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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미아동 자비의 집 정태수 씨[특집] 밥그릇에 담긴 불심
정태수 어르신이 자비의집 무료급식소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께 합장 인사를 하고 있다.

“3일을 굶고 찾아가 받은 
따뜻한 밥상, 잊을 수 없죠.”


서울시 강북구 미아동에 위치한 ‘자비의 집’(원장 정수스님)은 16년 째 운영 중인 무료급식소다. 10월 21일 점심 무렵, 100여 명에 가까운 지역 어르신들이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자비의 집에서 먹는 점심한 끼 식사가 하루의 첫 식사이자, 유일한 식사다. 주로 70~80대 어르신들이 찾아오는데, 몇몇 분은 밥을 많이 배식 받아서 비닐봉지에 담아가기도 한다.

출생의 비밀 알고 난후 방황

정태수(66, 가명) 어르신은 자비의 집을 찾는 어르신들 중에는 조금 젊은 층에 속한다. 몸도 비교적 다부진 편이지만, 다리가 불편하다. 그는 2년 전인 2017년부터 자비의 집을 이용하고 있다. 대구가 고향인 그에겐 어떤 사연이 있을까?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대구에서 꽤나 잘 살았어요. 아버지가 소위 말하는 ‘물장사’를 했거든요. 그래서 어릴 때는 동네 친구와 형님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지냈던 걸로 기억해요. 다리는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소아마비에 걸려서 이렇게 절뚝거리게 됐죠. 그래도 아버지가 하체운동을 많이 시켜준 덕분에심하게 절지는 않아요.”

정 어르신은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국민학교(현 초등학교〉4학년 때 우연히 자신이 아버지ㆍ어머니로 알고 있던 분들이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버지로 불렀던 분은 실제 큰아버지였고, 친부는 작은아버지 였다.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한다. 다만, 큰아버지 내외에게 자식이 없었고, 친부는 본부인을 버리고 재혼을 하려던 차에 자신의 아들을 형님에게 보내버렸다. 그 과정에서 그의 친모가 기생이었고, 친부와 함께 살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11살 어린 아이에게 이런 사실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길로 아버지라고 부르던 큰아버지의 서랍에서 현금 만 원을 훔쳐, 친모를 찾기 위해 상경했다.

그가 친모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 이름 석자와 미아리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1966년경 낯선 서울에서 11살 아이가 이름밖에 모르는 친모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했고, 2년 후 다시 대구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대구에서는 할머니 집에서 살게 됐는데, 중학교에 진학을 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불만이 주변 사람에 대한 불만으로 표출되던 사춘기 소년에게 학교생활은 쉽지 않았다.

“대구 계성중학교에 입학을 했어요. 그런데 이 학교가 기독교계열 학교여서 주기도문 같은 걸 외우게 했어요. 2학년 때인데, 선생님이 주기도문을 못 외운다고 점수를 깎는다고 했어요. 그 문제가 발단이 돼 결국은 학교를 그만둬 버렸죠. 그 다음에는 불교종립학교인 능인중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당시 능인중학교는 소위 문제아라고 불리는 학생들이 많이 다녔어요. 어느 날 같은 학교 학생과 시비가 붙어 싸웠는데, 상대방이 많이 다쳐 결국 퇴학을 당했죠.”

중학교를 퇴학당한 때가 10대 중반, 그는 평소 어울리던 동네 형들을 따라 다니기 시작했다. 큰아버지가 운영하던 술집에서 일을 했던 형들이다. 반항기 넘치는 나이에 퇴학까지 당하다보니, 그들과 어울리면서 여러 가지 사고를 쳤다. 그 과정에서 소년원과 교도소를 몇 차례 들락거리게 됐다. 그곳에서 생활할때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자비의집 무료급식소는 매주 월~토요일 운영되며, 8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하루 100여 명의 이용자에게 점심식사를 대접하고 있다.

그는 원래 ‘종교는 아편’이라고 생각했다. 교도소에 복역할 때는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났는데, 그 중에는 성직자도 몇 명 있었다. 대부분 지저분한 사고를 저지르고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스님들은 없었다. 오히려 교정ㆍ교화를 위해 교도소를 찾아오는 스님 중에는 자신의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재소자들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분도 있었다. 그 분들을 보면서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청담 스님이 쓴 책을 자주 읽었다.

교도소에서 출소를 했을 때에는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할머니는 이미 오래전 돌아가셨고, 다른 가족들도 소식이 끊겨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거기다 어릴 때부터 좋지 않았던 무릎이 복역 중에 안 좋아지게 됐다. 성치 않은 몸,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힌 그가 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다시 상경을 선택했다.

“종로에서 17년 정도 살았습니다. 그때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돈도 조금 모았어요. 하지만 젊을 때 알고 지낸 형들과 동생들을 보살피느라 다 써버렸죠. 그렇다고 내가 도와줬던 사람들한테 찾아가 이번에는 나를 도와달라고 말하기 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더군요. 나이가 들어 돈 벌이는 할 수 없는데, 다리 상태는 점점 안 좋아지고……. 다행히 동사무소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해주더군요. 그 지원금으로 작은 고시원에서 살고 있어요.”

동사무소통해 ‘자비의 집’ 알게 돼

자비의 집도 동사무소 직원의 소개로 알게 됐다. 당시에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기 전인데, 어렵게 사는 정 어르신을 본 직원이 괜찮은 무료급식소가 있다고 추천을 해줬다. 하지만 처음에는 자존심 때문에 그곳을 찾아가지 않았다. 3일을 꼬박 굶고 나서야 자존심을 접고 급식소를 찾아갔다. 원장 정수 스님은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흔쾌히 무료급식을 허락해줬다.

자비의집 원장 정수 스님과 무료급식소 전경.

“자비의 집은 원래 나이가 든 독거어르신이나 기초수급자를 대상으로 운영하는 곳이에요. 그런데 당시 저는 나이도 65세가 안 됐고, 수급자도 아니었어요. 원장 스님이 배려해준 덕분에 밥을 먹을 수 있게 됐죠. 처음에는다 저보다 나이 많은 어르신만 있어서 적응하기가 힘들었어요. 지금은 제가 밥 먹으러 안오면, 다음 날 만났을 때 ‘어제는 왜 안 왔냐?’고 안부도 물어봐주시고, 반찬이랑 밥도 덜어주면서 절 챙겨주기도 하지요.”

생활이 궁핍하다보니 가끔은 나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면 자비의 집 원장 스님과 봉사자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죽기 전에 이 분들에게 받은 은혜를다 갚을 수 없을 것 같아 미안하기만 하다. 보통 사람들은 밥 한 끼의 소중함을 잘 알지 못한다. 그건 배가 고파보지 않은 사람들의 배부른 소리다. 또 항상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일 없지?”하고 물어주는 안부의 고마움을 모른다.

정태수 어르신에게 무료급식소 자비의 집은 단순히 밥 한 끼를 해결하는 장소가 아니라 가족 같은 보금자리다.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걱정해주는 이웃을 만나고,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그의 생활에 유일한 즐거움이다. 그런 이웃들이 나이를 이기지 못해 한사람씩 소식이 끊어지는 걸 지켜볼 때는 안쓰러움과 함께 인생의 부질없음을 새삼 느끼곤한다.

정태수 어르신은 오늘도 자비의 집에서 따뜻하고, 든든한 점심식사를 마친 뒤 법당에 계신 부처님께 합장 인사를 올리고 고시원을 향한다. 길가를 뒹구는 낙엽 사이로 절뚝거리 며 걸어가는 그는 내일도 이 길을 되돌아 자비의 집을 찾아올 것이다. 엄마가 차려주는 듯 한 따뜻한 밥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에.

미아동 자비의 집은?

1993년 9월 문을 연 자비의 집은 현재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돼 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100여 명의 독거 어르신 및 장애인들에게 무료로 점심을 제공하고 있으며, 소년소녀가정 등에 반찬배달도 하고 있다. 현재 원장 정수 스님을 비롯한 8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활동하고 있으며, 후원자들의 십시일반 후원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무료급식소 이용을 희망하는 사람은 상담을 통해  이용할 수 있다.

후원계좌(예금주ㅣ자비의집)

기업은행 005-087161-01-016
국민은행 006001-04-282872
후원문의 02-945-4200

조용주 기자  smcomn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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