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편지를(268호)

배롱나무 분홍 꽃 지는 초가을입니다. 깊은 산골 산장에서 처음으로 선생님께 긴 편지를 씁니다. 이국에 사는 친구와 하룻밤을 보내러 왔습니다. 친구는 산장 풍경이 제 어릴 적 외가와 닮았다고 합니다. 옛 기억을 떠올리기 좋은 곳입니다.

제게 고등학교 3년은 생애 중 가장 슬프고 아팠던 시절입니다. 중학생 때까지 전 누구보다 밝은 소녀였지요. 하지만 여고생이 된 삼월 어느 날 찾아온 둘째 남동생의 사고. 화창한 토요일 낮에 만난 동생은, 먼 세상의 사람이 되어 더 이상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습니다. 갑자기 맞이한 피붙이의 부재는 거대한 사건이었습니다. 혼란스러운 사춘기의 방황과 함께, 내일의 희망을 깡그리 뭉개버렸지요. 울기만 했던 시간들.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아도 눈물이 났었습니다.

그래도 학교는 가야했지요. 시험을 떠나 좋아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방과 후 특별활동 시간. 시반과 산문반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는 산문글로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국어공부를 가장 재밌게 했던 저였습니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시를 알고 싶어서 시반에 들어갔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긴 글로 풀어내기엔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릅니다. 검은 뿔테 안경을 낀 총각선생님. 첫 수업에 선생님은 ‘이구철’이란 당신의 존함을 297로 기억하라고 하셨지요. 처음 읽게 된 시는 정지용의 〈유리창2〉 이었습니다. 칠판에 시 전문을 적으시고 2학년 선배에게 낭독을 시키셨지요. 지독한 상실에 빠져 있던 제게, 죽음에 관한 시가 주는 위안은 그 어떤 위로보다도 크게 다가왔습니다. 한 편의 짧은 시가 주는 영혼의 울림을 생애 처음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그 수업 후 떠난 동생을 위해 처음 쓴 시는 시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시라면 죽음의 무게를 덜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시 잡지와 시집들을 탐독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만난 김수영 시인과 김영태 시인은 제 시 세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지요.

스물일곱에 저에게 시인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왔고, 몇 권의 시집과 여행산문집도 내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의 지표를 바꾸게 된 이른 이별과 시의 세계. 평생을 글쟁이로 살게 한 것은 선생님과의 각별한 인연이었습니다. 졸업 후의 짧았던 만남에서도 선생님은 계속 시를 쓰라고 하셨지요.

어느덧 선생님께선 교장 직을 끝으로 올해 2월 퇴직하시고, 서울 근교에 살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못난 제자의 뒤늦은 연락에도 반갑게 맞아주셨지요. 여행산문집 북콘서트에 오신 선생님. 평생을 교육자로 지내 오신 오랜만에 만난 선생님. 마라톤으로 다져진 건강한 모습은 그때 그 여고시절의 선생님 그대로셨습니다. 문학의 세계로 물꼬를 터주신 선생님 덕분에, 글쟁이로 업을 쌓게 되어 마냥 좋습니다.

초가을 골짜기의 저녁은 풀벌레 소리와 깊어갑니다. 고즈넉한 산장에서 학창시절을 호명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선생님의 제자여서 행복합니다. 선생님만을 위한 여유로운 시간 만드시면서 나날이 푸르시길 소원합니다.

가을은 모든 것이 충만한 계절이지요. 서울로 돌아가면, 못 챙겨드렸던 졸시집 들고 맑은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97선생님.

김길녀

강원도 삼척 출생. 1990년 〈시와 비평〉 등단. 시집 〈푸른 징조〉 등. 여행산문집 〈시인이 만난 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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