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숙·경직성 벗고 자유로움 담자

ⓒ 이산

중국의 서법이나 일본의 서도와 같이 우리나라는 서예라는 이름으로 유구한 역사를 가진 글씨 예술 분야를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서예는 그저 초등학교에서 한두 번 정도 해보는 누구나 일천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최근 캘리그라피, 즉 손글씨예술이라는 분야가 활성화 되면서 한글에 대해 새로운 시각과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한글과 손글씨의 매력을 다시 상기시켜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서예와 캘리그라피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우선 서예와 캘리그라피는 용어적으로 같은 말이다. 서예가가 외국에 나가서 영어로 자신을 소개할 때는 ‘캘리그라퍼’라고 한다. 당연히 ‘캘리그라피를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보편적인 외국인의 눈에는 서예와 캘리그라피의 차이는 구별이 어렵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캘리그라피는 서예적 기반에서 시작되어 붓과 화선지를 쓰고 있지만 정통서법에 연연해하지 않는 필법이다. 전통적인 붓글씨가 오랫동안 그 형식을 잘 지키고 보존하여 글씨의 아름다움을 예술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면 캘리그라피는 디자인이나 영화·드라마 타이틀, 책의 제목, 광고의 헤드라인 등 분명한 쓰임새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나 성격에 따라 글씨의 모양이 매우 다양하고 자유로운 형태를 지닌다. 그래서 어찌 보면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쓰임새나 감성에 맞게 자기만의 글씨체를 쓰기까지는 오랜 시간 수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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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오랫동안 한글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살았다. 그 배경에는 엄숙하게 지켜오던 서예의 위엄 속에서 한글을 함부로 다뤄서는 안된다는 경직된 사고가 깔려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한글의 소중함을 지키기 위한 선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찍이 그 쓰임이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었다면 한글은 지금보다 더 많은 발전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또 한글을 처음 배울 때 우리는 격자노트를 사용하여 연필로 네모 칸 안에 글씨를 채워 넣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로만 글씨를 생각한다면 분명 또박또박 쓰는 훈련은 당연하다. 하지만 예술적 측면에서 보면, 처음부터 네모 안에 한글을 넣어 쓰는 훈련은 결코 바람직한 방법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한글의 활용성을 정보전달의 도구뿐만 아니라 예술적 소재로 삼는 것을 어릴때부터 인지시켜 공부시켜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한글이 우리 것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아름답다’느니 ‘위대하다’느니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누구나 자기 나라의 문자는 위대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 문자를 아름답게 썼을 때 비로소 아름다움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글의 원조인 훈민정음은 ‘천지인’이라고 하는 점(·)과 가로획(ㅡ)과 세로획(ㅣ)의 단순함으로 시작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세상에서 이렇게 단순한 것으로 하늘과 땅과 사람을 나타낸 문자나 그림이 또 있을까? 한글이 세계의 문자학에서도 칭송받는 이유다.

그러면 캘리그라피가 등장하기 전 왜 이러한 점을 활용한 디자인이나 결과물은 없었을까? 우선 앞서 말한 서예의 엄숙성과 경직성이 장애요인이었을 것이며, 영어 알파벳의 활용이 앞서 우리나라 근대산업에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영어 알파벳이 쓰인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걸 선호해 한 때 유행으로 자리 잡았지만 얼마 전까지도 한글이 적혀있는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럼, 우리 문화유적 중에 한글이 문양이나 모티브로 활용된 사례는 과연 있는가?

서예가와 문자를 연구하는 학자들, 디자이너들도 한글을 자유롭게 써보거나 응용해 본 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 결국 한글이 아름답다고 우겨서 되는 일이 아니고 부단하게 한글의 아름다움을 찾아 생활문화속에 펼쳐내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한글은 영어의 단순성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유의 획을 활용, 얼마든지 디자인의 소재로 그 가능성이 열려 있는 문자임을 캘리그라피의 오랜 경험을 통해 느끼고 있다.

ⓒ 이산

최근 필자는 한글의 조형과 재구성을 통해 다음과 같은 주제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 한글 획의 확장으로 장식적 요소 더하기

- 글자가 만들어내는 공간의 재인식

- 글자와 글자를 연결한 패턴 만들기

- 연결된 글자 사이가 만들어내는 불규칙한 도형의 재인식과 활용 등

이러한 시각은 지금까지의 캘리그라피와는 또 다른 의미의 시작이다. 사실 이렇다 할 결과를 내놓은 작가나 연구자가 없는 현실에서 부족하나마 무엇인가 시도해보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시도가 한글업계와 캘리그라피 시장에 새로운 자극이 되기를 희망한다. 한글을 배울 때부터 경직성보다는 한글의 예술성이 강조된 교육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서예가·캘리그라퍼·디자이너·폰트개발자 등이 새로운 시각으로 도전해 주길 바란다.

“캘리그라피는 한글의 외출복이다”라는 필자의 생각처럼 잘 차려 입고 세계를 향해 외출하는 한글이 탄생하기를 2016년 한글날을 맞이하여 되새김한다.

 

이산

이산글씨학교 대표.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센터 이사. 북디자이너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손글씨로 북타이틀 작업을 해 오던 중 캘리그라피 분야로 영역을 넓힌 작가다. 소주 ‘참이슬’ 브랜드 로고를 2회 작업했다. 대한항공의 ‘누구나 저마다의 여행이 있다’, 엔제리너스커피의 ‘우리나라 우리커피 엔제리너스’ 등과 KBS, MBC의 방송타이틀 그리고 최근 EBS다큐프라임의 ‘앙트레프레너’ 등 많은 작업을 했다. 저서로 <캘리그라피 워크북 660>이 있으며, 최근에는 한글 관련 개인전(갤러리 꼴)을 개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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