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향한 자비심
수행 원동력 삼아야 함을
십대제자에 일깨워줘

유마거사 문병은 누가 감당할까?
[부처님의 10대 제자-2]

• 무대 - 인도 바이샬리 성

• 주요 등장인물 - 부처님, 유마거사, 사리불을 비롯한 부처님의 십대제자.

• 주요 전개과정
사리불이 유마거사 문병을 할 수 없다고 물러서자, 부처님께서는 마하 목건련과 수보리 등 나머지 10대 제자에게 차례로 유마거사 문병을 부촉한다. 그러나 모두 그 소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물러서면서 유마거사와 법담(法談)을 하다가 꺾인 이야기를 상세하게 아뢴다.

지혜제일이라는 사리불이 물러났습니다. 유마거사 문병 사절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를 구구절절이 대면서요. 그다음 진행이 어떻게 되었는지 대략 아시지요? 부처님께서 성문(聲聞)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십대 제자에게 차례로 부촉을 합니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뵙고 문병을 하거라.”

그러나 십대 제자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말합니다.

“저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 연유를 아뢰지요. 그 과정에서 유마거사의 입을 통해 대승의 관점에서 보는 소승의 문제점들이 드러납니다. 앞서 사리불의 이야기를 통해 소승의 선정(禪定)에 대한 비판이 나왔지요? 무척 중요한 이야기이기에 좀 자세히 풀어 봤습니다. 그 탓에 좀 딱딱하고 어려운 이야기가 된 듯합니다.

유마거사의 질책

그런데 어쩌지요? 이번 회에 나머지 십대 제자의 이야기를 요약하려 하는데요. 정말 제 깜냥으로는 힘든 이야기라서, 제 눈에 보이는 중요한 요점만 잡아 풀어보려 합니다. 우선 각 제자가 어떤 때 어떤 내용으로 유마거사에게 질책을 당하거나 가르침을 받는지 간단히 정리해 보고 그 의미를 새겨보도록 하지요.

신통(神通)제일 마하목건련 : (설법 중) 법(法)이란 언어를 넘어섰고 마음과 의식을 넘어섰다. 표현할 길이 없고,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다. 이런 근본에 입각해야만 하며, 모든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재하게 방편을 세워 말해야 한다.

두타(頭陀)제일 마하가섭 : (걸식 중) 삿됨을 버리지 않고 해탈에 들어야 하며,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서 번뇌에서 벗어나지도 않아야 한다. 생사에 머물지 않으면서 열반에 머물지도 않아야 한다. 음식을 베푸는 사람들은 어떤 과보도 받지 않으며 이익도 없고 손해도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해공(解空)제일 수보리 : (걸식 중) 음식의 평등성으로 일체 만법의 평등성에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일체 부처님의 평등성에 들어가야 한다. 무명을 극복하지 않고도 해탈을 이루어야 한다. 그대에게 음식을 보시한 이들은 여전히 삼악도에 떨어지고, 온갖 마구니와 손을 잡고 모든 번뇌를 벗으로 삼으며, 궁극의 열반에 들어가지 않는다.

설법(說法)제일 부루나 : (설법 중) 대중의 지향과 근기를 잘 살펴서 설법해야 한다. 소승을 이야기해선 안 되고 오직 대승을 이야기해야 한다.

논의(論議)제일 마하가전연 : (분별하여 가르치는 중)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의미를 생멸하고 분별하는 마음으로 이야기해선 안 된다. 대승적인 실상법의 견지에서 이야기해야 한다.

천안(天眼)제일 아나율 : (범천왕에게 자신의 천안을 설명하는 중) 진정한 천안의 의미는 적정을 버리지 않으면서 모든 세상을 본다.

지계(持戒)제일 우바리 : (계율을 범한 비구들을 이끄는 중) 일체중생이 본디 청정함과 모든 법의 성품이 무상하고 비어있음을 바로 아는 것이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다.

밀행(密行)제일 라후라 : (출가의 공덕과 의미를 설하는 중)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켜 올바른 행을 부지런히 닦는 것이 출가이다.

다문(多聞)제일 아난다 : (병이 드신 부처님을 위해 우유를 탁발하던 중) 여래의 몸에는 본디 병이 없다.

대개의 경우 제자들은 유마거사에게 힐난을 당한 후 깜짝 놀라거나 어찌 응대할지 모르고 쩔쩔매게 됩니다. 그리고 유마거사의 명쾌한 가르침에 주위에 있던 많은 이들이 큰 깨달음을 얻지요. 수보리의 경우는 유마거사의 힐난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걸식을 하던 발우(밥그릇)까지 버려두고 탁발하던 집을 나오려 합니다. 요즈음의 표현으로 하면 된통 당한다고나 할까요?

이렇게 십대제자들을 꾸짖기까지 하는 유마거사가 매우 거만할 것 같은데 스님들에 대한 예의를 철저히 갖춘다는 것 또한 의미가 있습니다. 현장법사 번역의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에는 유마거사가 십대제자를 뵐 때 스님의 발에 절하는 예를 갖추었다고 분명하게 나옵니다. 법에 대한 논의의 당당함과 출가자들에 대한 예경을 다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어서 필자는 매우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다만 구마라집 삼장의 번역에는 그 표현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좀 생략과 의역에 과감한 구마라집 삼장의 성향이 반영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저본이 되는 경전 자체가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소승의 법에 대한 견해 부정

아무튼 이런 십대제자의 이야기 가운데 공통되면서도 중요한 이야기를 몇 개 뽑아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가장 중요하게 드러난 건 사리불에게 말했던 대승 수행의 근본적인 틀과 일치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생사에 머물지 않으면서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가섭)

‘무명을 극복하지 않고도 해탈을 이루어야 한다.’(수보리)

출세간과 세간을 아우르는 것, 그 틀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삶의 현장을 버리지 않으면서 궁극적인 해탈을 지향하는 것, 그것이 바로 대승의 지향이라는 것을 드러내주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런 대승적인 지향에 입각해야 함을 여러 곳에서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대승적인 지향의 가장 중요한 입장은 모든 법은 말을 넘어서 있으며, 말로 표현된 가르침은 방편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세계를 설명하는 가르침의 틀, 그것을 보통 법(法)이라고 부릅니다. 소승에서는 이 말로 표현된 진리에 세상의 참모습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다고 봅니다.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하는 법이 정말 있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대승의 출발점은 그러한 소승의 법에 대한 견해를 철저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잘 아시는 〈반야심경〉을 예로 들어볼까요?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여기서 공(空)이라는 것은 참모습[實相]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의 참모습을 말하면 이러하다.’는 표현이 되기 때문에 ‘공’이라는 것이 있고, 그 속에는 이러한 것들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다는 것은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정말 눈도 귀도 없다는 말인가요? 그렇게 읽으시면 정말 부처님의 뜻과는 십만팔천리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정하는 것은 육근(六根)·12처(處)·18계(界)·12연기·사성제와 같은 소승의 법체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승에서 말하는 법의 체계가 문자 그대로의 진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들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소중한 방편이긴 하지만 문자 그대로 진리일 수는 없고, 중생의 근기와 설법 당시의 상황에 맞게 설해진 방편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뗏목의 비유’라고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바로 그 말입니다. “법이란 언어를 넘어섰고 마음과 의식을 넘어섰다.”(목건련)는 것은 바로 문자로 표현된 가르침이 참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여러 제자에게 “대승을 설해야 한다.”, “중생의 근기를 살펴서 설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대승불교의 방편설을 강조한 것이겠지요.

약간 충격적이라 할 수 있는 표현들도 눈에 띄지요? “음식을 베푸는 사람들은 어떤 과보도 받지 않으며 이익도 없고 손해도 없다.”(가섭), “그대에게 음식을 보시한 이들은 여전히 삼악도에 떨어진다.”(수보리)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린 행위에 어떤 공덕도 없고, 심지어는 삼악도에 떨어진다니요? 좀 상식 밖의 이야기 아닌가요? 부처님을 비롯한 스님들은 ‘복전’(福田)이라고 불리지 않습니까? 그분들에 대한 공양이나 보시가 복덕을 쌓는다는 말이거든요.

부처님을 대하는 두 가지 견해

이건 좀 어려운 대목입니다만 아마도 당시 스님들의 계급의식, 우월의식을 깨뜨리는 방편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승불교가 일어난 배경에는 출가자 중심의 불교, 대중의 일상적 삶을 소외시킨 불교의 모습이 있다는 말씀을 이미 해드렸습니다. 그런 불교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사람 위에 스님 있다.”라는 관념이 나오게 됩니다. 대중의 삶은 하찮고 열등한 것이고, 출가자들의 삶은 뛰어나고 청정한 것이다. 그러니 대중은 이번 생에서의 수행은 포기하고 출가자들에게 보시·공양을 해 복을 쌓아 내생에 출가해 수행할 수밖에 없다. 대개 이런 사고가 깔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과연 그런가요? 혹시 그 말이 맞지 않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분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정말 큰일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불교에서 소외를 당하지요. 그리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불법 수행을 내생으로 미루면, 그 미룬 것이 버릇이 되어 내생에 또 미루게 될 겁니다. 그리고 “나는 재가자이다.”라는 생각을 마음에 새기게 되면 내생에도 역시 재가자가 될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출가와 재가라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사고방식을 깨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바로 그런 정신을 드러낸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켜 올바른 행을 부지런히 닦는 것이 출가이다.”(라후라)라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서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출가’라는 말이니, 출가의 외적인 형식에 매달리지 말고 출가의 본질에 발을 디디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비슷한 논리의 반복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면 가닥이 잡힙니다. 교향곡 같은 것을 들어보면 동일한 주제 선율이 약간의 변화된 선율로 계속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런 느낌입니다. “적정을 버리지 않으면서 모든 세상을 본다.”(아나율)든가, “모든 법의 성품이 비었음을 바로 아는 것이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다.”(우바리)는 말도 앞의 이야기들과 비교하면서 살펴보면 대략 어떤 이야기인지 느낌이 올 겁니다.

마지막으로 아난의 경우에는 “부처님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드러나는 대목이라 흥미롭습니다. 소승불교에서 부처님과 아라한은 크게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들어오면서 신앙의 대상으로 부처님의 위상이 크게 높아지게 됩니다. 법신·보신·화신의 개념이 정립되면서 아승지겁의 수행을 거쳐 위대한 성취를 이룬 지고한 분으로 묘사됩니다. 보살의 개념과 연결되면서 아라한과는 전혀 다른 위상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불교 역사에 대한 지식을 배경으로 한다면, 과연 지금 우리는 부처님을 어떤 분으로 봐야 할까요? 아득한 신앙의 대상으로, 대우주에 충만하시고, 대광명을 나투시며, 모든 중생의 어버이신 부처님으로 보는 관점이 있겠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와 다름없이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먹고 싸고 아팠던 그런 존재라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불교의 특징이면서 장점은 이 두 관점이 단절된 양극단으로 있지 않고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우리와 같은 존재이면서 궁극을 성취한 이, 그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들은 역사 속에 한 인간으로 살아가신 부처님의 모습을 잘 살피면서, 그분의 궁극적인 모습에 대한 신앙을 갖는 일을 병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난존자의 경우, 병이 드신 부처님을 위해 우유를 탁발하는데 유마거사는 궁극의 부처님을 말하면서 “육신으로 화현하신 부처님에 매달려 그 궁극적인 모습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난은 혼란에 빠집니다. 그때 허공에서 알려주는 소리가 들립니다.

“참된 부처의 몸에는 병이 없지만 이 세상에 출현해 있는 동안에는 병이 보이는 것이다. 우유 얻는 것을 부끄러워 말라!”

평생 부처님을 가장 가까이 모시면서 부처님의 인간적인 모습에 가장 친숙한 아난존자, 그에게 부처님의 참모습을 설파하는 유마거사, 다시 부처님이 병을 앓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드러내주는 허공의 소리. 이 삼박자의 조화가 얼마나 절묘합니까? 얼마나 멋있습니까? 〈유마경〉은 이런 경전입니다.

자, 그런데요. 여기서 한번 물음을 던져보겠습니다. 더 진행하다보면 기회가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 대승불교 하는데 과연 그렇게 따질 필요가 있는가? 그냥 열심히 수행해 깨달으면 결과는 다 같지 않은가?” 이렇게 물을 수 있지 않을까요? 대승불교라는 것이 꼭 나올 이유가 있느냐는 물음일 수도 있지요. 이런 물음은 예수님이나 공자님이나 부처님이나 결국 궁극적 가르침에서는 동일한 가르침을 주신 게 아니냐는 물음과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렇게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냥 깨닫기만 하면 결과는 똑같다?’ 그건 원인과 결과를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생각이지요. 완전히 개인의 평안만을 위해 수행한 것이나, 중생을 향한 무한한 자비심을 원동력으로 한 수행이나 결과가 같다면 말이 안 되지요. 그러니까 올바른 지향으로 올바른 방편에 의하여 올바르게 수행하는 것만이 올바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대승의 가르침에 확고하게 발을 디디고, 부처가 되는 보살의 길을 불퇴전의 걸음으로 걸어가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도 소중합니다. 어느 스승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르네요.

“대승의 범부가 될지언정 소승의 성과(聖果)를 탐하지 말라!”

성태용
전 건국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한학자 양성 장학생’으로 선발돼 故임창순 선생에게 한학을 배웠다. EBS에서 ‘주역과 21세기’라는 제목으로 강의했으며, 한국철학회 회장과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주역과 21세기〉·〈어른의 서유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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