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편지를(268호)

웅이.

참 오랜만에 자네를 불러보네.

이제 거의 60년. 학생이 채워지지 않아 없어진 부산 동광초등학교 교정을 생각하네. 자네와 난 단짝이었지. 쉬는 시간이면 우린 늘 함께 있었어. 6학년 가을, 변치 말자고 복도 모퉁이에 서서 맹세하기도 했지. 우리는 그곳을 우정의 장소로 명명했었어.

중학교 진학을 할 때, 우리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가까운 경남중학교를 많이 지원했는데, 자네는 집에서 가까운 부산중학교를 간다는 거야. 자네와 떨어지기 싫었던 나는 자네 따라 우리 집에서는 먼 부산중학교를 지원했었지. 그런데 막상 자네는 입시에서 실패하고 따라간 나는 되었으니 그때의 당혹감이란…….

먼 곳의 학교를 다녀야하는 나를 걱정해 아버지는 중학교 1학년을 학교에서 가까운 외가에서 다니게 하셨지. 그러나 나는 학교가 파하면 자네 집으로 달려가곤 했었어. 외아들이었던 자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걱정 많으신 할머니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으며 어머니랑 세 식구가 살고 있었지. 자네는 고등학교를 서울로 가고, 나는 자넬 따라 대학을 서울로 갔어. 자네 하숙집은 나의 놀이터였지. 배우를 꿈꾸던 자네는 왠지 도전을 그만 두고 귀향해 안동의 처녀에게 장가를 갔어. 그때 내가 결혼식 사회를 봤었지.

방송기자 생활을 시작한 나는 점차 자네와 소원해졌어. 바쁜 게 핑계였지. 그러다가 어느 날 충격적인 소릴 들었어. 자네 어머니께서 자네 몰래 집을 처분하고 종적을 감추셨다는 거야. 그 어지시던 어머니께서. 고부 갈등 소리도 들렸어. 그 이후 자네는 친구들의 안테나에서 사라졌고, 고생을 많이 한다는 풍문만 들려왔었지.

파리 특파원 근무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나는 자네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경찰에 자네에 대한 정보를 주고 찾아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자네와 나이와 이름이 같은 세 사람을 주더군. 자네는 부산의 어느 새마을운동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어. 전화를 했더니 서울에 교육받으러 갔다는 거야. 나는 당장 새마을운동본부로 달려갔지. 수십 년 만에 자네를 본 그때의 감격이란…….

부산 출장 때 자네 집을 찾아갔었지. 오랜만에 본 자네 부인은 고생의 흔적은 느껴졌으나 예나 다름없이 스스럼없으시더군.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두었다 했지. 마침 그때 딸의 애인이 인사를 온다고 해서 예비사위까지 함께 보았지. 자네 딸은 참 예쁘더군. 하긴 자네가 미남 아닌가? 나는 자네 집까지 알았으니 이제 헤어질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어느 날 자네에게 전화하니 연락이 안 되는 거야. 직장도 그만 두고, 부산 친구들에게 수소문했더니 이사를 가고 종적이 묘연하다는 거야. 가까스로 찾았는데 또 사라진 거야.

자넨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어. 초등학교 때부터 어리숙한 나보다 성숙했었지. 형님 같았어. 그래서 친구들에게서 사라지고 싶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나는 자네가 보고 싶어.

웅이, 우리 이제 칠순. 가까웠던 친구들 가운데 이미 유명을 달리한 이도 있어. 그래도 우린 죽기 전에 보아야 하지 않겠어?

어젯밤 잠들 때만 해도 더웠었는데, 새벽에 깨자 문득 한기를 느껴 옷을 찾아 입고 자네에게 편지를 쓰네. 나는 무심한 사람이었어. 용서하게. 수구초심(首丘初心). 내 최초의 친구여.

유자효

1947년 부산 출생. KBS 파리 특파원. SBS 이사. 한국방송기자클럽 회장 역임. 신작시집 〈아직〉, 동시화집 〈스마트 아기〉, 빛나는 시 100인선 〈어디일까요〉, 시집 해설서 〈시 읽어주는 남자〉, 산문집 〈나는 희망을 보았다〉 등 출간. 지용회장, 구상선생기념사업회장, ‘시와시학’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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