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결식과 다비식은 3월 22일 수덕사서

▲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

조계종 덕숭총림 충남 예산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조계종 원로의원)이 3월 18일 오후 9시경 수덕사 염화실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납 83세, 법랍 76세.

스님은 원적에 들기 전 제자들에게 '그 일은 언구에 있지 아니해. 내 가풍은(주먹을 들어 보이시며) 이것이로다!'라는 말과 함께 임종게를 남겼다.

來無一物來(래무일물래) 올 때 한 물건도 없이 왔고
去無一物去(거무일물거) 갈 때 한 물건도 없이 가는 것이로다.
去來本無事(거래본무사) 가고 오는 것이 본래 일이 없어
靑山草自靑(청산초자청) 청산과 풀은 스스로 푸름이로다. 

스님의 영결식과 다비식은 조계종 원로의원 장으로 엄수된다. 영결식은 3월 22일 오전 10시 30분 수덕사 경내에서, 다비식은 영결식 후 수덕사 연화대에서 치러진다.

‘스님의 속명은 몽술(夢述), 법명은 진성(眞性), 법호는 원담(圓潭)이다. 1926년 전북 옥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나씨 부인의 꿈에 신승(神僧)이 이름을 지어주었다하여 몽술이라 했다고 한다.

1926년 10월 26일 전북 옥구군 옥구면 수산리 217번지에서 부친 김낙관(金洛觀)과 모친 나채봉(羅采鳳)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고, 다음해에 충남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 39번지로 이주해 성장했다.
1932년 신동우 선생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던 중, 장남인 형이 일찍 죽자 수명장수 기도 차 이모인 비구니 스님을 따라 절에 오게 되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승려 생활이 무척 고상하고 숭배하는 마음이 나서 집에 돌아와 부모를 졸라 출가하였고, 1933년 벽초(碧超) 스님을 은사로 만공(滿空) 스님을 계사로 수계득도하였다.
수계한 후 천장사에서 다각 소임을 하던 중, 방선 시간에 대중들이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에 담소하는 것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노스님, 저도 참선을 해볼랍니다.”
만공 스님께서 ‘참선을 어떻게 할래?’하고 물으시니,
“아까 어떤 수좌가 와서 노스님한테 법문을 묻는데,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갔는고……?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는 하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고…….”

이렇게 불언불어(不言不語)하며 일구월심 지어감에, 정혜사에서 채공을 하던 중 만공 노스님이 거두절미하고 머리통을 내리치시면서 ‘알겠느냐?’ 하고 물어서 얼떨결에 ‘예,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만공 스님은 다시 주장자를 들어 올리면서 ‘네가 알기는 무엇을 알았느냐?’고 다그쳤고, ‘딱 때리니까 아픈 놈을 알았습니다.’라고 답했다.

실은 잘 모르면서도 또 맞을까 겁이 나서 뱉어버린 말이었기 때문에 그 후 늘 양심에 가책을 느껴 주장자로

얻어맞고 아팠던 놈이 어떤 놈인가 열심히 참구했다.

하루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만공 스님이 역시 머리를 딱 때리면서 ‘알았느냐?’ 하고 또 물으셨다.

거기서는 ‘예, 몰랐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니 만공 스님이 ‘그러면 알아야지. 내가 닷새 동안 기한을 줄 테니 알아봐. 모르면 여기에 살지도 못하고 쫓겨난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을 해놓고는 닷새 동안 잠도 안 자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도대체 알 도리가 없었다.

만공 스님이 금선대(金仙臺)에 주석하고 있을 때 심부름을 내려갔더니 역시 주장자를 가지고 달려들어 딱 때리기에 ‘아직 모르겠습니다.’ 했더니 그제야 ‘됐다. 짚신을 삼아라.’ 했다. 그때부터 시봉을 하게 되었고 만공 스님의 법을 신뢰하게 되었다.

만공 스님이 주장자로 머리를 때린 것과, 세존이 꽃가지를 잡아든 것과, 달마 스님이 불안한 놈 잡아오라 한 것과, 육조 스님의 한 물건이라는 법문과, 임제 선사가 두들겨 맞고서도 모르다가 황벽불법이 몇 푼어치 안 되는구나 하는 그 말과, 너무나도 일사분란하게 맞는 법문이라 비로소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一片虛明本妙圓(닝편허명본묘원) 한 조각 비고 밝은 것 본래 묘하고 둥글어
有心無心能不知(유심무심능부지) 유심무심으로는 능히 알 수 없네.
鏡中無形是心卽(경중무형시심즉) 거울 가운데 형상 없는 이 마음은
廓如虛空不掛毛(곽여허공불괴모) 확연히 허공 같아 티끌만치라도 걸리지 않네.

이것이 1943년 17세 때의 일이다. 이에 만공 스님은 비로소 사미(沙彌) 진성(眞性)에게 글을 써주었다.

眞性本無性(진성본무성) 참 성품에는 본래 성품이 없고
眞我元非我(진아원비아) 참 나는 원래 내가 아닐세.
無性非我法(무성비아법) 성품도 없고 나도 아닌 법이
總攝一切行(총섭일체행) 총히 일체행을 섭했느니라.

이후 원담 스님의 임운등등(任運騰騰)하고 활발발(活潑潑)한 선기(禪機)는 하늘을 끌어내리고 땅을 뽑아 올렸다. 원담 스님의 허광방달(虛曠放達)한 선지(禪旨)는 산꼭대기에서 파도가 일고 우물에서 먼지가 솟았으니 참으로 출격장부(出格丈夫)였다.

경허(鏡虛)·만공(滿空) 스님의 법을 이은 원담 스님의 가풍은 언답(堰畓, 자갈논)을 일구고 땔나무를 나르는 중에도 평상심의 도를 내보이며 무소부재(無所不在)한 불법을 체현(體現)한 행화를 보이고 사라짐이 변화무쌍하여 그 향방(向方)을 가릴 수 없었다. 적경회심(適竟會心)한 경계는 춘래초자청(春來草自靑)이었으며, 언제나 자신의 흉금(胸襟)과 감흥(感興)이 분출하는 마음을 주인공으로 한 심지(心地)였다.

오가(五家)의 종풍을 두루 갖춘 대기대용(大機大用)의 기봉(機鋒)은 당대 선장(禪匠)들을 뛰어넘어 홀로 보배롭게 빛났고, 방광불피조속(放狂不避粗俗)한 화상(和尙)의 해탈문(解脫門)은 불조(佛祖)의 정법(正法)을 이은 여법(如法)한 본분납승(本分衲僧)의 면목(面目)이었다.

수물부형(隨物賦形)의 창신성(創新性)과 당기살활(當機殺活)의 수물응기(隨物應機)는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조사문(祖師門)의 가풍(家風)이었으며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체(體)로 하고 촉처개진(觸處皆眞)을 용(用)으로 한 쌍인검(雙刃劍)은 마음도 부처도 아닌 자리에 머물면서 더러움을 버리지 않고 깨끗함을 취했고 형식주의적인 것은 거부하고 조신(調身)보다는 조심(調心)으로 장양성태(長養聖胎)를 삼았다.

또한 천부적인 미적 감각으로 예술, 문화, 서화에서도 전문인을 능가할 정도여서,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비공(非空) 장욱진(張旭鎭), 고암(顧庵) 이응로(李應魯) 화백과 교류하면서 각자의 작품을 서로 평하고 취사(取捨) 선정(選定)하였으니, 이는 세속(世俗)과 청산(靑山)이 다름 아닌 경계였다.

남산(南山)에 구름이 일면 북산(北山)에 비가 오는 화상(和尙)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일생동안 덕숭산(德崇山)을 떠나지 않았으면서도 아침마다 달마(達磨)의 소림굴(少林窟)을 드나들고 저녁마다 육조(六祖)의 조계(曹溪)에서 발을 씻었다.

1958년 불교정화 당시 구례 화엄사 주지를 잠시 역임하고, 1964년 중앙종회의원에 피선되었으며, 1967년 『만공어록』을 간행했다. 1970년 수덕사 주지로 취임하여 범종을 주조하고 범종각, 법고각, 청연당을 신축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했다.

1980년 통도사 극락암에 안거할 때 글씨 쓰는 것을 보고 경봉 스님이 ‘자네 글씨가 내 글씨보다 낫네!’라고 할 정도로 원담 스님은 예술 방면에도 조예가 깊었다. 1982년에 쓴 수덕사 대웅전 현판을 비롯, 1984년에는 속리산 법주사의 주련들을 썼으며, 1986년에는 《일본산업경제신문》이 주최한 국제서도전에서 대상(大賞)을 수상하시고, 같은 해 독립기념관 건립 서예전을 열어 전액을 회사한 바 있다.

1986년에 덕숭총림 제3대 방장으로 취임하며 보임정수(保任精修)하였으며, 1994년에는 원로회의 부의장을 역임했다. 2003년 『원담법향집』을 출간하였고, 2004년 대종사(大宗師) 법계(法戒)를 품수(品受)했다. 또한 승가사 조실, 용인 하운사 조실, 용인 법륜사 조실, 금산 금락사 조실, 향천사 천불선원 조실, 개심사 보현선원 조실을 역임했다. 30여 년 간의 결제·해제 상당법어(上堂法語)를 보면 마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인 듯, 더위를 씻는 맑은 바람인 듯, 납자(衲子)들에게 길잡이가 되고 조도(助道)에 도움이 되는 지남(指南)이 되었다.
2007년 12월 『원담대종사선묵집』을 간행, 그동안 일필(一筆)을 들어 먹으로 선계(禪界)의 풍류 속에서 개오(開悟)로 이루어진 서예의 예술은 많은 감화와 감동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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