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의 눈(270호)

한국은 스포츠 강국이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한 차례 10위권 바깥으로 밀려난 것을 제외하면,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부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줄곧 10위권 이내의 성적을 유지해 왔다. 스포츠외교 분야에서도 한국은 강세를 펼쳐왔다. 1988년 서울하계올림픽과 2002년 FIFA월드컵,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이어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개최하게 됨으로써 ‘트리플 크라운’(Triple Crown) 달성을 넘어 세계 4대 메가 스포츠 이벤트를 모두 개최한 ‘그랜드 슬램’(Grand Slam) 달성 국가가 되었다. 이제 스포츠는 개인의 신체활동을 넘어 기업과 국가의 활동을 통해 지구적 단위에서 한국사회의 일상을 조형하는 문화적 요인으로 자리 잡았다.

1911년 평양 선천 등지로 원정 경기에 나선 황성 YMCA야구단. 사진 앞줄 맨 오른쪽이 1905년 한국 YMCA의 초대총무를 맡았던 미국인 질레트 선교사다.(사진=연합뉴스)

한국 스포츠 발전사와 개신교

한국의 스포츠 발전사는 개신교 선교의 역사와 분리할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근대 체육종목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3년 결성된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활동을 통해 국내에 소개됐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설립되어 전 세계적인 조직으로 확산된 세계기독교청년회(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이하 YMCA) 운동과 연계된 지역조직으로, 일제강점기 사회문화 활동의 중요한 거점을 형성해 왔다.

1905년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P. L. Gillett)에 의해 야구가 한국에 최초로 소개된 이래 축구 · 배구 · 농구 · 테니스 · 골프 등 구기종목이 YMCA의 활동을 통해 소개되었다. 또한 300보 경주, 600보 경주, 대포알던지기, 높이뛰기 등 근대 육상종목 역시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해 전달되었다. 뿐만 아니라 개신교 선교활동은 체육단체들의 결성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906년 한국 최초의 근대 체육친목단체인 대한체육구락부가 결성되었고, 대동체육구락부(大同體育俱樂部, 1908), 대한흥학회운동부(大韓興學會運動部, 1909), 체조연구회(1909) 등이 창설되는 과정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기여함으로써, 한국의 근대 체육 발전의 토대를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요컨대 한국의 스포츠의 발전은 근대화 과정과 겹치고, 근대화 과정은 개신교의 발전 과정과 분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스포츠 · 근대화 · 개신교는 한 몸을 이루며 성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을 통해 근대 스포츠가 세계 각지에 소개되기 이전에도 다양한 형태의 놀이는 존재했다. 그러나 스포츠는 놀이를 특정한 방식으로 규격화하여 승부를 겨루는 체계로 정형화한다. 스포츠는 신체의 작동방식을 표준화된 규율에 따라 분할하고, 공정한 원칙에 따라 경쟁하도록 함으로써 승부를 위해 자기의 몸과 정신을 특정한 방식으로 단련하도록 계도(啓導)하는 서양 근대정신의 문화적 장치다.

그러므로 스포츠 활동을 익힌다는 것은, 단지 특정한 종목에 대한 신체활동의 기술을 학습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체가 그러한 방식으로 작동되도록 통제하는 어떠한 규율체계를 습득한다는 걸 의미한다. 즉, 자유로운 신체활동을 엄격한 규칙에 따른 특정한 조건들에 종속시킴으로써 육체가 지닌 충동과 욕망을 조율하고, 근대적 생산방식에 적합한 신체로 주체를 재탄생시키는 문화적 장치로서 스포츠가 활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스포츠와 근대화, 그리고 개신교 선교가 한국에서 접점을 이루는 대목이다.

영화 ‘YMCA야구단’ 포스터.

스포츠 선교 역사의 명과 암

한국에서 개신교인이 된다는 것은 놀이에 적합한 몸에서 근대적 생산체계에 적합한, 일하고 경쟁하는 몸으로의 탈바꿈을 의미했다. 또한 개신교인이 된다는 것은 근대성의 한계 내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바람직한’ 욕망의 체계를 신체와 정신에 각인시킨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스포츠의 전파를 통해 복음을 전하겠다는 생각은 근대정신의 습득을 기독교 복음의 정신과 동일시하는 한에서는 일면 타당한 논리이다. 좋은 개신교인은 좋은 근대인이고, 좋은 근대인은 건강한(일할 수 있는) 신체를 지닌 사람이라는 근대의식의 전형적 도식이 여기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와 근대성, 그리고 스포츠를 통한 신체의 조형을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보는 관점은 개신교 안팎에서 적지 않은 비판에 직면해 왔다. 서양 근대 기독교가 유럽의 식민주의적 지배의 문화적 첨병 역할을 해왔다는 익숙한 비판으로부터,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자기계발 담론 비판에 이르기까지, 개신교와 근대성 그리고 몸의 규율에 관한 담론은 한국 근대성의 형성에 관한 비판적 논의에 있어 핵심적 위치를 차지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의 스포츠 선교 담론은 여전히 YMCA 활동을 모델로 한 서양 근대 선교사들의 궤적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교육과 의료, 체육활동의 전파 등 서양 선교사들의 계몽주의적 선교 활동을 통해 근대화를 이룬 경험이 개신교 공동체 안에서 세대를 거듭해 오는 가운데 하나의 원형으로 자리 잡아 이후 모든 선교적 실천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신교 선교가 한 세기를 훌쩍 넘긴 오늘날 개신교인들은 근대 계몽주의 선교가 가져온 폐해에 대한 반성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근대 개신교 선교가 유럽과 북미의 정치 · 경제 · 군사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비서구세계를 향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인 문화적 지배행위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다. 근대적 발전과 번영의 결과를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에 앞서, 영광의 행렬에 동참할 수 없었던 이들의 아픔을 보듬으며, 그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우선적 과제라는 점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스포츠 기사의 가십거리가 되고 있는 개신교 선수들의 세리머니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경기에 나가는 것을 두고 ‘출전(出戰)’이라 표현하고, 경기 결과를 두고 ‘몇 승(勝)의 전적(戰績)을 거두었다’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스포츠는 대리전의 성격을 지닌다. 경기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전쟁의 승패에 비유된다. 그러므로 고도의 긴장감을 가지고 승부에 임하는 선수가 득점의 순간에 세리머니를 펼치는 것은, 억압해 왔던 욕망을 일순간에 펼치는 자연스러운 행위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승리를 거둔 선수들이 공적 대중 앞에서 자신이 믿는 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행위 내지는 포교의 목적을 가지고 세리머니를 하는 경우다. 국가대표 경기의 경우 긴장감이 높아지는 만큼 세리머니의 파급 효과도 크다. 그러나 다종교사회 대중의 이목과 공적(公的) 관심이 집중된 장소에서, 국가로부터 특정한 재정적 지원과 혜택을 받는 가운데 차별 없는 공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 기대되는 스포츠 선수가, 개인의 종교적 신념을 표출함으로써 다수를 불편한 상황에 처하게 만드는 현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것은 스포츠 경기라는 ‘상품’을 구매하는 타인의 평등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동시에,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을 종교에 따른 사적 이해로 환원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헌법상 정교분리의 원칙에 위배되는 행동으로 볼 여지도 있다.

2011년 10월 수원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 예선, 한국과 아랍에미리트(UAE) 경기에서 박주영 선수가 후반 선취골을 넣은 뒤 기도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세리머니와 기독교 근본정신

이러한 법적 논의를 떠나 승리의 순간에 하나님에게 감사를 표하는 행위가 과연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정신에 부합하는 것인지에 대한 신학적 숙고가 필요하다. 〈신약성서〉의 곳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군인으로 부름 받은 이의 삶에 비유한다. 개신교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에서도 전쟁을 연상시키는 낱말들(장수, 갑주, 군병, 접전, 승리, 승전고 등)을 자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의 그리스도인을 군인으로 비유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전쟁에 빗댄 것은 폭력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경쟁을 내면화하라는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오히려 평화를 굳게 붙들라는 요청이다. 로마 황제의 무력(武力)으로 얻어낸 로마의 평화(Pax Romana)에 대항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무력(無力)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하는 참 평화(Pax Christi)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굳게 지켜나가는 삶을 살아가라는 신앙적 권면인 것이다.

그것은 승리의 영광을 신에게 돌리는 스포츠 세리머니와는 정반대의 삶의 길을 신자들에게 이정표로 제시한다. 예수의 평화를 위한 군인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이 이긴다는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경쟁을 통한 승리가 아니라, 기꺼이 지는 마음이야말로 평화의 참된 토대라는 역설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구분해서 말하자면, 스포츠 선수들의 승리 세러머니는 그리스도교가 지향해야 할 '예수의 평화' 보다는 '로마의 평화' 정신에 부합하는 의례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역도선수 장미란은 개신교 신자다. 2009년 11월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 역도경기장에서 열린 2009세계역도선수권대회 여자부 최중량급(+75kg) 경기 용상 3차 시기에서 187kg을 들어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한 후 기도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평창동계올림픽의 개최와 더불어 한국은 메가 스포츠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국가가 되었다. 올림픽은 국가와 인종을 초월하여 세계인의 화합과 우정을 도모하는 자리이다.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때와 장소인 만큼 세계시민으로서의 성숙한 종교의식으로 치러지는 행사가 되기를 바란다. 공적 장소에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배타적으로 표출하는 무례함과 복음적 선교의 열정을 혼동하는 일이 개신교인들 가운데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한국 개신교 선교의 내일을 모색할 수 있는 첫걸음은 예수님을 닮은 겸손과 배려를 신자들이 회복하는 일에 달려있을 것이다.

홍정호

연세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전문연구원. 감리교신학대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과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현재 신반포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종교개혁 500년, 以後 신학>, <촛불 민주화 시대의 그리스도인> 등의 책을 공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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