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제사리호·사리봉안기 등 500여 점
봉안기 명문 서동요 논란 불러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호와 금제 사리봉안기.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국보 제11호로 지정된 미륵사지석탑의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 과정에서 백제 시대 사리구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지난 14일 문화재 보수정비 과정 중 사리공(舍利孔, 사리함을 봉안하기 위해 판 구멍)에서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은제관식 등 유물 500여점을 발굴하고, 19일 익산 미륵사지 현장에서 일반에 공개했다.

사리공 중앙에 안치됐던 금제사리호는 높이 13㎝, 폭 7.7㎝의 작은 병 모양으로, X선 내부 투시결과 내외함(內外函)의 이중 구조가 밝혀졌다. 사리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을 통해 백제의 우수한 세공기법(細工技法)도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2007년 부여 왕흥사지 목탑 터 사리구 이후 이번에 두 번째로 발견된 백제 시대 사리구를 두고, “가공수법이 정교하고 세련돼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문화재”라고 가치를 인정했다. 이 중 특히 금제사리봉안기(가로 15.5㎝, 세로 10.5㎝)의 앞면과 뒷면에는 백제 왕후인 좌평의 딸이 재물을 희사해 미륵사를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명문이 확인돼 “문헌사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금석문(金石文) 자료이자 백제시대 서체 연구에도 기여할 수 있는 유물”로 평가했다.

하지만 사리봉안기에 새겨진 명문에는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 무왕의 왕후가 백제 귀족 세력인 좌평의 딸이었다고 기록돼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백제 무왕과 사랑을 나누고 왕후가 된 인물이 선화공주라고 나오는데, 기존에 이 기록이 정설로 받아들여 왔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이번에 발견된 사리봉안기 명문을 토대로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의 사랑을 노래한 서동설화는 물론 미륵사 창건 동기마저도 흔들릴 수 있다며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사업단장은 “무왕에게 여러 명의 왕후가 있었을지도 몰라 단정 지을 수 없는 부분인데 언론에서 과장한 면이 많다”면서 “서동요 설화의 진위 여부는 미술사·고고학 등 다방면에 걸쳐 연구가 진행된 후 논의돼야 할 문제”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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