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원숭이 왕

아득히 먼 옛날, 부처님께서는 한때 원숭이 왕이었습니다. 보름을 걸어야 맞은편 국경에 도달할 정도로 큰 영토를 가진 대왕이었습니다. 거느린 원숭이도 8만 마리나 되었지요. 왕은 원숭이들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도록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왕이 원숭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곳의 나무 열매를 거의 다 먹었다. 내일, 동쪽 산으로 이동할 것이다. 그곳은 망고 나무가 매우 많다. 닷새는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동 중간에는 열매도, 물도 부족하니 아침을 많이 먹어 두도록 해라.”

이튿날, 원숭이들이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왕이 크게 외쳤습니다.

“이동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처음 보는 열매는 내게 허락을 받고 먹어야 한다. 처음 보는 연못이 있으면 내게 허락을 받고 물을 마셔야 한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었습니다. 나무 그늘이 없는 산등성이를 따라 걸었습니다. 원숭이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연못이나 샘도 없어서 한나절 동안 물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어린 원숭이들은 벌써 지쳤습니다.

먼저 길을 떠났던 정찰 원숭이가 돌아와서 보고했습니다.

“조금 더 가면 숲이 나옵니다. 그 안에 큰 연못이 있습니다. 우거진 숲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습니다.

“연못이라고? 다행이구나. 그러나 내가 허락할 때까지 아무도 접근하지 마라.”

다가가 보니 과연 큰 연못이 있었습니다. 8만 마리가 아니라 100만 마리의 원숭이가 마셔도 모자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무도 연못 가까이에 가지 마라.”

왕은 뒤로 물러서라는 표시로 두 손을 내저었습니다. 어린 원숭이들은 물을 먹겠다고 칭얼거리고, 부모 원숭이는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보아라. 연못으로 내려간 발자국은 있어도 올라온 발자국은 없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느냐?”

원숭이들은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습니다.

〈삽화=전병준〉
〈삽화=전병준〉

아니나 다를까? 귀신이 연못 수면 위로 솟아올랐습니다. 풀어헤친 머리카락, 파란 얼굴, 툭 튀어나온 광대뼈, 푸르딩딩한 배, 검푸른 손과 발이 보였습니다. 얼마나 무섭게 생겼는지 모든 원숭이가 덜덜 떨었습니다.

귀신이 말했습니다.

“물값은 받지 않겠다. 어서 내려와서 마시도록 해라.”

왕이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너의 술책을 모를 것 같으냐? 연못으로 내려가면 잡아먹을 것 아니냐?”

귀신은 낄낄 웃었습니다.

“그렇다. 하지만 너희들은 목이 마르다. 너희가 이동하는 길에는 물이 없다. 물을 먹지 않고는 갈 수 없을 것이다.”

원숭이들은 울상이 되었습니다. 귀신이 의기양양하게 외쳤습니다.

“순순히 원숭이 세 마리만 내 밥으로 내놓아라. 그러면 다른 원숭이는 잡아먹지 않겠다.”

“무서워. 나는 물을 안 먹을 테야.”

원숭이의 반은 이미 저만큼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왕은 연못가에 우거진 갈대밭을 바라보며 껄껄 웃기만 했습니다.

왕은 크게 자란 갈대 하나를 꺾었습니다. 대나무처럼 속은 비었지만 마디가 있었습니다. 왕이 갈대를 입에 물고 입김을 모아 ‘후’ 불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마디가 뻥 뚫어졌습니다. 기다란 빨대가 된 것입니다.

“갈대가 짧으면 한 개를 더 연결해라. 그러면 연못에 들어가지 않고도 물을 빨아먹을 수 있다. 저 귀신은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 걱정하지 말고 마셔라.”

왕이 시범을 보였습니다.

원숭이들은 왕처럼 갈대로 빨대를 만들어서 물을 마셨습니다. 왕은 손수 빨대를 만들어서 힘이 약한 원숭이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귀신은 화가 났습니다. 길길이 날뛰면서 갈대밭을 휘젓고 부러뜨리며 돌아다녔으나 원숭이들이 이미 갈대를 한두 개씩 꺾어가 버린 뒤였습니다.

물을 다 마신 후 왕이 말했습니다.

“고마운 갈대였다. 사용한 갈대는 심어주고 가자.”

원숭이들은 늪지에 갈대를 꽂아 놓고 떠났습니다.

이 일로 원숭이들은 왕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 〈본생경〉 제20화 ‘노음촌의 전생이야기’를 고쳐 씀

뒷이야기

아주 오랜 세월 뒤, 원숭이 왕은 더 많은 수행을 하고 더 많은 덕을 쌓아서 부처님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은 제자들과 노음촌의 연못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노음촌 연못에서 자라는 갈대가 여느 갈대와 다른 것을 발견했습니다. 속이 뚫려있는 것은 같았으나 위부터 아래까지 긴 대롱처럼 통하고 있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상하게 여기며 부처님께 말씀드리자 부처님은 수억 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지혜로운 원숭이 왕’입니다.

지혜로운 성자

아득히 먼 옛날, 수레를 좋아하는 임금님이 살았습니다. 임금님은 수레를 금과 은으로 장식했습니다. 햇빛을 받으면 수레가 번쩍거렸지요. 그러나 임금님이 금과 은보다도 더 중하게 여기는 것은 수레 방석이었습니다.

수레 방석은 흑표범 가죽이었습니다. 아주 귀한 것입니다. 며칠 전, 최고의 사냥꾼이 히말라야 산꼭대기에서 잡아 온 것입니다. 흑표범이 추운 곳에서 살아서 그런 것일까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가죽은 부드럽고 윤이 났습니다.

임금님은 그날도 수레를 타고 왕궁 밖을 한 바퀴 돌고 들어왔습니다. 왕궁에 돌아오자 임금님을 따르는 애완견 열 마리가 임금님을 반겼습니다. 저마다 꼬리를 흔들고 몸을 임금님 다리에 비벼댔습니다.

“어허, 오늘은 너희와 놀아줄 시간이 없구나.”

임금님은 온통 마차 생각뿐이었습니다. 임금님은 밤에도 수레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부에게 지시했습니다. “수레를 뜰에 그냥 두어라. 가끔 내 침실에서 내려다보고 싶구나.”

하필이면 그날 밤에 이슬비가 내렸습니다. 흑표범 가죽이 젖자 가죽에서 고기 냄새가 났습니다. 애완견들이 이 냄새를 맡았습니다.

‘와, 이렇게 맛있는 냄새는 처음이야.’

애완견들은 마차에 뛰어 올라가서 흑표범 가죽의 냄새를 실컷 맡았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죽을 조금씩 씹어보다가 나중에는 모두 먹어버렸습니다.

이튿날 새벽, 임금님이 마차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임금님은 놀라자빠질 뻔했습니다. 흑표범 가죽은 간 데가 없고 왕궁 뜰 군데군데 흑표범 털 뭉치가 볼썽사납게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느 놈의 짓이냐? 당장 목을 베겠다.”

임금님의 고함에 마부 셋이 뛰어왔습니다. 마부들은 임금님보다 더 놀랐습니다.

‘이거 큰일이구나. 범인을 못 찾으면 우리가 죽게 생겼구나.’

그러나 아무리 뒤져봐도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나?’

마부들은 임금님의 애완견을 살펴보았습니다. 애완견은 임금님 곁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입도, 털도, 발도 모두 깨끗했습니다.

‘그렇다면?’

마부들은 뜰 가장자리에 있는 하수구를 의심했습니다. 마부들이 입을 모아 아뢰었습니다.

“대왕님, 대왕님께서도 보셨겠지요? 궁궐 밖에는 요즘 길거리 개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개들이 하수구를 통하여 여기까지 들어온 것이 분명합니다.”

임금님도 딱히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임금님이 장군을 불러서 명령했습니다.

“군대를 풀어서 길거리 개들을 모두 잡아 죽이도록 해라.”

길거리 개들은 칼이나 창, 아니면 화살에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습니다. 개들은 깜짝 놀라 공동묘지로 도망쳤습니다. 묘지에는 지혜로운 개가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평상시에도 문제가 생기면 바로 해결해 주는 개였습니다. 그래서 개들은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성자는 개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길거리 개들이 왕궁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하다. 왕궁 수비병이 얼마나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지는 세상이 다 안다. 내가 임금님을 만나야겠다.”

개들이 말렸습니다. 그러나 성자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마라. 내가 너희를 보호해 주겠다. 임금님 군대는 감히 나에게 상처를 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수행을 오래, 그리고 깊게 해 왔다.”

〈삽화=전병준〉
〈삽화=전병준〉

성자가 성문에 도착해서 보니 성문은 열려 있고 병정 대여섯 명이 드나드는 사람의 짐을 검사하고 있었습니다. 성자는 재빨리 뛰어서 성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병정들이 소리를 지르며 성자를 뒤쫓았습니다.

“개를 잡아라!”

성을 지키던 다른 병정도 몰려왔습니다. 병정의 수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개 한 마리를 잡으려고 수백 명의 병정이 헐떡거리며 뛰어다녔습니다. 나중에는 구경하던 어린이는 물론 어른도 뒤따라 다녔습니다. 성자는 어린이들 사이를 잡힐 듯 잡힐 듯 빠져 달아났습니다.

왕궁이 시끄러워졌습니다. 임금님이 무슨 일인가 발코니로 나와 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개 한 마리를 쫓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흙먼지가 날리는지 왕궁 탁자에 흙먼지가 뽀얗게 쌓였고, 임금님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임금님이 소리쳤습니다.

“멈춰라. 내가 개를 만나보겠다.”

왕궁이 조용해졌습니다. 흙먼지가 가라앉았습니다. 성자는 임금님 앞에 엎드려서 물었습니다.

“임금님, 길거리 개들이 흑표범 가죽을 먹은 것이 확실합니까?”

“확실치는 않으나 다르게 해석할 수 없느니라.”

“확실하지도 않은 데 길거리 개들을 마구 죽이시는 것은 옳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길거리 개가 아니면 누가 가죽을 먹었겠느냐?”

성자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임금님 곁에 있는 애완견을 의심해 보셨습니까?”

“내 애완견은 영리하다. 내가 아끼는 것을 먹을 리 없다.”

“임금님, 영리하기 때문에 먹고도 안 먹은 척 할 수 있습니다.”

임금님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좋다. 그러면 내 애완견의 배를 갈라서 확인해 보겠다. 만일 뱃속에서 가죽이 나오지 않으면 너희 길거리 개들 모두는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임금님은 옆에 서 있는 병사에게 애완견의 배를 가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성자가 벌떡 일어나서 앞을 가로막았다.

“아닙니다. 애완견을 묶어두시고 내일 아침에 그들의 똥을 살펴보시면 됩니다. 일부러 죽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임금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성질이 급하다. 더구나 내가 제일 아끼던 흑표범 가죽이 어떻게 된 일인지 당장 알고 싶다.”

임금님은 병사에게 배를 가르라고 다시 명령했습니다.

성자가 한 번 더 가로막으며 말했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우유와 길상초를 준비해 주십시오.”

시종이 우유와 길상초를 가져왔습니다. 성자는 정원에 있는 몇 가지 풀잎을 뜯어와서 길상초와 곱게 빻았습니다. 그리고 우유에 섞었습니다.

“이 약을 애완견에게 먹이십시오. 범인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약을 먹이자마자 애완견들은 음식을 토했습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소화가 안 된 흑표범의 가죽과 털이 한 뭉치씩 나왔습니다.

임금님이 감탄했습니다.

“나의 급한 성격 때문에 죄 없는 길거리 개들을 전부 죽일 뻔했구나. 또한 내 애완견의 목숨도 끊을 뻔했구나. 너의 지혜가 많은 생명을 살렸도다.”

임금님은 성자에게 많은 상을 내렸습니다.

아마 임금님의 급한 성격도 고쳐졌을 거예요.

- <본생경> 제22화 ‘개의 전생 이야기’를 고쳐 씀

뒷이야기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이 설화는 매우 유명합니다. 훗날,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동서양에서 여러 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가 거위로 바뀌어 나옵니다. 금반지를 잃은 주인이 여종을 의심했습니다. 여종은 거위가 금반지를 삼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당장 거위의 배를 가를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인은 여종을 창고에 가두었습니다. 여종은 내일 아침까지 거위를 자기 곁에 묶어달라고 말합니다. 다음 날 아침 거위의 똥과 함께 금반지가 나옵니다. 이렇게 해서 여종은 거위의 생명을 살리지요. 지혜의 중요성을 말하는 동화입니다.

김일환
한국불교아동문학회 회장·동화작가. 건국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 소재 초등학교에서 교사·교감·교장으로 근무했다. 또한 주프랑스한국교육원장·서울특별시교육연구정보원 연구관·서울동부교육지원청 교육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장편동화 〈고려보고의 비밀〉·〈홍사〉·〈예뻐지고 말 테야〉·〈파킨슨 아내와 Le Puy 르쀠 산책하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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