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 시인ㆍ경희대 겸임교수

소장수가 잘되려면 정육점이 잘돼야 하고, 정육점이 잘되려면 고기를 사먹을 사람들이 모두 잘돼야 한다. 또 가죽장수가 잘되려면 구두장수가 잘돼야 하고, 구두장수가 잘되려면 구두를 신고 출근할 회사가 잘돼서 사원들을 늘려야 하고, 회사가 잘되려면 다시 그 회사가 만드는 물건을 사줄 사람들이 모두 잘돼서 돈을 잘 쓸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직업이나 사업은 다른 사람을 잘 살도록 돕는 일로 이뤄져 있으며 서로 남을 잘 살도록 돕지 않고는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없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사회라고 하는 커다란 하나의 유기체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거나 ‘고픈 배는 참아도 아픈 배는 못 참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아픈 배가 고픈 배보다 훨씬 견디기 힘든 건 사실이다. 신체적으로 볼 때 고픈 것은 건강해서 소화가 잘되는 증거지만, 아픈 것은 병이기 때문이다. 이 병은 치료돼야 하는 것으로 ‘남이 잘되는 것이 곧 내가 못 되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지난날 우리는 ‘아픈 것’보다 참기 쉬운 ‘고픈 것’을 선택했고 속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견뎌내면서도 남이 잘되는 길 만은 기를 쓰고 막고 봐야 하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을 벌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남이 잘될수록 내가 잘될 수밖에 없다.

사회는 하나의 유기체
서로서로 협력할 때
진정한 행복 누릴 것


얼마나 더 배고프고 얼마나 더 힘들어 보면 이 엄연하고 분명한 원칙을 우리가 이해하게 될까? 예를 들어 사과가 딱 한 개만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먹으면 내가 먹을 것이 없거나 적어질 것이다. 그러나 천지운행은 모두가 서로 돕도록 설계돼 있어서 하늘은 햇빛과 비와 바람을 불러와 땅을 돕고, 땅은 사과나무를 돕고, 잎은 썩어 다시 땅으로 되돌려져 사과를 살찌게 하니, 행복한 사과나무는 사과의 수를 헤아리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모두 똑같이 현재보다 두 배로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 길을 고통 없이는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재산이 삼천만 원 있는 사람은 육천만 원이 될 것이고, 삼억 있는 사람은 육억이, 삼십억 있는 사람은 육십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재산이 두 배로 많아지는 건 좋지만 남의 재산이 두 배로 많아지는 건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고픈 배를 움켜쥐고 더 고생을 해봐야 하는 걸까? 다른 사람은 부자가 되지 않으면서 나만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그리하여 재산이 절반으로 다시 절반에 절반으로 줄어들어서 우리가 다 함께 파산하는 모습을 속 시원하게 지켜보기를 기다려야 할 것인가.

그것이 불가능함을 체득하는 데 우리는 적지 않은 시간과 수업료를 지불했으며 세계 역사상 그와 같은 방법을 찾았다거나 성공시킨 예를 보지 못했으니 그 일을 해내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사람은 이제 없으리라고 본다. 단지 아직도 그 같은 배앓이를 전염시키거나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올바른 판단과 자제력이 긴절히 요구되는 시점이 아닐까. 절대 다수에게 끝없는 패배감을 조성하는 객관적인 비교가 아닌 우리 모두의 주관적이고 진정한 행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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