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청 좋은 울보

홀딱 반한 판소리는

불연(佛緣)입니다.”

남상일은 클래식·가요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국악을 접목시킨 색다른 공연을 바탕으로 국악의 매력을 대중에게 알려왔다. 사진은 2018년 진행한 강원도립국악관현악단과의 협연.
남상일은 클래식·가요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국악을 접목시킨 색다른 공연을 바탕으로 국악의 매력을 대중에게 알려왔다. 사진은 2018년 진행한 강원도립국악관현악단과의 협연.

유달리 울음이 많은 아이였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울음소리가 들린다. 울음보가 터지면 쉽사리 멈추지 않았던 터라 집안은 항상 그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부모님의 다정한 토닥임에도 쉽사리 멈추지 않던 울음은 우연히 듣게 된 판소리 한 곡조에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그 순간은 국악인 남상일(46, 법명 일륜)의 40년 국악 인생의 시작이었다.

걸출한 소리와 재치 있는 입담으로 ‘국악계의 싸이’로 불리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남상일. 그는 각종 공연·방송·강연 등을 통해 대중에게 국악의 매력을 전파해 온 대표적인 불자 국악인이다. “불자 국악인으로서 우리 소리와 불교의 매력을 대중에게 알리는 게 화두”라고 말하는 남상일을 만나 그의 삶을 들어봤다.

동요보다 ‘사랑가’ 먼저 배워

예부터 어른들은 울음소리가 우렁찬 아이를 보고 “득음(得音)을 하려고 운다.”고 말하곤 했다. 남상일은 이 말의 정석처럼 오랫동안 우렁차게 우는 아이였다. 1978년 전주에서 태어난 그는 평소 얌전하고 순한 아이였다. 하지만 한 번 울음이 터지면 세상이 떠나가듯 자지러지게 울어 가족들의 걱정을 샀다. 그의 부모는 갖은 방법으로 달래보려 했지만, 좀처럼 효과적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상일의 아버지는 신기한 장면을 목격했다. 펑펑 울던 아들이 TV에서 나오는 조상현 명창의 판소리를 듣고 울음을 뚝 그치는 모습이었다. 이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들이 울 때마다 국악 테이프를 틀어줬는데 신기하게도 남상일은 곧장 울음을 멈추고 소리에 집중하곤 했다. 아들의 울음을 멈추는 데는 국악, 그중에서도 판소리가 특효라는 사실을 알게 된 부부는 그가 울 때마다 판소리 테이프를 틀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아이는 테이프 속 소리를 따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남상일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이 범상치 않다고 느꼈다. 곧바로 사연을 적은 편지와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조상현 명창에게 보냈다. 얼마 뒤 조상현 명창은 자신이 직접 무릎장단에 맞춰 녹음한 판소리 춘향가의 ‘사랑가’·‘이별가’ 테이프와 함께 ‘이대로 따라 부르게 하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왔다.

어린 남상일은 틈만 나면 테이프를 틀어 판소리를 듣고 따라 불렀다. 그의 아버지는 동요보다 판소리를 더 좋아하는 아들의 모습에 다른 판소리 테이프도 사다 주면서 골라서 들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 주변이나 인근 지역에서 판소리 경연대회나 전통 공연이 열릴 때면 데리고 가서 관람시키곤 했다.

국민학교 입학 후에도 남상일은 국악에 심취했고, 국악인을 꿈꿨다. 2학년 때 전주의 국악인 조소녀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얼마 뒤 그는 KBS에서 주최한 제1회 전국어린이판소리 경연대회(1988년)에 참가했다. 정식으로 소리를 배운 기간은 몇 개월 되지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국악을 듣고 부른 덕분인지 대회의 장원을 차지하며 미래 국악인으로서의 기대를 모았다.

국민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는 전북 완주의 위봉산으로 ‘국악 산공부(소리공부)’를 떠났다. 숙소 위에는 위봉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가 연습할 때면 종종 비구니 스님들이 포행을 나왔다. 스님들은 어린 남상일에게 “조그만 녀석이 노래도 참 잘하고, 목청도 좋다.”고 칭찬하며 바로 위에 자리한 절에 놀러 오라고 권유했다.

그는 이런 인연으로 고즈넉한 산사에서 스님들의 말씀을 듣고, 108배와 발우공양 등을 체험하며 사찰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다. 소리 공부를 하다 쉬는 시간에는 절에 올라가 법회나 예불에 참석했다. 나중에는 스스로 불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수진 스님(현 부산 해인정사 주지)은 남상일에게 ‘하나의 수레바퀴처럼 둥글게 살아가며,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뜻을 담아 ‘일륜(一輪)’이라는 법명을 지어 줬다.

“산에서 소리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께 제 방에 불상을 놓아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는 제가 불자니까 집에 당연히 부처님이 계셔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도 제 부탁에 아무 말 없이 불상을 구해다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종교를 믿더라도 그 종교의 가르침을 잘 따르면 된다.’고 당부하시며 제 선택을 존중해주셨어요. 이때부터 집에서 〈천수경〉을 비롯한 경전을 읽었고, 소리 공부를 하러 위봉산에 가면 위봉사에 가서 신행생활을 했습니다.”

우연히 듣게 된 조상현 명창의 판소리에 푹 빠진 어린시절의 남상일. 그는 동요보다 판소리를 더 즐겨 들으며 소리꾼이나 고수의 모습을 따라하곤 했다. 
우연히 듣게 된 조상현 명창의 판소리에 푹 빠진 어린시절의 남상일. 그는 동요보다 판소리를 더 즐겨 들으며 소리꾼이나 고수의 모습을 따라하곤 했다. 

국악 알리려 ‘국립창극단’ 퇴사

일찍이 자신의 진로를 정한 남상일은 꾸준히 실력을 갈고 닦아 각종 대회를 휩쓸었다. 경주신라문화제 전국국악경연 판소리 학생부 최우수상(1988)·광주남도예술제 전국판소리경연대회 판소리 초등부 장원(1989) 등 유수의 대회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뒀다. 특히 1996년에는 동아국악콩쿨 판소리 학생부 금상을 차지하며 학교의 자랑이 되기도 했다.

남상일은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서울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입시를 준비했다. 두 학교 모두 서류심사는 통과했지만, 서울대학교는 면접에서 아쉽게 탈락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한예종의 면접을 보았는데, 면접장에 들어서니 심사위원으로 판소리계의 프리마돈나로 불리던 안숙선 명창이 앉아 있었다.

남상일은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의 앞에서 면접을 보게 됐다는 사실에 떨리기도 했지만, 자신이 준비한 모든 실력을 선보이겠다는 굳센 의지가 샘솟았다. 안숙선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은 약 20분간 이어진 그의 소리를 진지하게 경청했다.

“보통 2~3분 정도 듣고 끝내는 다른 대학의 면접과 달리, 안숙선 선생님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은 제가 준비한 소리를 끝까지 들어주셨어요. 몇 가지 질문 뒤에 안숙선 선생님은 다른 것도 할 줄 아는 게 있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제가 가야금과 한국무용을 조금 할 줄 안다고 하자, 무용을 해보라고 하시며 직접 무릎장단을 쳐주셨습니다.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췄고, 당당히 합격을 했지요.”

한예종 전통예술원 1기생으로 입학한 남상일은 안숙선을 전임교수로 수궁가와 적벽가를 사사했다. 또 사물놀이의 대가 김덕수·국악인 박병천(1932~2007) 등 기라성 같은 선생들의 수업을 들으며 국악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배우고 기량을 닦아 나갔다. 현 조계종 어산어장 동희 스님에게 범패·나비춤·바라춤·염불 등 불교음악을 배우기도 했다. 한예종의 교수진들은 학생들의 실전경험을 중시하며, 자신들의 공연에 학생들이 짧게라도 출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남상일도 교수님들을 따라다니며 무대에 올라 소리를 하는 등 실전경험을 쌓아 나갔다.

그는 ‘우리나라의 음악’을 더 깊고 자세히 공부하고 싶어졌다. 고민 끝에 졸업 후 한예종의 전문사과정(대학원 과정)에 진학했다.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국립창극단 단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고 자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과 안정적이면서, 명망 있는 선배들과 함께하는 공연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는 고민 끝에 국립창극단에 지원, 6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이어 그해 가을에 올리는 공연 ‘적벽가(2003)’의 주연 ‘조조’역에 발탁됐다.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자마자 덜컥 주연을 맡게 돼 긴장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잘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났다. 그런데 판소리와 창극은 차이가 컸다. 소리꾼 홀로 이별의 애통함에 울부짖는 ‘춘향이’가 되었다가 탐욕스러운 ‘변사또’가 되고, 호탕하고 쾌활한 ‘이몽룡’이 되어 극을 홀로 이끌어가는 판소리와 달리 창극은 각 배역 간 소통과 호흡이 중요했다. 자신의 리액션이 상대의 연기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는 자신과 같은 역할에 더블캐스팅 된 선배 배우 왕기석의 연기를 관찰하고 분석하기도 했다. 선배 배우의 연기를 보고 좋은 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실력도 늘었다.

이후에도 각종 공연의 주연을 맡는 등 꾸준히 활동해 입지를 쌓아오던 남상일은 2008년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KBS의 프로그램 ‘시사투나잇’의 출연이다. 제작진은 그에게 ‘시사난타’라는 코너에서 한 주의 사회 이슈를 소리로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대중에게 우리 소리의 매력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흔쾌히 승낙했다.

“판소리는 ‘시대를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그래서인지 현대의 사회나 정치 이슈가 과거의 시대를 반영한 판소리와 맞아떨어지더군요. 결국 과거나 지금이나 상황은 비슷한데 사용하는 말이나 생활패턴만 달라졌다는 의미죠. 우리 조상들은 풍자와 은유, 해학으로 세태를 비판했어요.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게 아니라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가려운 부분을 제대로 긁어주는 판소리의 요소에 공감과 재미를 느끼는 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계기로 남상일은 각종 공연과 방송 등에 출연했고, 대중에게 ‘재치 있는 국악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는 좋은 것일수록 안으로 꽁꽁 감추거나 숨기는 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보여줘야 그 가치를 알릴 수 있다고 여겼고, 방송 출연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더욱 적극적으로 방송활동을 했다.

이 무렵, 국립창극단 안에서는 남상일의 행보를 두고 여러 말이 나왔다. 국악을 알리는 그의 활동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쪽도 있었지만, 외부 활동보다는 극단 내부 활동에 더 집중해 주기를 바라는 의견도 있었다. 남상일은 국립창극단 활동도 좋았지만, 방송을 통해 대중에게 국악의 매력을 알리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주변에 조언도 구해봤지만, 선택은 자신의 몫이었다.

그는 고민 끝에 ‘국립창극단’이라는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본래 국악을 좋아해서 공연을 보러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라, 국악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우리 소리’의 매력을 알리는 일이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느꼈다. 결국 10년간 몸담고 있던 국립창극단을 나와 프리랜서 활동을 시작했다.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뒤 10년 간 적벽가·창작창극 제비·춘향·장끼전·청·배비장전·수궁가 등 다양한 작품에 참여했다. 2019년 창극 뺑파전 공연을 앞두고 동료 배우들과 함께한 모습.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뒤 10년 간 적벽가·창작창극 제비·춘향·장끼전·청·배비장전·수궁가 등 다양한 작품에 참여했다. 2019년 창극 뺑파전 공연을 앞두고 동료 배우들과 함께한 모습.

불자대상 상금 전액 기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각종 방송·강연·공연에 출연했다. 친숙한 이미지를 활용해 대중에게 다가갔고, ‘남상일 100분 쇼’·‘남상일과 놀다가쇼’ 등 다양한 공연을 기획·운영했다. 또 KBS ‘불후의 명곡’ 등에 출연해 국악과 가요를 접목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에게 국악을 알렸다.

남상일은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는 동안 KBS국악대경연 종합대상(2007)·대한민국 국회대상 올해의 국악상(2009)·남원 춘향제 전국판소리경연대회 장원(2010)·한국방송대상 문화예술인상(2012)·KBS국악대상 판소리상(2012) 등을 수상했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도 문화체육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13)·대한민국예술나눔 스타대상 올해의 최고 국악인상(2017)·한류문화 공헌 대상(2018)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여러 상 중에 2016년 수상한 ‘불자대상’을 가장 인상 깊은 상으로 뽑았다. 스스로 불자라고 밝히며 주변에 불교를 권했던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도 부처님 품으로 모셔와 함께 신행활동에 힘쓰고 있다.

조계종 불자대상 선정위원회는 남상일의 이런 포교활동과 함께 국악의 대중화와 불교문화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점과 불교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능기부를 하고, 각종 불교계 단체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불자의 자긍심을 고취했다는 공로를 인정해 불자대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남상일은 불자대상이라는 특별하고 뜻깊은 상을 수상한 만큼, 상금도 가치 있게 회향하고자 했다. 여러 방향을 찾아보던 중, 당시 공익법인 아름다운동행에서 탄자니아에 보리가람농업기술대학을 건립한다는 소식에 상금 전액을 건립기금으로 보시했다.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조금이나마 편안한 환경에서 공부하고 꿈을 펼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남상일은 이후 2016년 10월 천태종에서 개최한 ‘더불어 함께 하는 산사음악회, 구인사의 밤’ 사회를 맡는 등 전국의 여러 산사음악회에 출연하며 불자 국악인으로서 자신의 재능을 회향했다. 또 불교환경연대 등의 홍보대사로도 활동하며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퍼트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남상일은 항상 임제 선사의 법어인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주인이 되어야,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후배들에게도 항상 ‘자신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스스로의, 스스로에 의한, 스스로를 위한 음악을 할 때 자신감을 가지고 무대를 이끌어갈 수 있으며 관객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무대에 오르기 전, 마음을 평온하게 다잡는 게 중요하다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불자 국악인으로서 국악과 불교의 매력을 함께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남상일. 그는 자신이 가진 국악에 대한 신조가 천태종의 3대 지표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천태종의 3대 지표가 애국·생활·대중불교잖아요. 제가 국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조도 비슷해요. 저는 국악과 전통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활발하게 펼쳐져야 하고, 대중과 함께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우리나라의 음악을 소중히 하는 게 곧 애국인 건 당연하고요. 그래서 국악에 대한 제 신조가 애국국악, 생활국악, 대중국악입니다.”

울다가 들었던 판소리 곡조에 이끌려 시작한 남상일의 국악 인생. 그가 촘촘히 쌓아 올린 국악에 대한 애정과 불교에 대한 신심이 그의 내면을 금강석처럼 단단히 채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국악 대중화’라는 꿈을 향해 우직하게 나아가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 ‘우리 소리’의 매력이 K-판소리로 세계에 널리 퍼져나가길 기대한다.

한예종 전통예술원을 졸업한 후에도 판소리계의 프리마돈나로 불리는 안숙선 명창과의 인연을 이어오며 함께 공연을 펼쳤다. 2016년 공연한 ‘수궁가’의 입체창. 
한예종 전통예술원을 졸업한 후에도 판소리계의 프리마돈나로 불리는 안숙선 명창과의 인연을 이어오며 함께 공연을 펼쳤다. 2016년 공연한 ‘수궁가’의 입체창. 
국악인 남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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