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영축산에 가슴 뭉클 … 열반당서 정진 다짐

숙연한 마음으로 열반당을 참배하고 법회를 올리는 천태종 전국교원불자연합회 성지순례단.
숙연한 마음으로 열반당을 참배하고 법회를 올리는 천태종 전국교원불자연합회 성지순례단.

천태종 전국교원불자연합회(회장 김필성) 회원 23명은 교무국장 광일 스님의 인솔 하에 1월 16일부터 25일까지 부처님의 생애를 좇는 인도·네팔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9박 10일간의 여정을 2편의 순례기로 나눠 싣는다. 편집자

이번 성지순례는 △룸비니(Lumbini, 藍毘尼) △보드가야(Bodh-Gaya, 菩提伽耶) △사르나트(Sarnath, 鹿野園) △쿠시나가르(Kushinagar, 拘戶那揭羅) △라즈기르(Rajgir, 王舍城), 쉬라바스티(Shravasti, 舍衛城) △바이살리(Vaishali) 등 부처님이 머무르시고, 걸으셨던 8대 성지를 중심으로 부처님의 일생을 좇는 여정이다. 그리고 현대 인도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아그라와 바라나시 방문을 여행의 시작과 마지막에 함께 했다.

16일 정오에 출발한 비행기는 8시간을 날아 20시 50분경(현지 시각 17시 20분) 인도 뉴델리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한국인 가이드를 만난 후 현지 공양주를 태우고 숙소를 향해 출발했다.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길은 러시아워로 정체가 심했다. 안개가 자욱한 도로에서 차들은 경적을 울려댔고, 횡단보도가 없는 길에는 오토바이와 행인이 뒤섞여 있었다. 도로에서 싸움이 일어난 줄 알았는데, 가이드는 “이곳엔 혼돈 속에 질서가 있다. 여기에서 경적을 울리는 것은 배려”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여행 마지막 날까지도 무단횡단과 경적은 적응되지 않았다. 혼잡한 도로를 3시간 달려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 근처의 숙소에 도착했다.

행위에 대한 부처님 가르침

아그라에서 타지마할과 아그라성을 관람한 우리는 다음 일정을 위해 럭나우로 이동해 하룻밤을 묵었다. 18일 아침, 우리는 첫 번째 순례지인 쉬라바스티(사위성)로 향하였다. 쉬라바스티는 부처님께서 안거에 든 기원정사와 기원정사를 보시한 수닷타 장자의 집터, 앙굴리말라의 스투파가 있는 도시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 열반에 드실 때까지 기원정사에서 19회, 동원정사에서 6회 안거하는 등 쉬라바스티에서 25안거를 하셨다. 그만큼 부처님이 오랜 기간 머문 공간이다. 기원정사에서 한 가장 유명한 설법은 〈금강경〉에 정리되어 있다.

일행은 앙굴리말라의 집터와 수닷타 장자의 집터를 둘러 보고, 기원정사에 도착해서 여래향실에서 입제법회를 봉행했다. 여래향실은 부처님께서 생전에 거처하시던 곳이며, 이곳에서 제자들에게 법문을 했다고 한다. 기원정사를 둘러보며, 생각보다 넓은 터에 놀랐다. 여러 지역에서 온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이곳을 가득 메웠으리라. 기원정사에는 큰 보리수가 있는데, 마침 태국에서 온 불자들이 큰 비단 천을 함께 들고 염불하며 보리수에 가사 공양을 올리고 있었다. 이 보리수는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주신 보리수 가지가 자라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기도를 했다. 우리 일행도 차분하게 법회를 올린 후 여래향실에 앉아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고요한 가운데 차 소리, 까마귀 소리, 비로 바닥을 쓰는 소리, 두런두런 들리는 타국 방문객의 염불소리 속에서 내 안의 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흔히 불교를 마음의 종교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부처님은 행동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 특히 “내가 하는 행동이 바로 나이며, 나의 지위와 역할을 만든다.”는 말은 인상 깊다.

〈숫타니타파〉에서 부처님께서는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되기도 하고,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안 되기도 하는 것이다. …… 세상은 행위에 의해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에 의해서 존재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행위에 매여 있다.”고 하셨다.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요, 태어나면서부터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요,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다.”

얼마나 거룩한 말씀인가? 지금도 카스트라는 신분 제도가 있는 인도 사회에서 2,600년 전에 세상은 행위에 의해 존재하며, 누구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부처님 탄생지 네팔 룸비니로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에서 법회를 하고, 주변을 둘러본 후 룸비니로 가기 위해 버스로 4시간여를 달려 네팔 국경 근처의 도시 고라크푸르에 도착했다. 네팔로 가는 날 기상 시간은 오전 2시 30분, 아침식사 시간은 3시 30분, 그리고 오전 4시에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 출발했다. 가이드가 네팔 국경을 통과하는 일이 만만치 않아서 늦게 도착하면 입국 수속이 한없이 지체될 수 있는 만큼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알려줬기 때문이다. 국경은 오전 6시에 열리는데 우리는 가장 먼저 통과하기 위해 2시간 만에 100Km를 달려 예정했던 시간에 도착했다. 덕분에 인도-네팔 출입국사무소의 업무를 일찍 마치고 오전 9시 45분 네팔 룸비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숙소 바로 앞에 있는 룸비니동산으로 향했다. 룸비니는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난 곳이다. 룸비니동산에는 하얀색의 정사각형 건물이 있는데, 부처님이 태어난 곳에 세워진 마야데비 사원이다. 사원에는 마야부인이 목욕한 성스러운 구룡못, 부처님의 탄생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아쇼카왕이 세운 아쇼카 석주, 최근에 조성된 국제사원구역과 긴 수로가 있었다.

우리는 마야데비 사원에 들어가 부처님이 탄생한 자리를 직접 둘러보았다. 구룡못 앞에서는 우리만의 법회를 봉행했다. 청명하고 온화한 날,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난 역사적인 자리에서 봉행한 야외법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룸비니동산은 불자들에게 부처님이 태어난 성스런 장소이지만, 룸비니의 시민들에게는 긴 수로가 있고, 그 수로에 작은 유람선이 다녀서 주말에 와서 쉬고 즐길 수 있는 유원지다. 수로에서 유람선을 타면서 만난 네팔 청소년들은 우리 일행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신들도 BTS를 좋아한다고 반가워하며 함께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다. 순박하고 활기찬 청소년들을 보며 대한민국 국민이란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열반당에서 느낀 부처님의 마지막 숨결

다시 인도로 넘어가기 위해 20일 오전 4시에 공양을 하고 오전 5시 국경을 향해 출발했다. 오전 6시에 도착했는데, 우리보다 일찍 온 버스가 한 대 있었다. 네팔에서 출국수속을 하고 7시경 인도로 넘어가서 입국수속을 하는데 출입국사무소 앞마당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네팔로 넘어가는 인도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늦으면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 있다던 가이드의 말이 엄살이 아니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버스로 3시간을 달려 쿠시나가르에 도착했다.

쿠시나가르에는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곳에 세운 열반당과 돌아가신 부처님을 다비했던 다비장 스투파가 있다. 다비장 스투파는 기단부 직경이 43m, 높이 34m에 달하는 원형 스투파다. 먼저 다비장에 들러 탑을 돌면서 각자 연꽃을 탑에 공양했다. 사실 이 당시까지는 큰 감흥이 일지 않았다.

영축산에서 마지막 설법을 한 부처님은 고향 카필라성으로 가던 중 이곳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드셨다. 열반에 앞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나는 이제 노쇠했다. 예컨대 낡은 수레는 가죽끈에 의해서 겨우 움직이듯이 내 몸도 가죽끈의 힘으로 겨우 움직이는 것 같다.”

부처님은 몸을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정도의 기력만 남은 상태에서 왜 먼 길을 나섰을까? 왕사성의 기원정사나 죽림정사와 같이 설법하며 머물 수 있는 곳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굳이 아픈 몸을 이끌고 길을 나서서 길 위에서 열반에 드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다비장을 본 우리들은 근처 열반당으로 갔다. 일행은 열반당 앞에 모여 부처님께 올릴 가사를 함께 들고 ‘석가모니불’을 염송하면서 열반당에 들어섰다. 열반당 안에는 붉은 사암으로 조성된 6m 크기의 열반상이 모셔져 있었다. 경전에서 본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 그대로였다. 열반상은 머리를 북쪽에 두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머리에 오른손을 받치고 누워 계신 모습이었다. 대좌에는 세 명의 인물이 새겨져 있었다. 오른쪽은 긴 머리의 여인이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짚고 하늘을 보는 모습이고, 가운데는 고요히 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스님의 뒷모습이다. 마지막 왼쪽은 왼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무언가를 사유하고 있는 반가사유상을 닮은 인물이다.

열반당에 들어와 누워 계신 부처님께 준비한 가사를 올리고 법회를 봉행했다. 법회를 봉행하면서 점점 뭐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사홍서원을 마치고 인솔단장 광일 스님께서 부처님 머리맡으로 가서 마치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듣는 것처럼 앉았을 때, 마치 부처님께서 스님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는 듯 보였고,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이 우리에게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비구들이여! 이제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제행은 소멸하기 마련이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또는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과거의 부처님께서 갑자기 현생에 와서 마지막 숨을 고르고 이야기하는 듯 착각이 일어났다. “정진하라.” 수많은 불경에서 읽고, 또 큰스님을 친견하면 듣는 이야기인데,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오면서 목표를 세우고, 정진하리라 결심했다.

부처님과 깊은 인연, 왕사성

쿠시나가르를 떠난 우리들은 21일 바이샬리의 세사리아 스투파와 대림정사를 보고 갠지스강을 건너 라즈기르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인도의 교통이 좋아져 예상보다 일찍 라즈기르에 도착한 덕분에 21일 오후 나란다 대학 터를 방문했다. 라즈기르는 ‘왕사성’으로 불렸던 도시로, 부처님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가 생겨난 도시다.

나란다 대학은 5세기 경 세워진 세계 최대의 불교대학으로, 수많은 구법승이 방문한 학문의 요람이었다. 나란다 대학 입구에는 발굴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현재 건물은 없어지고, 건축물의 기단과 벽만 남아 있지만, 흔적의 규모가 운동장 몇 개를 합한 것보다 컸다. 당시 학생들이 묵었던 방도 볼 수 있었는데, 창도 없는 굴 같이 좁은 방이었다. 방 안에는 더 작은 굴 같은 공간이 있었다. 이미 방문했던 기원정사와 죽림정사, 나란다 대학의 위치와 건물구조가 우리가 익히 보아온 한국 사찰의 요사채가 아니라 요가 수행자들이 수련하는 장소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대학에 불교 경전을 연구하는 승려들이 가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인도 땅에서 불교는 쇠퇴했을까? “고담준론의 현학적인 경지에 접어들면서 점차 현실과는 괴리되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은 설득력 있게 들렸다. 배움과 실천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는 것을 마음으로 새기는 시간이었다.

다음 날(22일) 오전 5시에 기상하여 공양한 후 오전 7시부터 여정을 시작했다. 숙소 근처의 죽림정사와 빔비사라왕의 감옥터를 보고, 영축산(영취산)에 올랐다가 보드가야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다. 죽림정사는 왕사성 북쪽에 있는 절로,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후 불교에 귀의하고 죽림원이 있는 곳에 부처님과 제자들이 수행할 수 있는 정사를 지은 데서 기원한다. 아침 안개 속 대나무밭 사이를 조용히 걸으면서 초기 승단이 이루어진 곳이고, 또 훗날 데와닷따에 의해 승단이 분열되는 사건이 일어난 곳이라 생각하니 모든 곳은 흥망성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축산은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법한 곳으로 유명하다. 정상에 있는 검은 바위의 모양이 독수리[鷲]를 닮고, 이 산을 신성시하여 ‘영(靈)’자를 붙여 ‘영축산’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달리 ‘기사굴산’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제자들에게 설법하신 모임이 ‘영산회상(靈山會上)’이고, 그 모습을 그린 그림이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다.

〈법화경〉의 각 권 첫머리에 경전의 내용을 압축 묘사한 불화인 ‘묘법연화경변상도’가 있는데, 그 변상도를 볼 때마다 이곳의 모습은 어떨까 상상하곤 했다. 〈묘법연화경〉에서는 부처님이 설법할 때 수많은 사람과 신장이 모여 법문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백두산이나 한라산처럼 엄청나게 높은 산 위에 넓은 평지가 있으리라 상상했다. 그런데 직접 영축산을 오르면서 크기를 비교해 보니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둘레길이 있는 동네 야산 정도의 크기였다. 그러나 인도 동부지방의 지형이 넓은 평야인 점을 고려할 때, 영축산은 그 지역에서 빼어나게 우뚝 솟은 돌산의 위용을 자랑한다고 하겠다. 오르는 길에는 보리수로 만든 염주와 불교용품을 파는 상인들과 보시를 바라는 장애인, 가난한 가족들이 늘어서 있었다. 상인 중에는 능숙한 한국어로 영축산 이곳저곳을 설명하는 분도 있어서, 한국 순례객이 많다는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정상은 좁았다. 그 좁은 공간에 미리 와서 기도하고 있는 다른 나라의 불자도 많았다. 부처님을 모신 좁은 공간이 있어서, 우리는 그곳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 법회를 모셨다. 천태종 전국교원불자연합회 회원들과 법회를 하면서 한마음으로 삼귀의·반야심경·사홍서원을 외우고 스님이 축원을 해주니, 특별한 감정이 일었다. 법회를 보는 우리 모습을 다른 나라 불자들이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각자 소구소원을 발원하고 불단 주변을 돌면서 기도가 꼭 이루어지길 기원했다. 영축산을 내려오면서 보니 독수리 바위 주변으로 티베트 불교에서 보는 깃발이 가득했다. 수많은 사람의 기도와 염원이 담긴 깃발을 보면서 낯선 모습에 경탄하면서 카메라에 담았다.

내려오면서 아난존자와 사리불이 수행했던 바위굴을 보았다.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수많은 꽃이 비 오듯 내려 영축산을 장엄했다고 했는데, 이 깃발들이 그때의 수많은 꽃처럼 보였다.

<다음 호에 계속>

천태종 전국교원불자연합회 회원 23명은 교무국장 광일 스님의 인솔 하에 1월 16일부터 24일까지 인도·네팔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천태종 전국교원불자연합회 회원 23명은 교무국장 광일 스님의 인솔 하에 1월 16일부터 24일까지 인도·네팔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룸비니 부처님 탄생지에 세워진 마야데비사원. 아기 부처님이 내디딘 불족적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룸비니 부처님 탄생지에 세워진 마야데비사원. 아기 부처님이 내디딘 불족적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설법단에 오른 일행은 장엄한 영축산의 경관 속에서 법회와 독경, 축원으로 깊은 신심을 다졌다.
설법단에 오른 일행은 장엄한 영축산의 경관 속에서 법회와 독경, 축원으로 깊은 신심을 다졌다.
교학의 정점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나란다 대학은 모두에게 배움의 열정을 느끼게 한다.
교학의 정점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나란다 대학은 모두에게 배움의 열정을 느끼게 한다.
기원정사 보리수에 가사공양을 올리는 태국 불자들.
기원정사 보리수에 가사공양을 올리는 태국 불자들.
룸비니 동산 마야데비사원.
룸비니 동산 마야데비사원.
멀리 타지마할이 보이는 아그라성.
멀리 타지마할이 보이는 아그라성.
잘 정돈된 기원정사의 가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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