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에 새긴 극락정토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통일신라 673년, 세종특별자치시(구 충청남도 연기군) 비암사(碑巖寺) 발견, 국보, 석제, 높이 43.0cm.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통일신라 673년, 세종특별자치시(구 충청남도 연기군) 비암사(碑巖寺) 발견, 국보, 석제, 높이 43.0cm.

사찰에 가면 종종 쌓아 놓은 검은 기와를 보며 기와불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글귀를 살펴보게 된다. 누군가는 간단명료하게 무병장수와 가족의 행복을 기원하고, 누군가는 빼곡하게 깨알 같은 글씨로 가족과 친지 이름만 쓰며, 누군가는 현실에서 마주한 절박한 상황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부처님오신날 오색 연등을 보다 보면 갖가지 소원을 담아 이름을 적는 사람들을 마주하는데, 미소가 가득한 사람, 무언가 잔뜩 기대한 사람, 의지가 결연한 사람 등 수많은 얼굴 표정을 볼 수 있다. 큰 뜻을 위하든, 작은 뜻을 위하든 나의 이름을 적는다는 것은 불사(佛事)에 참여한 공덕이 그 이름의 주인공인 나에게로 귀결되길 바라는 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광경은 불교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불사 후원의 오랜 역사적 산물로서 약 1350년 전 통일신라시대 조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불사 후원 계층 명시 의미 커

인도에서 시작한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고, 불교문화가 널리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신도들의 기부 문화, 즉 보시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수행에 전념하는 출가자들을 위해 수행할 거처를 마련하고, 음식을 제공하고, 경제적·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후원자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불교의 문화유산이 이처럼 형성될 수 있었다. 특히 사찰을 건립하고 탑을 세우고 불상과 불화를 봉안하는 일은 ‘불사’라 하여 이에 참여하면 큰 공덕을 쌓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완성된 사찰과 성보(聖寶)는 다시 수많은 신도가 사찰로 모이는 계기가 되고 사찰에 대한 또 다른 후원으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불사란 단순히 공덕을 쌓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기부를 이끌어내는 사원 경영의 중요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인도 초기 불교에서부터 보시는 신도의 중요한 덕목이었고, 승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지원은 물질적인 지원인 재시(財施)였다. 불교의 확산과 불교 사원의 건립은 무역로를 따라 이루어졌는데, 재정적인 여유가 있었던 상인들의 후원이 특히 많았기 때문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불교가 확산되면서 시대나 지역, 그리고 후원 품목에 따라 왕공귀족과 관료, 재가신도 등 주요 후원 계층이 달라지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불교미술품에서 발원자나 후원자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삼국시대인 6세기 경부터였다. 국보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539년)처럼 처음에는 소형 금동불상의 광배나 사리기에 제작한 연대, 발원자의 이름, 불상의 존명, 발원 내용을 기록하였다. 이는 조상기(造像記)와 발원문의 시원적인 형태를 보여줬다. 삼국시대 불교미술품에 발원문과 후원자, 그리고 제작자를 기록하는 전통은 6세기 동아시아 불상 제작의 흐름 속에서 이어졌고 그 전통을 계승한 것이 통일신라 초기에 제작된 불비상(佛碑像)이다. 특히 673년 제작된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癸酉銘 全氏 阿彌陀佛碑像)’은 이러한 불사의 후원 계층을 가리키는 용어가 명확하게 등장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불비상의 네 면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통일신라 673년 50여 명의 사람들이 국왕, 대신, 칠세부모와 모든 중생을 위해 아미타불·관음보살·대세지보살상을 조성했다.

불비상이란 비석의 형태에 불상을 조각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중국에는 많은 불비상이 남아있다. 우리나라에는 불비상이 많지 않지만,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처럼 지금의 세종시(옛 연기군)에서 발견된 7구의 불비상이 대표적이다. 아미타불비상은 세종시 전의면 비암사에 있던 비상 3구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원래 이 불비상의 바닥에 별도의 받침돌이 있고 위에는 지붕돌을 얹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지붕돌은 천개의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계유명 삼존천불비상의 형태와 비교해보면 원래의 형태를 짐작해볼 수 있다. 아미타불비상은 네모난 돌의 네 면을 조각한 형태로 정면에는 거대한 연화대좌 위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양옆으로는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 천왕상과 나한상 등이 서 있다. 양측면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천인상을, 뒷면에는 연화대좌 위에 앉아있는 화불 20구를 조각하였다.

명문에는 마모되어 이름은 알 수 없는 ‘전씨(全氏)□□와 述況右□, 이혜개(二兮介) 등이 마음을 모아 (나라)를 위해 아미타불상과 관음·대세지상을 예를 갖추어 만들다……화불(化佛) 20구를 예를 갖추어 만들다……’고 되어 있어 정면에는 아미타삼존이 뒷면에는 화불 20구가 새겨졌음이 확인된다.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정면. 아미타삼존과 권속.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정면. 아미타삼존과 권속.

상·그림에 발원·축원자 적어

정면을 다시 보면 아미타불이 앉아있는 다리 아래로 옷 주름이 흘러내리고 있는데, 사자가 지키고 있는 연화대좌 위의 안정된 삼각형 구도나 부드러운 조각 기법 등은 백제의 전통을 보여준다. 아미타불의 가슴에는 만(卍)자가 표시되어 있고, 오른손을 위로 들어 올리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모은 자세이다. 아미타불의 왼편에 서 있는 보살은 정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이며,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이 서 있다. 양옆의 천왕은 몸에 긴 구슬 장식을 걸치고 있으며, 다른 존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입체적인 신체 표현이 특징이다.

아미타불을 조성한 이유는 서방 극락정토에 태어나고자 했던 당시 신앙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고식(古式)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 집중하여, 후대의 아미타정토도에 보이는 극락정토의 궁궐 같은 전각 모습이나 극락정토의 연못에 피어난 연꽃에서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연화화생은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극락왕생을 바라는 후원자들의 간절한 바람은 바로 양 측면의 조각에 반영되었다. 측면에는 역동적인 용의 얼굴 위로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 즉 주악천인(奏樂天人) 8명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들 천인은 모두 연화 위에 올라앉아 있다. 그런데 이 연화대좌를 가만히 살펴보면 아래로 연꽃 줄기가 이어져 있고, 이 연꽃 줄기는 다시 테두리의 굵은 연꽃 줄기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이 굵은 연꽃 줄기가 불비상 전체 모서리를 감싸고 뒷면까지 이어져 있다. 뒷면의 화불 20구는 각각 연화 위에 앉아있는데 1열에 5존씩 4단으로 나열되어 있다. 화불의 연화대좌와 4단의 굵은 구획선이 맞닿아 있고 구획선은 마치 연꽃 줄기처럼 양옆의 굵은 연꽃 줄기와 이어졌다. 그러므로 아미타부처의 세계에서 넝쿨처럼 뻗어 나온 연꽃 줄기가 이어지고, 그 끝에 피어난 연꽃 위에 주악천인과 화불이 앉아있는 모습이다. 한정된 공간에 극락정토를 압축적으로 표현하였다.

한쪽 측면의 명문에는 ‘계유년 4월 10일에 …… 공경되이 발원되어 50여 명의 지식(智識)이 함께 국왕, 대신, 칠세부모, 모든 중생을 위해 예를 갖추어 절을 짓고 이에 관계한 지식의 인물을 기록한다.’고 기록하였다. 반대편에는 ‘계유년 오월 십오일에 (여러 불상)……을 위해 예를 갖추어 만들다.’고 기록하였다. 양 측면의 기록에 따르면 4월에 발원하고, 5월에 불비상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양 측면의 주악천인상과 뒷면의 화불 20구 옆에 각각 이 불비상을 제작하는데 참여한 주요 후원자들의 직함과 이름을 새겼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달솔신차(達率身次)·진무대사(眞武大舍)·사직대사(使直大舍)·도작공(道作公)·삼구지내말(三久知乃末)·두토대사(豆兎大舍)·혜신사(惠信師)·혜명법사(惠明法師) 등이 있다. 또 인명 중에 전씨·달솔 등 백제의 성씨가 보여 관등·내말·대사 등 신라의 관등을 가진 옛 백제 지역의 유민들이 주요 발원자와 시주자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 참여했는가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각각의 상 옆에 후원자이자 공양자인 자신들의 이름을 방제처럼 새겼다는 점이다.

연꽃 위에 다시 태어나는 연화화생처럼 연꽃 위에 앉아있는 주악천인상과 화불 옆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마치 이름의 주인공이 극락의 주악천인상인 듯 또는 화불인 듯 보인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사찰 건축이나 불상과 불화, 공예품 제작에 관한 기록에서는 훨씬 더 많은 후원자의 이름이 나열되기도 하지만 이처럼 상이나 그림의 일부분에 발원자나 후원자의 이름을 직접 쓰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고대 국가에서 주요 후원자의 이름이 하나의 이미지에 1:1 대응되게 새긴 것도 흥미롭다. 기와에 소원을 담거나 연등에 이름을 적는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선명하게 새겨 극락왕생에 대한 염원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뒷면.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뒷면.

고대 한일 교류 관계 보여줘

이 불비상의 명문이 더욱 중요한 이유는 발원자와 시주자, 즉 후원자를 의미하는 사람들로 ‘지식’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지식’ 또는 ‘선지식’이라는 표현은 경전에 ‘가르침을 이끌고 도와주는 자’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경전 가운데 〈십송률(十誦律)〉에서는 ‘비구에게 여러 음식·자재·재물 등 여러 편의를 제공하는 자’로 사용됐다. 그러므로 ‘지식’은 후원을 매개로 맺는 관계를 포함하며, 시주자·후원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불비상보다 앞서 중국 석굴사원 명문에서는 후원자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법화경〉 등에 나타난 ‘깨달음으로 이끌어주는 가르침을 주는 자’의 의미처럼 주로 추상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고 불상 조성 후원자를 의미하는 사례는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리움 미술관 소장의 ‘삼국시대 신묘명 금동불입상 광배’(571)에 ‘선지식’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계유명 전씨 불비상에서 더 명확하게 ‘지식’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였다.

반면 일본에서는 7세기부터 ‘지식’이 등장하여 나라시대(710∼794)에 ‘지식’이라는 불교 결사가 활발히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불상을 조성하고 사경을 제작하며, 주요 불사를 뒷받침했다. 옛 백제의 유민들로 구성된 50명의 ‘지식’이 일본의 사례처럼 결사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당시 후원자 단체가 부각되고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 점에서 계유명 전씨 불비상은 고대 한일 교류의 관계도 잘 보여준다.

1350년 전 돌에 담긴 간절한 바람은 오늘날 우리의 바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시대나 지역에 따라 불교의 후원 계층에 변화가 있을 수는 있으나, 나라가 평안하기를 바라는 대의와 살아서는 복을 누리고 죽어서는 극락왕생을 기원했던 개인적 염원은 시대와 지역, 남녀 구분 없이 지금까지도 공통된 바람이다. 불교문화의 이러한 전통이 지금까지 계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불교가 우리의 삶과 호흡하는 종교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옆면 주악천인상.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옆면 주악천인상.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좌측면 명문 중 지식 표현.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좌측면 명문 중 지식 표현.
계유명 삼존천불비상, 통일신라 673년, 세종특별자치시(구 충청남도 연기군), 국보, 석제, 높이 94cm. 
계유명 삼존천불비상, 통일신라 673년, 세종특별자치시(구 충청남도 연기군), 국보, 석제, 높이 94cm. 
신소연
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미국, 한국미술을 만나다’(2012) 개최, 반가사유상실·불교조각실 개편(201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조각조사보고〉 발간(2014·2016), 특별전 ‘발원, 간절한 바람을 담다’(2015) 개최, 반가사유상실 ‘사유의 방’ 개관(2021) 등의 업무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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