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누이 같은
자씨보살의 미소
새 희망과 용기 안겨줘

문경 하늘재 언덕바지에 내 사유의 터를 잡은 것은 순전히 관음리 석조반가사유보살상과의 인연 탓이다. 20여 년 전 나는 문경 여행서를 쓰기 위해 주말이면 아내와 문경의 이곳저곳으로 답사했다. 문경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고향 마을 반대편의 지역은 가보지 않은 곳이 적지 않았다.

문경의 북서쪽에 위치한 계립령으로 한자 표기된 하늘재는 조선 초 문경새재가 개척되기 전까지 영남대로의 중심 고갯길이었다. 서기 156년 아달라이사금 때 신라가 중원 진출을 위해 개척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두대간 고갯길이다. 그런 역사성으로 하늘재 주변에는 불교 유적이 곳곳에 전해온다. 우선 마을 이름이 불교명이다. 경상도 땅 관음리와 충북 땅 미륵리가 하늘재를 경계로 접하고 있다.

하늘재는 통일신라에 이어 고려 때 기호지방과 영남을 잇는 대표적인 고갯길이었다. 그만큼 인적 물적 이동이 많았고 일찍부터 공공 숙소 역할을 하는 큰 원(院)이 세워졌다. 그런 요충지였기에 사찰과 미륵불도 세워져 원의 명칭도 언제부턴가 미륵대원으로 불렸다. 아마도 원의 기능을 겸한 사찰이 아니었을까 추증된다. 여기에 망국의 불운한 왕자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전설까지 더해져 이곳은 더욱 유서 깊은 곳이 되었다.

미륵리의 대원과 미륵불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관음리의 불교 유적은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재로 향하는 관음리 초입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있고, 조금 더 가면 3m50cm 높이의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있다. 언제부턴가 둘 다 전각 속에 갇혀져 행인들은 그곳이 미륵불이 있는 곳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보호 측면이긴 하지만 멀리서 눈인사라도 올릴 수 있도록 지금이라도 전각을 걷어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하늘재로 조금 더 향하면 문막마을 표지석이 나온다. 여기서 우측 길로 약 500m 들어가면 석조반가사유보살을 만날 수 있다. 옛날 이곳 초입에는 5층 석탑이 있었는데, 지금은 갈평출장소 마당으로 옮겨져 옛 절터의 고즈넉한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관음리 석조반가사유보살은 전각이 씌워져 있지 않아 멀리서부터 보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젖게 된다. 188cm 높이에 많이 풍화되고 돌이끼가 꽃을 피우고 있지만 여전히 양 볼의 통통한 미소가 아름답기 그지없는 자씨보살이다. 어머니의 자애로움과 누이의 다정함이 함께 느껴진다. 조각은 다소 투박해 보이지만 오히려 후덕한 정겨움이 매력이다. 더욱이 이곳은 주변 지세가 넓고 편안해 언제 찾더라도 오래 머물고 싶은 한가로움에 젖게 된다.

20여 년 전 이 미륵보살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미륵에 기대 앉아 한나절을 보냈다. 이후에도 가끔 이곳에 들러 세상살이의 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상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 때마다 관음리 자씨보살은 어머니처럼 다정한 누이처럼 내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해주었다.

우리나라에 반가사유상이 많지만, 나는 가장 윗자리에 관음리 석조반가사유상을 앉힌다. 투박하면서도 자애롭기 그지없는 관음리 자씨보살의 미소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미륵보살의 시선이 향하는 하늘재 언덕바지에 내 창작실 시월(詩月)산방이 있다. 미륵보살이 먼 미래를 생각하며 깊은 명상에 잠겨 있듯이 나 또한 내일을 꿈꾸며 오늘을 사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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