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라기눈과

붉은 동백꽃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새 달력을 받고

내가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장전리에서 가장 가까운 농협은 하귀농협인데, 오늘은 하귀농협에서 새해 달력이 배달되어 왔다. 아주 큰 달력이었다. 글씨가 큼직큼직했고, 음력과 절기가 표시되어 있었고, 또 농작물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적혀 있었다. 가령 양력 1월에는 노지감귤·한라봉 등 만감류, 쪽파·마늘·만생종 양파·브로콜리·봄 감자·보리 등의 작물을 관리하는 법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른바 농사 달력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달력을 받았더니 비록 나는 텃밭을 가꾸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마치 내가 큰 농사라도 짓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내 어릴 적 고향집 안방에 걸쳐 있던 달력이 생각났다. 그 달력에는 어머니의 글씨로 그달에 해야 할 일, 잔칫날, 받아야 할 노임(勞賃) 등이 씌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달력은 생활과 생계의 달력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새 달력을 펼치니 앞으로 내게 주어질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꾹꾹 눌러 손으로 직접 쓴 어머니의 글씨 같은, 육필과도 같은 시간이 내 앞에 펼쳐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라기눈과 겨울밤

비가 섞인 눈인 진눈깨비가 내리더니 금세 또 싸라기눈으로 바뀌어 내린다. 낮 기온이 해가 떨어지면서 더 낮아진 탓이다. 싸라기눈은 하얀 쌀알 같은데, 땅에 떨어진 것을 겨우 주워 손바닥에 얹으니 녹아서 형체는 사라지고 물방울만 남는다. 나는 졸시 ‘겨울밤’을 통해 이런 날의 정취를 표현한 적이 있다. “저 싸락눈 소리를 내 높은 다락에 두었으면// 저 싸락눈 소리를 방울 소리로 흔들었으면// 저 싸락눈 소리를 너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삼았으면// 저 싸락눈들을 내 어머니의 내일 아침 그릇에 담았으면”

이제 눈이 내리는 시간이 되었다. 겨울이 깊어 가는 것이다. 나는 눈의 순백이 좋다. 비록 오래가지는 않지만, 안과 밖이 온통 하얀 이 빛이 좋다. 겨울에는 새벽에 일어나 시를 짓다가 문득 나간 마당에서 싸라기눈이 막 내리는 것을 보기도 하는데, 나는 그 시간이 그지없이 좋다. 손이 타지 않아서 오직 맑고 깨끗하고 거짓이 없는 것의 몸을 우주가 내게 보여주는구나 싶기도 한 것이다. 물론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지는 않았다. 가령 여름밤에 반딧불이를 볼 때도 그러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싸라기눈은 함박눈으로 바뀔 것이다. 눈은 밤새 내려서 내일 아침이면 세상에 흰빛이 가득할 것이다. 나무의 잎사귀 위에, 나무의 뿌리 쪽에, 담장 위에, 툇마루에, 파밭에, 바람 곁에, 햇살 아래에, 내 아침 그릇 안쪽에, 다시 활동하는 내 마음에 흰빛이 소복이 쌓여 있을 것이다. 눈이 오는 것을 보고 있으니 혜즙(惠楫) 스님이 쓴 ‘설야(雪夜)’라는 제목의 시가 생각났다. “한 촉 차가운 등불에 불경을 읽다가/ 밤눈이 빈 뜰에 가득 내린 줄도 몰랐네./ 깊은 산 나무들은 아무런 기척이 없고/ 처마 끝 고드름만 섬돌에 떨어지네.”

조용한 응시

진각국사 혜심 대선사의 시에 이런 내용이 있다. “연못가 홀로 앉아/ 연못 속 중[僧]을 만났지./ 묵묵히 서로 보며 웃네./ 대답 않을 줄을 알고.” 이 시를 읽으면 잔잔한 감동과 함께 평온이 온다. 한 스님이 연못 주변을 거닐다가 연못가에 앉아 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스님만 있을 뿐이다. 계절은 짐작할 수 없으나 연못과 연못 주변에 대한 진술이 없고, 별다른 이동이나 움직임이 없고, 스님과 맑은 수면과 수면에 비친 스님의 모습만 제시되고 있어서 아마도 이른 봄이나 늦은 가을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여름에는 연못과 연못 주변의 생명 활동이 왕성하고, 겨울에는 수면이 얼어 있기 쉬울 것이므로 그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아무튼 스님은 연못의 가장자리에 앉아 연못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연못에 스님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음을 발견한다. 스님과 연못 속 스님이 서로를 향해 가만히 웃는다. 마치 이심전심처럼, 구태여 어떤 말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므로. 내가 나의 내면을, 내가 나의 의중을 바로 보는 시간인 셈이다. 잠잠하고 고요하고 평화롭고 차분하고 평온한 응시요, 만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스님의 시에는 이런 시구도 있다. “바람 없는 연못에 물결이 쉬고/ 물에 비친 세상은 두 눈에 가득하네./ 무엇 때문에 많은 말이 필요하겠는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뜻이 통하였네.” 이 시구 역시 관계의 조용한 응시와 그 조응이 설해지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비치는 것, 그리고 비침을 받아들이는 것, 비침을 통해 자신을 보는 것, 이것은 선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른 꽃 마른 잎

사철 내내 잎이 푸른 화초가 있고 제주에는 월동하는 화초도 많지만, 대개 겨울이 되면 화초는 마른 꽃 마른 줄기 마른 잎의 형편이다. 내 집 작은 정원에는 종류가 조금 다른 그라스가 몇 군데 심어 있는데, 이제는 마른 줄기 마른 잎만이 남아 바람에 쓸리는 모습이 스산한 느낌을 줘서 밑동을 전정가위로 잘랐다. 이렇게 잘라도 그라스는 금방 다시 푸른 줄기 푸른 잎으로 뒤덮인다. 그라스는 자르지 않고 두면 사람의 키를 넘어설 정도여서 그 자라는 것을 보고 한 해에 두어 번 잘라주고 또 겨울에 한 차례 더 잘라주고 있다. 다년생 화초인 국화도 이제는 꽃이 다 말라 추운 날에는 어수선하고 쓸쓸한 심사를 일으킨다. 그래서 국화도 땅 위로부터 손가락 세 마디 정도의 줄기만을 남겨두고 잘라주었다. 국화를 잘랐더니 그 뒤에 있던 수선화의 얼굴이 드러났다. 수선화는 어느새 꽃망울을 맺고 있었다. 머잖아 필 것 같았다. 국화를 이어 수선화가 꽃을 받고 있었다. 나는 잘라낸 국화에서 마른 꽃 몇 송이를 손으로 꺾어 방으로 들어와서는 창가에 올려놓았다. 마른 향기가 가늘게 흘러나왔다.

붉은 동백꽃의 시간

동백이 피기 시작했다. 마당에는 수령이 오래되었고 키가 큰 동백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 동백은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석 달간 꽃을 피운다. 나무의 위와 아래, 앞과 뒤에 꽃이 피어 있다. 겨울 햇살이 들거나 눈보라가 불어도 이 동백나무는 붉은 꽃을 피울 것이다. 꽃들이 떨어지면 떨어진 꽃들의 수만큼 또 꽃을 피울 것이다. 나는 아침마다 이 동백나무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심장 같은 이 동백나무가 열심히 꽃 피우는 일에 열중하는 것을 바로 곁에서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뜨거운 심장과 열의여.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영역 너머로

내 집 강아지는 세 살인데 낮에는 마당에서 살고 밤에는 집안에 들어와 식구들과 함께 잔다. 토성이 있는 곳까지 산책을 시키지만,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면 가끔은 앞발에 힘을 주고 멈춰 서서 돌아오려고 하지 않으려 할 때가 있다. 더 먼 곳으로 가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늦추곤 한다. 물론 토성에 이르기도 전에 그만 돌아가자고 할 때도 있다. 그때에도 앞발로 멈춰 서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고민할 것 없이 나는 강아지의 뜻에 맞춘다.

강아지는 점점 더 자기 영역이라는 게 생기는 눈치다. 우편물을 전하려고 우편배달부가 대문 쪽에 보이기라도 하면 컹컹 짖으며 달려 나간다. 예전에는 이런 모습이 없었는데, 요즘에는 담 너머에 들고양이가 지나가도 으르릉대고 저만치 행인이 있어도 으름장을 놓는다. 동네 사람들이 집에서 기르는 개가 여럿이어서 동네에는 낮에도 짖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밤에도 짖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내 집 강아지만 자기 소유의 땅을 가진 것만은 아닌 듯하다. 물론 영역의 개념이 모호해질 때도 있다. 어느 날 밤에는 동네의 개들이 함께 짖는다. 그렇다면 그때에는 동네의 개들이 동네를 공동소유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동네 개들끼리 서로 잘 아는 형편도 아닌데, 공동소유 개념이 있을까,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내 집 강아지는 가끔 목줄이 풀려 집 바깥으로 혼자 나가기도 한다. 어느 때에는 식구가 그걸 발견해 뒤쫓아 가서 품에 안고 돌아오기도 하지만 어느 때에는 모르고 있다가 개가 흙발이 되고 흰 몸에 온갖 검불을 붙여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르러 알게 되기도 한다. 강아지는 풀밭으로, 옆집으로, 들고양이와 고라니와 꿩을 따라가다가 돌아온다. 마당과 담장 너머로, 권태 너머로, 소유와 영역 너머로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알아서 나는 집으로 돌아온 강아지의 몸을 꼭 안는다.

겨울바람의 소리는

겨울바람은 감당하기 쉽지 않다. 차고 매섭고 위력적이다. 그 기세가 사람을 놀라게 하고 또 그 소리가 사람을 두렵게 한다. 바람 소리는 돌담에서도 생겨나고, 빈터에서도 생겨나고, 대숲에서도 생겨나고, 문틈에서도 생겨난다. 주로 벌어져 사이가 난 자리를 지날 적에 생겨난다. 그러나 나는 그 소리가 각각 돌담의 소리요, 빈터의 소리요, 대숲의 소리요, 문틈의 소리라고 말한다. 바람을 받았다가 내놓는 주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을 해도 사람마다 그 말의 목소리가 제각각이듯이. 그러므로 겨울바람의 소리는 일률적이지 않다. 다만 그 기세도 그 소리도 사람을 압도한다.

할머니는 비료 포대를 끌고 다니며

옆집 밭에 서 있는 나목의 무화과나무를 바라보고 있는데, 옆집 할머니께서 비닐 포대를 끌고 다니며 이 나무 저 나무 아래에서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다. 연세가 많은, 마른 몸의 할머니는 허리가 구부정한데 힘에 부치지도 않은지 한 손으로 비닐 포대를 땅에 끌고 다니며 이곳저곳을 다니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비료 포대를 끌고 다니며 무화과나무의 뿌리 쪽에 비료를 뿌리고 있다. 수확도 다 끝난 무화과나무에게 비료를 주는 게 의아했으나 마음을 돌려 생각해 보니 한 해 고생이 많았다고, 이제 밥 먹고 다리 뻗고 좀 쉬라고 무화과나무에게 말하시는 것 같았다. 농사짓는 이의 마음은 이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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