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생활 상징하는 공간
출가자 감소로 기능 상실

순천 송광사 대방 건물인 정혜사 전경. 정혜사가 건립되기 전까지 송광사의 대방은 해청당이었다. 해청당은 세 채의 건물이 ‘트인 ㅁ자’ 형을 이루었고, 중심건물은 9칸의 일자형 대방이었다.
순천 송광사 대방 건물인 정혜사 전경. 정혜사가 건립되기 전까지 송광사의 대방은 해청당이었다. 해청당은 세 채의 건물이 ‘트인 ㅁ자’ 형을 이루었고, 중심건물은 9칸의 일자형 대방이었다.

대방(大房)은 출가수행자의 대중생활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행자들에게 대방은 선망의 공간이었다. 큰스님부터 학인에 이르기까지 대방에 모여 발우공양을 하는 모습, 강원·선원의 스님들이 대방에서 경전을 읽거나 참선에 든 모습은 더없이 여법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이에 행자들은 대방 앞을 지날 때면 하루빨리 저 자리에 앉겠다는 간절함으로 가슴이 뛰곤 하였다.

이윽고 행자생활을 마치고 사미계를 받으면, 강원의 학인으로 대방에서 숙식과 공부를 하며 살아가게 된다. 행자 때 찬상을 나르던 대방에서, 가사·장삼을 갖추고 입방(入房)하는 통과의식을 거쳐 대방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지금도 저학년 학인들은 대방에서 함께 거주하니, 학인시절은 출가자의 일생을 통틀어 진정한 대중생활이 이루어지는 때이기도 하다. 같은 학년은 졸업 때까지 한 공간에서 생활하므로, 평생을 함께할 도반도 이 시기에 만나게 된다.

수행과 숙식 함께 하는 곳

대방은 대중이 함께 숙식과 수행을 하는 대규모 공간으로, 큰방ㆍ대중방이라고도 부른다. 송광사ㆍ통도사처럼 대방을 독채로 둔 곳도 있지만, 대부분 공양간과 여러 개의 승방ㆍ부속시설로 대방채를 구성한다. 대방에 불단을 두어 부처님을 모시면 예불과 수행, 취사와 숙식이 이루어지는 독립된 작은 절과 다를 바 없다.

실제 많은 스님이 거주했던 송광사는 1970년대까지 6개의 승당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어, 이를 ‘육방(六房)’이라 불렀다. 각각 문중의 큰스님과 문도들이 모여 수행과 살림을 하는 별도의 ‘육방살림’을 운영한 것이다. 당시 육방의 하나였던 고색창연한 해청당(海淸堂)은 세 채의 건물이 ‘트인 ㅁ자’ 형을 이루었고, 중심건물은 9칸의 일자형 대방이었다. 지금의 대방 건물인 정혜사가 세워지기 전까지, 전 대중이 이곳에 모여 발우공양을 하고 평시에는 학인들이 거주하였다.

사찰에서 대방의 위치는 주로 중정의 좌우에 두고 있으며, 불전 맞은편의 누각 자리에 세운 곳도 많다. 특히 서울의 화계사ㆍ흥천사처럼 19세기 말 불전 앞에 세운 대방들은, 궁궐 여인들의 원당(願堂) 기도처나 염불당 등으로 기능하였다.

1865년에 건립한 흥천사 대방채의 경우, H자형 구성에 양쪽으로 돌출된 루(樓)를 두었고, 공양간을 비롯해 여러 개의 승방과 부속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대방은 극락보전을 정면으로 향하여 부처님께 예불하는 구조를 지녔으며, 양쪽 루는 접객공간으로 사용하였다.

대방에는 작은 규모의 지대방을 나란히 둔 경우가 많다. 지대방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스님들의 휴식공간이다. 작은 절에서는 간병실ㆍ침봉실(針峰室)을 겸하고 있어, 몸이 아픈 이를 치료하거나 바느질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는 대방과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녔기에 지대방을 ‘뒷방’이라고도 부른다. ‘지대방’의 어원 또한 ‘(벽에) 지댈 수 있는 방’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따라서 선원의 수좌들 사이에선 ‘뒷방 조실’이라는 말이 있다. ‘선방(대방) 조실’은 법력으로 결정되지만 ‘뒷방 조실’은 병기(病氣)와 구변(口辯)으로 결정된다. 늘 몸이 아프다며 지대방을 차지하거나 입담이 좋아 지대방에서 활약을 펼치는 스님을 뜻하는 말이다. 석남사 대방 툇마루에는 ‘대방청규’를 붙여두었는데, 그 가운데 ‘지대방 사용 자제’라는 항목이 있어 보는 이를 미소 짓게 한다.

대방의 앞 또는 앞뒤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여, 공양간의 음식을 옮기는 통로로 사용하였다. 마루 한편에는 소종·금고(金鼓)·목탁 등을 두고 공양이나 울력·대중공사 등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했다. 이처럼 대방은 대중생활의 핵심을 이루는 공간으로, 스님들의 수행과 일상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언양 석남사 대방 내부 모습. 불단과 마주한 어간을 기준으로 동쪽은 주지를 비롯한 상주하는 본 채 스님들이 앉는 ‘청산’이고, 서쪽은 방부를 들인 선객들이 앉는 ‘백운’이다.
언양 석남사 대방 내부 모습. 불단과 마주한 어간을 기준으로 동쪽은 주지를 비롯한 상주하는 본 채 스님들이 앉는 ‘청산’이고, 서쪽은 방부를 들인 선객들이 앉는 ‘백운’이다.

‘어간’에서 ‘탁자 밑’까지

대방의 구조는 군더더기 없이 단출하다. 높은 벽에는 대중의 소임별 명단을 적은 용상방(龍象榜)이 당당하게 걸려 있고, 선반 위 법명이 적힌 자리마다 발우가 정연하게 놓인 모습은 청정한 수행 가풍을 느끼게 한다. 이와 함께 가사를 거는 횃대, 이불과 소지품 등을 넣어두는 벽장 정도가 있을 따름이다. 아울러 대방에 모시는 불단의 조성과 규모로 대방의 성격을 짐작하기도 한다.

대방의 전승역사를 살펴보면 크게 예불과 수행의 기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법당·염불당·원당의 성격을 지닌 대방의 경우 불단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특히 법당과 결합한 인법당의 경우 예불이 핵심을 차지하게 마련이다. 이에 비해 강원·선원의 대방은 수행에 중점을 두기에, 불단이 필수적이지 않고 크기도 작은 편이다.

근래 선방에도 불단이 많아졌지만, 해인사 선원과 남양주 화개선원처럼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선원의 선방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고 불단도 조성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이는 성(聖)에 대한 권위를 배격하고 법(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불단을 두지 않는 전통이 선종에 있기 때문이다.

대방에서 좌선과 발우공양을 할 때는 ‘좌차(座次)’라 하여 앉는 순서를 엄격하게 지킨다. 좌차는 율장과 청규에서 모두 중요하게 다룬 것으로, 구족계를 받은 계납·법랍에 따라 순서를 정하게 된다. 사찰에서 가장 어른인 조실(祖室)의 자리는 불단과 마주 보는 어간(御間)이다. 어간은 불상을 봉안한 중앙과 직선상의 거리에 있는 모든 공간을 뜻하여, 일반인은 법당에 들어설 때 존엄한 영역에 해당하는 어간문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불단과 마주한 어간을 기준으로 동쪽을 ‘청산(靑山)’이라 하여 주지를 비롯해 상주하는 본채 스님들이 앉고, 서쪽을 ‘백운(白雲)’이라 하여 방부를 들인 선객들이 앉는다. 오행으로 동서는 청(靑)과 백(白)으로 구분되니 상주 스님은 청산처럼 자리를 지키고, 선객은 흰 구름처럼 머묾 없이 유행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아울러 청산·백운을 중심으로, 삼함·입승·지전·오관 등 대중생활에 필요한 소임의 자리를 정해 벽에 붙이게 된다.

삼함(三緘)은 총무·교무·재무의 삼직 소임을 말한다. ‘봉할 함(緘)’자를 쓰는 것은, 행정 일을 하다 보면 구설에 오를 수 있으니 늘 몸과 입과 뜻[身·口·意]을 삼가라는 의미이다. 입승(立繩)은 대중을 감독하는 소임으로, 발우공양을 할 때 죽비로 절차를 알리는 역할을 주로 맡는다. 지전(持殿)은 대방을 관리하면서 불단의 향로·다기·촛대 등을 맡는 소임이다. 오관(五觀)은 법랍이 낮은 하판의 스님들로, 여러 가지를 잘 살펴 수행하라는 뜻에서 ‘오관’이라 표현하였다.

일반적인 소임 위치를 살펴봤을 때, 입승·지전은 불단 좌우에서 조실을 마주 보는 쪽이고, 삼함·오관은 대방의 양 측면에서 서로 마주 보는 형국을 취한다. 입승·지전의 위치는 서로 바뀌어도 무관하나, 삼함의 경우 반드시 본채 스님들이 앉는 청산 쪽에 오게 된다. 실제 발우공양을 할 때 이 위치를 지켜서 앉게 되며, 오관의 경우는 다수가 해당하므로 상징적 표기라 하겠다.

스님들은 대방에서 가장 낮은 자리를 ‘탁자 밑’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조실이 앉는 어간을 중심으로 좌차에 따라 사방을 둘러앉다 보면, 불단이 있는 곳은 제일 하판인 스님의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인원이 많으면 ‘중좌(中佐)를 친다’고 하여 가운데 자리를 더 만들어 스님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게 한다.

대방은 대중이 함께 숙식과 수행을 하는 곳이다. 양산 통도사 대방에서 대중이 발우공양을 하고 있다. 〈사진=하지권〉
대방은 대중이 함께 숙식과 수행을 하는 곳이다. 양산 통도사 대방에서 대중이 발우공양을 하고 있다. 〈사진=하지권〉

대방의 추억

예나 지금이나 스님들은 대방의 의미를 ‘대중이 모여 공양하는 큰방’으로 새긴다. 이처럼 대방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발우공양이다. 따라서 음식을 분배하는 행익(行益) 소임의 학인들은 물론 하판의 스님들은 사중의 모든 어른과 선배들 앞에서 법도에 맞게 행동거지를 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

특히 중좌를 칠 때는 어른들의 바로 앞에 가장 낮은 차서가 앉게 되어 있다. 그간의 익힌 습의(習儀)를 점검받기 위한 것이어서, 공양의 모든 행동거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시간이다. 이에 “처음 어른 스님들 코앞에 앉으면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듯이, 바늘방석 같은 발우공양이 하루하루 거듭되면서 스님으로서 위의도 무르익어 가게 된다.

대방은 대중이 모여 사는 가장 큰 생활공간이기에 수행·예불·발우공양처럼 엄중하고 여법한 시간뿐만 아니라, 희로애락이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동안거 중에 성도절이 되면 산중의 대중이 모두 큰절 대방에 모여 용맹정진에 들곤 하였다. 12월 초하루부터 성도절까지 일주일 동안 눕지 않고 좌선에 드는데, 백 명이 넘는 스님이 대방에 첩첩이 둘러앉아 함께 정진하노라면 서로의 수행 열기에 절로 환희심이 났다고 한다.

명절이면 대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나누면서 흥겨운 놀이가 펼쳐졌다. 정초에 만두를 빚거나 동지에 팥죽 새알심 등을 만들 때면 사중의 모든 스님이 대방에 모여 즐거운 울력에 동참했고, 유과와 떡을 만들며 시끌벅적한 시간이 이어지는 데는 민가와 다를 바 없었다. 정초에 암자마다 큰절로 내려와 서로 세배를 나누고 점심 공양을 하고 나면, 큰 원을 그리며 둘러앉아 윷놀이·성불도 놀이가 펼쳐지는 유쾌한 놀이공간이기도 하였다.

평소 별식도 대방에서 함께 만들었다. 강원에서 국수를 만들 때면 대방을 깨끗이 닦은 다음, 학인들이 각자 빈 병을 하나씩 들고 방바닥에 앉아서 병으로 반죽한 밀가루를 밀었다. 울력이 있어 발우공양을 하지 않을 때면 대방에 찬상을 펴놓고 각자 발우 한두 개만 펴서 상공양을 했으며, 메주를 쑤면 따뜻하고 큰 공간인 대방에 매달아 놓아 겨우내 메주 냄새와 함께 살아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사찰 살림이 어려웠던 시절,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오면 숙식을 제공하면서 쌀을 받아 식량으로 삼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날이면 밥을 해주는 것은 물론 대방을 학생들에게 내어주고 스님들은 지대방·다락방 등에 뭉쳐서 잠을 자야 했다. 문제를 일으켜 대중공사가 부쳐지면 해당 스님은 어른부터 후배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회를 해야 하니, ‘대방에 불려 간다’는 것은 두렵기 그지없는 말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대중생활의 중심에 있었던 대방 또한 강원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실정이다. 출가자 감소와 함께 발우공양을 하는 사찰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대중방의 기능 또한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선방 수좌들도 정진·공양은 물론 취침도 대방에서 함께했지만, 근래에는 개인 승방을 두어 하루 정진 일과를 마치면 대부분 각자의 방에서 기거한다. 이는 강원의 학인을 제외하면 대부분 사찰에서 스님마다 방을 따로 쓰는 추세와 함께한다.

스님들은 같은 뜻을 지닌 출가자가 모여 함께 수행하는 것을 더 없는 청복(淸福)으로 여겼다. ‘대중이 공부시켜 준다’는 말처럼, 여법한 수행 분위기는 서로에게 큰 힘이 되고 수행의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수행의 모습은 조금씩 바뀌더라도, 대방문화가 새로운 활기를 찾게 될 날을 기대해 본다.

서울 흥천사 대방 전경. 19세기 말 건립됐으며, 불전 앞에 자리하고 있다. 궁궐 여인들의 원당 기도처나 염불당의 기능을 했다.
서울 흥천사 대방 전경. 19세기 말 건립됐으며, 불전 앞에 자리하고 있다. 궁궐 여인들의 원당 기도처나 염불당의 기능을 했다.
양산 통도사 대방 내부. 대부분의 대방은 공양간과 여러 개의 승방·부속시설로 대방채를 구성하고 있지만, 통도사 대방은 독채로 돼 있다.
양산 통도사 대방 내부. 대부분의 대방은 공양간과 여러 개의 승방·부속시설로 대방채를 구성하고 있지만, 통도사 대방은 독채로 돼 있다.
서울 신촌 봉원사 대방 툇마루. 대방의 툇마루는 공양간의 음식을 옮기는 통로로 사용하였다.
서울 신촌 봉원사 대방 툇마루. 대방의 툇마루는 공양간의 음식을 옮기는 통로로 사용하였다.

 

구미래
불교민속학 박사. 동국대·중앙대·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등에서 불교의 의례·무형유산·세시풍속 등에 대해 강의했고, 현재 불교민속연구소 소장·문화재위원으로 있다. 저서로 〈공양간의 수행자들〉·〈한국불교의 일생의례〉·〈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존엄한 죽음의 문화사〉·〈한국인의 상징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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