론은 들끓었고 그녀에게 수여됐던 노벨평화상을 반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아웅 산 수치는 이것으로 사실상 죽었다. 군부가 쿠데타를 감행한 이유 중의 하나에 과거와는 달라진 국제사회에서의 그녀의 영향력도 있지 않았을까? 사람은 자신이 지켜야 할 원칙을 잃었을 때 힘도 잃는다.

불교의 나라 미얀마가 늦었지만 중정의 정신에서 사태 수습에 나서주기를 기구한다. 여기에 국제사회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할 것이다.

유자효
시인. KBS 유럽총국장·SBS 이사·한국방송기자클럽회장을 역임했다. 시집 〈신라행〉·〈세한도〉·시집소개서 〈잠들지 못한 밤에 시를 읽었습니다〉·번역서 〈이사도라 나의 사랑 나의 예술〉을 펴냈다. 공초문학상·유심작품상·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사)구상선생기념사업회장, 지용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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