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통해 누구나 佛性 있음 비유


오백제자 수기품의 특징은 부루나 존자를 비롯해 천이백 명의 아라한에게 수기를 주는 장면이다. 처음에는 부루나 존자 개인에게 수기를 주는 것에서 시작해 천이백 명의 아라한에게 집단으로 수기를 주고 있다. 여기서 잠시 의문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천이백 명의 아라한에게 수기를 주면서 품의 제목을 ‘오백제자 수기품’이라 이름하고 있는 점이다.

경전의 내용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천이백 명의 아라한 중에서 우선 오백 명의 대표적인 아라한에게 수기를 주고 나머지 칠백 명의 아라한에게도 수기를 주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오백 명을 대표하는 아라한 중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성불한 이후 처음으로 녹야원에서 설법할 때 교화를 받아 아라한이 된 아약교진여가 있다. 이후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된 우루빈나가섭, 가야가섭, 나제가섭의 삼형제도 있으며, 기타 아니루타와 가루타이, 우타이 등도 있다. 이들은 모두 최초기의 불교교단을 형성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부처님의 대표적인 제자들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여 품명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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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희로애락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다양한 삶의 아픔들이
어둠이라면 이러한 것들을 몰아내고
빛으로 충만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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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제자 수기품의 내용에서 부루나존자와 천이백 아라한들이 개별적인 수기와 총수기(집단적인 수기)를 받는데 두 가지의 두드러진 특징이 보이고 있다.

첫째는 부루나 존자가 성불하여 활동하게 되는 시대의 이름이 보명(普明)이라는 점이다. 동시에 천이백 아라한이 성불하여 얻게 되는 부처님의 이름 역시 보명(普明)이다. 결국 보명이란 점에서 부루나와 천이백 아라한은 공통의 속성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보명(普明)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밝음을 널리 펼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생의 희로애락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다양한 삶의 아픔들이 어둠이라면 이러한 것들을 몰아내고 빛으로 충만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보명이다. 수행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내면에 충만한 생명의 에너지를 찾아내어 자리이타의 보살정신을 구현하는 것이다.

내면의 생명 에너지 찾아내
자리이타의 보살정신 구현

둘째 《법화경》에 나타난 수기사상의 일반적인 특징이지만 수기를 받고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교리적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수나라 때 활동한 길장 스님은 바로 우리들 내면에 가득 차 있는 본질적인 생명의 빛이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 생명의 빛은 어떠한 중생이나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수기를 주는 일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 존재 일반이 지니는 ‘근원적인 생명의 빛’을 불교적인 용어로 불성이라 표현한다. 부루나와 천이백 아라한, 그리고 다른 품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수기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점을 수기라는 의식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수기는 단순한 종교적 의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체 생명의 절대적 평등성을 고취시키고 있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초기불교 이래 이어져 온 조건 없는 자비의 실천과 예외 없는 자율성을 중시하고자 하는 법화행자들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경전에선 “이와 같이 점차로 수기하거늘/ 내가 장차 멸도한 뒤에는/ 누구든 반드시 성불하리니”라 말씀하고 있다.

부처님께 수기를 받은 천이백 아라한의 기쁨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흔히 환희용약(歡喜踊躍)이란 단어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 말은 ‘뛸 듯이 기뻐하며 춤을 춘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기쁨을 맛본 아라한들 중에서 오백 명의 대표적인 아라한들은 지난날 자신들이 우쭐했던 일이 매우 어리석었음을 반성하고 있으며, 그러한 반성을 ‘의리계주(衣裏繫珠)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즉 ‘옷 속에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구슬이 있었는데도 모르고 지냈던 어리석은 사람’과 마찬가지였다는 점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친구 집을 찾아가 술에 취해 잠들었는데 마침 볼일이 있어서 집 주인이 출장을 가게 되었다. 가난한 친구를 생각해 집 주인이 값을 알 수 없는 소중한 보주(寶珠)를 잠든 친구의 옷 속에 달아주고 가게 되었다. 얼마 후 술에서 깨어난 가난한 친구는 자신의 옷 속에 엄청나게 비싼 구슬이 있는지도 모르고 궁핍한 생활을 하며 고생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우연히 옛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모습이 초라하며, 가난에 찌들어 있었다. 이에 구슬을 주었던 친구가 말했다. ‘네가 고생할까봐 비싼 구슬을 주었거늘 어찌하여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는가?’라고. 영문을 모르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의아해 하는 친구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입고 있는 옷 속을 찾아보니 그 구슬이 여전히 달려 있었다. 이에 ‘너는 그것도 모르고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고생하고 번뇌하며, 구차하게 살고 있었으니 참으로 어리석구나. 이제 이 보물로 필요한 것들을 사들인다면 항상 흡족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 말한다.” 그제서야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닫고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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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명의 대표적인 아라한들은
지난날 자신들이 우쭐했던 일이
매우 어리석었음을
‘의리계주(衣裏繫珠)의 비유’로
설명하고 반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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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우리 내면에 지니고 있는 불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설법으로 유명하다. 동시에 후대 선종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나라 때 활동한 마조 스님과 그의 제자인 대주 혜해 스님과의 대화에서도 유사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혜해 스님이 마조 스님에게 ‘어느 것이 저의 보배입니까?’라고 묻자 마조 스님은 ‘지금 나에게 질문하는 자가 바로 너의 보배이다. 일체를 갖추고 있으며, 조금도 흠결이나 부족함이 없다. 자유자재로 사용하는데 어째서 바깥에 의지하여 찾고 있는가?’라 대답한다. 진정 소중한 것은 내면에 충만한 빛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 빛은 태양보다 훨씬 빛나는 것이며, 우리들의 삶에 당당함과 행복의 안내자가 될 수 있다. 의리계주의 비유와 상통하는 설법이다.

그렇지만 비유에 대해 우리들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인식할 수 있으며, 다른 종교체험을 통해 각각의 인생에 활력소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의리계주 속에 나타난 상징성을 알아보는 것도 가히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해서 천태 스님의 풀이를 간략하게 소개해 보기로 한다.

천태 스님은 이 비유를 자세하게 해설하고 있다. 즉 비유의 내용 중에서 ‘어떤 사람이란 성문과 연각의 이승에 빠져 있는 사람’이며, ‘친구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보살’이며, ‘집이란 대승의 가르침’이라 해석한다. ‘술에 취해 잠들었다는 것은 대승을 향하는 근기가 약간 움직이고 무명이 잠시 억제되어 경을 듣자 내심으로 작은 깨달음이 있었더라도 무명업장이 워낙 두터운 까닭에 도리어 다시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라 본다. 공적인 일이 있어 출장을 가게 되었다는 구절에 대해선 ‘다른 곳에서 교화할 중생이 생겨서 인연 따라 가서 감응한 것’이라 풀이하고, ‘값을 정할 수 없는 보배 구슬’이란 일승의 실상(實相)과 진여를 깨달아 얻게 되는 지혜로 해석한다. ‘옷 속에 매달아 주었다’는 것에 대해 참회와 인욕으로 성냄을 제지하는 것은 겉옷이며, 믿음으로 선근을 감싸는 것은 속옷으로 풀이한다. ‘술에 취해 보주를 달아 주는 것도 몰랐다’는 것은 무명이 두터워 대승의 가르침을 알지 못한 것이라 본다. ‘타국을 돌아다니며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구차한 생활을 피할 수 없었다’는 구절에 대해 ‘대승을 추구하지 않는 것을 타국에서 방황하는 것’으로 보고, ‘선근이 발생하여 고뇌를 싫어하고 즐거움을 구하게 되는 것’을 일어나 돌아다니며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라 보았다. 다시 친구를 만나 그가 준 구슬을 보게 되며, 비로소 그 구슬을 팔아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사서 마음껏 살 수 있다는 구절에 대해선 ‘친구를 만나자 그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것’은 정신적인 집착을 움직이기 시작하고 의심을 일으키는 것에 비유하고 있으며, ‘구슬을 찾아 보여 준’ 것은 숙세의 인연을 비유한 것이며, ‘구슬을 팔아 마음껏 살 수 있다’는 것은 수기를 받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비유한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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