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만들다

이웃집 개

이웃집에는 마당에서 기르는 개가 한 마리 있다. 털이 길고 몸집이 크지만 엄청 순하다. 그 개가 급하게 움직이거나 낯선 사람을 향해 짖거나 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름은 ‘멍개’라는데, 그 뜻은 물어보지 않았다. 이제 그 개는 나이가 많이 들었다. 그래서 거동이 더 느려졌다. 눈을 껌벅거리는 것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웃집에서는 하루에 한 차례 천천히 산책시킨다고 했다. 어느 날 아내가 내 집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그 개를 만났다고 했다. 그런데 그 개는 혼자였고, 목줄이 없는 상태였다고 했다. 흡사 떠돌듯이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었다고 했다.

이웃집 사람과 전화 통화가 되지 않았고, 또 그 큰 개를 데려올 수 없었기에 아내는 서둘러 이웃집에 찾아가 사실을 알렸다고 했다. 낡은 목줄이 끊어져 개가 집을 나선 줄을 알게 된 이웃집 사람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개를 찾으러 뛰어나갔다고 했다. 그러나 그 개의 행방은 한참 동안 묘연했고, 함께 그 개를 찾으러 나섰던 내 아내가 좀전에 보았던 곳으로부터 꽤 동떨어진 곳에서 마침내 그 개를 발견했다고 했다. 뒤늦게 헐레벌떡 달려온 이웃집 사람은 가쁜 숨을 내쉬며 “멍개야, 멍개야.”하고 부르며 살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늙은 개를 껴안고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고 했다. 내 아내도 함께 울었다고 했다.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햇살 아래

겨울비가 여러 날에 걸쳐 차갑게 내리더니 오늘은 햇살이 내린다. 금잔디가 깔린 마당이 더욱 환하고 따뜻하다. 강아지는 몸을 이리저리 뒹굴면서 햇살을 즐긴다. 나도 오랜만에 의자를 하나 놓고 앉아 햇살 아래에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벌써 봄풀이 돋은 텃밭을 바라본다. 텃밭에는 파가 푸릇푸릇하게 자라고 있다. 나는 잠시 저 풀을 내일에는 뽑아야겠다고 생각하다가 그 생각을 밀쳐놓고 다시 내 마음을 햇살 아래 의자에 앉힌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툇마루를 바라본다. 작년에 툇마루에 칠한 색이 다 바랜 것을 보고선 새로이 칠을 해야겠다고 잠깐 생각하다가 그 생각을 밀쳐놓고 다시 내 마음을 의자에 앉힌다. 잔걱정이 많은 마음은 햇살 아래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걱정의 그늘로 자꾸 옮겨가려 한다.

어떤 통화

내가 평소에 존경하는 선생님 가운데 한 분이 얼마 전에 내게 전화를 하셨다. 그 분의 음성은 늘 밝다. 음성을 듣고 있으면 햇살이 가득 내게로 실려 오는 듯하다. 꽃에 비유하자면 노란 복수초 같은 음성이다. 그날은 당신께서 최근에 읽은 한 편의 시에 대해 이런저런 소회를 들려주셨다. 그러시고는 시가 좋으니 마음이 설레어 마당을 한참 서성거렸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에 다시 한 번 배우는 것이 있었다. 노경(老境)에도 설렘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과 시를 쓰기 위해 당신 스스로의 마음을 정성을 다해 골똘하게 가꾸시는 그 열정이 뜨겁게 느껴져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 내 자신을 돌아보게도 했다. 나는 빈둥빈둥 누워 살고 있지 않은가.

생업을 위해 아침에 직장을 갈 때 나는 해안도로를 지나서 간다. 바다를 보기 위해서이다. 바다는 매일매일 다른 상태에 있다. 몹시 격렬할 때가 있고 매우 잠잠할 때가 있다. 해무가 잔뜩 끼어 바로 앞을 바라볼 수 없을 때가 있고 시야가 탁 트여 멀리 무인도를 바라보게 허락하는 때가 있다. 월파가 심한 날도 있다. 무인도를 멀리 두고 바라볼 적에는 그곳이 다른 세계, 선계(仙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 때에는 무인도가 설봉(雪峯)처럼, 눈 덮인 산봉우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만큼 깨끗하고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사는 속세와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곳인 셈이다.

신대철 시인이 쓴 ‘무인도(無人島)’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데, 이 시의 마지막 대목은 이러하다. “인간을 만나고 온 바다,/ 물거품 버릴 데를 찾아 무인도(無人島)로 가고 있다.” 인간이 사는 곳의 해안으로 밀려온 바다가 유일하게 얻는 것이 물거품뿐이라는 것이다. 속이 빈 것, 부풀려진 것을 만드는 곳이 인간 세계라는 것이다. 이 시를 떠올릴 때마다 해안도로를 지나가고 있는 나는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멀리 나가고 싶지 않아요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 멀리 나가고 싶지도 않아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에서 주인공이 인용했던 또 다른 말이 생각났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아둔함에 망한다.”라는 말이었다. 멀리 나가고 싶지 않다는 말에는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를 스스로 견주어본다는 의지가 있는 듯했고, 또 속진 속에 있지 않겠다는 뜻도 있는 것 같았다. 번스타인이 인용한 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세속적 욕망을 절제하고 아둔함의 어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물론 자신의 욕망이 분에 넘치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는 것도 아둔함일 것이다.

울타리 밖

마을에는 아래와 위로 길게 난 길이 하나 있고 그 길 양쪽으로 각각의 가옥으로 향해가는 좁은 골목이 나뭇가지처럼 나 있다. 모르긴 해도 하늘에서 굽어보면 마치 겨울날 한 그루의 팽나무를 보는 듯할 것이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선량하고 부지런해서 일찍 일어나고 인심이 좋다. 집의 마당마다 각양각색의 꽃이 철마다 피는 화초를 심어 키우고, 매화나무나 하귤나무와 같은 과실나무를 심어놓은 집도 있다. 개중에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는 동백나무여서 이즈음에는 붉은 동백꽃이 어느 집 마당에서나 피어 있다.

집마다 돌담을 쌓아 집의 경계를 삼았다. 그런데 돌담의 바깥에는 또 화초를 심어 오가는 동네 사람들의 눈이 즐겁다. 내 집에만 화초를 가꾸는 것이 아니라 내 집 바깥에도 화초를 가꾸고 있는 것이다. 박용래 시인은 ‘울타리 밖’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울타리 밖에도 화초(花草)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잔광(殘光)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라고 썼는데, 내 사는 마을이 꼭 그러하다. 울타리 밖에 화초를 심는 마을이어서 밤에 불을 끄고 집들은 잠들어도 별빛이며 울타리 밖 화초의 꽃이 내뿜는 빛은 꺼지지 않는 마을이다.

옹색함에 대하여

평생을 두고 해도 다 하지 못하는 공부가 있다. 마음공부가 바로 그것이다. 돌아보면 마음을 넉넉하게 사용하지 못했다. 그지없이 인색했다. 재화를 아끼는 것이 지나쳐서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데에도 박했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는 말을 핑계 삼았다. 왜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마음을 크게 쓰지 않느냐는 자문에도 내 살림에 여유가 없으니 누군가를 돕는 일에도 여유가 없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궁색하게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일수록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 많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하니 나의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일 테다. ‘나의 재화를 떼어내 다른 사람에게 줄 때도 왜 그때 더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주더라도 흔쾌히 주고, 주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마음이 비좁고 답답하고 생각이 막힌 것이 마치 탱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쪽에서 살아온 듯했다. 이 일을 요즘은 참회한다.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봄을 만들다

절에서 입춘방(立春榜)을 얻어와서 집 현관 입구에 붙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고 쓴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글씨를 보면 어떤 긍정적인 기운이 생겨나는 듯하다. 새봄에는 좋은 일이 생겨날 것만 같다. 마치 묵은 나뭇가지에 새싹이 움트는 것처럼.

눈을 쓸고, 응달에 남은 잔설을 바라보고, 지붕에 쌓였던 눈이 녹아 처마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던 게 어제의 일 같은데 이제 제법 봄의 기운이 돈다. 집채의 바깥에 놓아두었던 화분을 겨우내 집안으로 들여놓았더니 어떤 화분에는 새로이 순이 돋았고, 또 어떤 화분에는 꽃망울이 맺혔다. 한데에도 온기가 퍼지게 되면 생명들의 활동이 더 활발해질 것이다.

며칠 전에는 화단에서 자라던 화초의 줄기를 잘라 삽목(揷木)을 했다. 이웃집에서 고맙게도 화초의 삽목하는 법을 알려줬다. 삽목법을 배웠으니 올해 장마철에는 산수국 삽목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본토를 떠나 새로운 땅에서 뿌리내릴, 삽목한 화초에 물을 충분히 주었다. 또 이웃집에서 귤나무 전정을 했기에 내 집의 몇 그루 귤나무들도 전정을 했다. 전정을 끝낸 옆집 귤나무를 눈으로 보고 또 어림잡아 헤아려 전정을 했다. 아직 때에 맞춰서 해야 할 일을 잘 알지 못하는, 작은 밭을 가꾸는 초보 농부이므로 옆집에서 하는 대로 따라서 하고 또 그 한 일을 기록해두고 있다. 시골에서의 생활이라는 게 봄이 되어야 할 일이 생겨나는 게 아니라, 일을 해야 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객토

육지에 있는 시골 고향집에 다녀왔다. 그새 고향 마을에는 빈집이 좀 더 늘었다. 간만에 만난 사람들과 안부 인사를 서로 건넸다. 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동기가 길고 힘든 투병을 하고 있다고 전해 들었는데 우연히 그이의 얼굴을 보았다. 나는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이는 잘 견뎌내고 있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와 집의 대문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 흙을 한가득 실은 작은 트럭이 윗논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객토를 붓기 위해 싣고 가는 것이었다. 누런 흙을 실은 차는 오후 내내 내 집 앞을 지나 윗논을 향해 갔다.

문태준
시인.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맨발〉·〈가재미〉·〈그늘의 발달〉·〈먼 곳〉·〈우리들의 마지막 얼굴〉·〈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노작문학상·애지문학상·서정시학작품상·목월문학상·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BBS 제주불교방송 총괄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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