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에서
집 없는 곳으로
건기를 맞이해 인도 북부의 부처님 유적지를 순례했다. 부처님 성지가 가까워지면 가녀린 들꽃들이 희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메마른 순례자를 맞이한다. 다가가 만지기라도 하면 이내 무너질 듯 불안한 모습이다. 그들을 지나치지 않고서 거룩하고 안온한 부처님의 성소에 닿을 방법은 없다.
얼마나 많은 탄생과 죽음을 지나고서야 길 위의 삶을 멈출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번 생에서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을까? 그들과 나, 우리 모두 벗어날 수 없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질문을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자각으로 수렴한다.
“부처님은 왜 출가하셨을까!”
당시 시대상이나 신분을 고려하지 않아도 싯다르타 태자의 용기는 위대하다. 그에게는 무한한 사랑을 내미는 아버지와 태어난 지 겨우 7일 된 아들, 그리고 번영에 대한 기대로 가득한 백성이 있었다. 삶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개인 차원의 출가였다면 부처님은 이 많은 짐을 내려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순례자인 나조차 스치듯 다가오는 길 위의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멈출 수 없었으므로.
〈중아함경〉 ‘유연경(柔軟經)’에는 부처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출가하기 전 아버지 숫도다나왕은 나를 봄, 여름, 겨울 세 개의 궁전에 머물게 했다. 궁전 가까운 곳의 연못에는 언제나 푸른 연꽃, 붉은 연꽃, 그리고 흰 연꽃이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내가 목욕을 마치면 시종들이 내 몸에 전단향을 바르고 비단옷을 입혀주었으며, 일산을 받쳐 들고 밤에는 이슬에 젖지 않고 낮에는 볕에 그을리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항상 진기하고 맛있는 요리를 먹으며 배고픈 줄 몰랐다. 내가 별궁에서 놀 때면 늘 아름다운 여자가 옆에서 즐겁게 해주었고, 들로 나가 놀 때는 날랜 기병들이 주위를 경호했다. 나는 이렇게 풍족하게 지냈다. 어느 날 나는 농부가 밭을 갈다가 쉬는 것을 보고 나무 밑에 앉아서 생각했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직 건강하니 언제까지나 건강할 것으로 생각한다. 아직 젊으니, 언제까지나 젊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직 살아있으니, 언제까지나 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젊음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사람은 누구나 병들고 늙고 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죽게 된다.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리석어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범행(梵行, 맑고 깨끗한 행실)을 닦지 않는다. 젊고 건강하다고 거들먹거리며 방일하고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
이렇게 깨달은 나는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부처님 출가의 계기를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 설명하지만, 이것은 생로병사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은유적 서사다. 싯다르타 태자는 어려서부터 세상을 깊이 관찰하고, 동물과 특별한 교감을 나누고, 잠부나무 아래에서 생로병사로 인한 고통에 대해 깊이 명상했다.
스물아홉 살이 된 싯다르타는 숫도다나왕이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출가를 결행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두고 백마에 올라 자신을 가두던 성을 넘어섰다. 싯다르타의 마음에 미련은 남지 않았을까? 두렵지는 않았을까? 왜 그렇게 서둘러야 했을까? 결혼을 받아들이고 라훌라의 성장을 조금 더 기다릴 수는 없었을까? 아버지 숫도다나왕에 대한 효심과 만백성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진리에 대한 탐구의 마음을 포기할 수는 없었을까?
부처님이 자신을 가두던 성벽을 뛰어넘어 수행자의 삶으로 나아간 바로 그날 인류의 역사는 송두리째 바뀌었다. 생로병사를 뒤로하고 달빛이 밝혀주는 해탈의 길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2,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부처님이 보여주신 길을 따라 용기 있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수계식의 날 출가수행자들의 눈빛에는 성을 나서던 부처님이 지녔을 결연한 의지가 보인다.
세상 모든 부처님의 위대한 포기 ‘마하비닛카마나(Mahabhinikkhamana)’는 아직도 그 어떤 이기적인 것에도 물들지 않으며 세상을 밝히고 있다. 보름달의 완전무결함으로 빛나고 있다.
오철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