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문화재 10만 컷 찍다가

토속·무속 담은 민화 푹 빠져

윤열수 관장, ⓒ 월간민화
윤열수 관장, ⓒ 월간민화

민화는 ‘백성[民]이 사랑한 그림[畵]’이다. 민화에 그려진 다양한 상징물에는 선조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그려진 사물에 따라 장생도·화훼도·소과도·화조도·축수도 등 종류도 다양하다. 다채로운 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민화는 꽤 오랜 기간 속화(俗畫)·잡화(雜畵)로 불리며 대중의 관심에서는 멀어져 있었다.

운명처럼 민화를 만나 그 매력에 푹 빠져 한평생 민화를 수집한 이가 있다. 윤열수(76) 가회민화박물관장이다. 2002년 가회민화박물관을 설립한 그는 현재 국·내외 전시를 통해 민화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그의 노력 덕분인지 민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윤 관장은 그동안 모아온 민화를 후대에 온전히 전해주고자 최근 자료 정리 작업에 매진 중이다. “민화는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그림”이라고 말하는 그를 만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가야토기부터 시작된 수집욕

어린 윤열수는 마을의 소문난 개구쟁이이자, 무엇이든 모으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1948년 전라북도 남원 아영면 청계리에서 파평 윤씨 집안의 대종손으로 태어난 그는 문중을 이끌어야 할 후손이란 점에서 온 가족의 기대와 관심을 받았다.

그가 나고 자란 남원 아영면에는 2023년 9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가야고분군 중 ‘두락리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다. 크고 작은 고분들은 과거 그와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고분에서 친구들과 놀다 보면 종종 땅속에 감춰져 있던 가야토기 조각이 나오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항상 몸가짐과 옷차림을 단정히 해야 한다.’고 당부했던 어른들의 말씀도 잊은 채,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땅을 파 토기 조각을 주워 집에 가져왔다.

그의 수집욕은 고등학교에 진학 후, 우표를 모으면서 본격적으로 표출됐다. 용돈을 모아 우표를 조금씩 사 모았는데, 1년쯤 지나니 꽤 두둑한 우표집을 가질 수 있었다. 뿌듯한 마음에 볼 때마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는데, 애석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우표집을 통째로 도둑맞고 말았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상심한 그는 툇마루에 앉아 심란한 마음을 달래며 ‘누가 훔쳐 가지 않는 수집품이 뭘까?’하고 고민했다. 그때 부적이 그의 눈에 띄었다. 순간 “이거구나!”하며 눈이 번쩍 뜨였다. 마치 자신만의 보물을 찾은 느낌이었다.

이때부터 윤열수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부적을 모았다. 마음에 드는 부적을 붙여둔 집에 찾아가 얻어오거나, 주인 몰래 떼어오기도 했다. 그가 부적을 모은다는 소문에 마을 어른들은 ‘참 별나다.’고 말하면서도 ‘우리 집에 있는 부적도 떼 가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수집 활동에 무척이나 심취한 탓일까? 윤열수는 첫 대입 시험에서 고배를 마셨다. 대학 진학에 큰 뜻은 없었지만, 서당 접장(接長)이었던 할아버지와 학구열 높은 부모님의 권유로 입시를 다시 준비했고 삼수 끝에 원광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영문학과는 “영어를 잘 해야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주변 어른들의 권유로 선택한 학과였다. 어려서부터 전통문화나 유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학과 공부보다는 문화유적답사 동아리를 조직해 친구들과 지역 사찰·문화재를 탐방하는 일에 더 흥미를 느꼈다. 때마침 학교 박물관에서 조교로도 일할 때였다. 문화재에 대해서 배우고 장학금도 받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였다.

윤열수는 대학교 3학년 때 학사장교(ROTC)에 선발됐는데, 졸업 후 강원도 철원의 제3보병사단 인사장교로 부임했다. 그가 ‘부적을 수집한다.’는 걸 알게 된 부대원들은 휴가를 다녀올 때마다 각 지역의 부적을 가져다줬다. 그 덕분에 군 복무 기간에도 수집품을 조금씩 늘릴 수 있었다.

420개 사찰 사진으로 기록

1973년 4월 제대한 그는 한 달 후 서울 에밀레박물관의 학예연구사로 입사했다. 에밀레박물관은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인 조자용(趙子庸, 1926~2000) 박사가 전국을 다니며 수집한 민화와 도깨비기와를 보존·연구하기 위해 1967년 설립한 곳이다.

청년 윤열수는 전통문화 분야에 관심은 높았지만, 민화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당시 민화는 ‘속화’·‘잡화’ 등으로 불리며 경시돼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런 민화를 수집하는 조자용 박사를 사람들은 ‘괴짜’라고 부르며 수군대곤 했다. 그는 조 박사를 보며 ‘이 사람은 왜 민화를 모을까?’ 호기심을 갖게 됐다. 또 ‘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쥐뿔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 민화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마음을 눈치챈 조자용 박사는 매일 같이 민화 한 점을 앞에 두고 그와 대화를 나눴다. 민화를 그린 이유, 그림에 담긴 상징적 의미 등 대화를 나눌수록 윤열수의 마음에 민화가 조금씩 스며들었다. 조 박사는 “민화는 넓은 의미에서 ‘한화(韓畵)’를, 좁은 의미에서 ‘실용회화’를 일컫는다.”라고 설명하며 “사람들이 민화를 넓은 의미로 바라볼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저 희한하고 오래된 그림 정도로 여겼던 민화가, 무척 매력적이고 풍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윤열수는 “조 박사님의 가르침을 통해 민화를 바라보는 눈이 생겼고, 민화가 한국인의 혼과 마음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그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조자용 박사는 1951년 미국 밴더빌트공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구조공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귀국한 그는 국내 건축사업을 주도하는 한편, 평생 민화와 도깨비기와 등을 수집·연구했다. 윤열수 관장은 조자용 박사를 사사(師事)했으며, 조 박사가 타계한 후에는 그의 업적을 알리고자 세미나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조자용 박사는 1951년 미국 밴더빌트공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구조공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귀국한 그는 국내 건축사업을 주도하는 한편, 평생 민화와 도깨비기와 등을 수집·연구했다. 윤열수 관장은 조자용 박사를 사사(師事)했으며, 조 박사가 타계한 후에는 그의 업적을 알리고자 세미나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74년, 윤열수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평화봉사단(Peace Corps) 소속 칼 스트롬(Carl Strom)과의 만남이다. 하와이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아 한국의 전통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방한한 칼 스트롬이 조자용 박사에게 자신의 연구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조 박사는 윤열수에게 칼 스트롬을 안내하면서 함께 전국 사찰을 탐방해 볼 것을 권유했다.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 집 인근의 사찰에 몇 번 가본 게 불교와 인연의 전부였던 터라 그는 갑작스러운 사찰 탐방 권유에 당황했다. 하지만 사찰 벽화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들을 많이 봐야 민화를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두말없이 조 박사의 말을 따랐다.

윤열수와 칼 스트롬은 지프차 한 대에 카메라 두 대를 싣고 전국을 누비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2년간 420여 사찰을 다니며 다사다난한 일을 겪었다. 산중 사찰로 들어가는 길이 정비되지 않아 길을 헤매거나 가파른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뻔한 적도 여러 차례. 사찰 문화재를 훔쳤다는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남해의 한 사찰에 갔을 때예요. 둘이 사찰 전경과 불탑을 한참 찍는데, 주지 스님이 잠깐 들어와 앉아 있다가 가라고 하셨어요. 차담을 하려나 보다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오더군요. 알고 보니 사찰 문화재 한 점이 사라졌는데, 저희가 가져간 줄 알고 신고를 했다고 하더군요. 다행히 하와이대학교에 보고하기 위해 동선과 시간 등을 기록한 자료가 있어서, 누명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2년간 수많은 문화재를 접하면서 윤열수는 사찰 탐방을 시작하기 전에 비해 전통문화와 문화재에 대한 이해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또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던 소소한 부분도 더 자세히 관찰하게 됐다. 그러던 중 사찰 벽화에도 민화의 요소가 들어가 있음을 알게 됐다. 불교의 신장이 그려진 무신도와 산신각에 봉안된 산신도, 감로도에 그려진 호환(虎患) 모습, 수원 팔달사 명부전 등의 호연도(虎煙圖) 등 사찰 벽화와 공통된 주제를 가졌거나 비슷하게 그려진 민화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는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민중의 종교였던 만큼, 불화를 그리는 과정에 백성이 바라고 원한 이야기가 투영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라고 해석했다.

1975년, 조자용 박사는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민화 32점으로 미국 순회전을 시작했다. 7년간 진행한 순회전에는 윤열수도 실무자로 참여했다. 현지인들의 뜨거운 반응을 지켜보면서 윤열수는 민화가 가진 비전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순회전을 마친 후 민화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동국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윤열수는 칼 스트롬이 귀국한 후에도 틈틈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문화재를 사진에 담았다. 이 작업은 1980년대에 들어 더욱 활발해졌다. 당시 조계종은 방치되거나 보존처리 미숙으로 훼손된 문화재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관련 부서를 신설했다. 이어 각 사찰에 소장 문화재 목록을 사진과 함께 제출하라고 요청했다.

이때 윤열수는 전국을 다니며 인연을 맺은 스님들로부터 사찰 문화재를 촬영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괘불과 산신도 등 다양한 문화재를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다. 2002년도까지 그가 찍은 슬라이드 필름은 9만 6,840장에 달했다.

‘민화’를 위해 박물관 설립

1983년, 조자용 박사는 그동안 수집한 민화와 도깨비기와 등의 유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자 충북 보은군 속리산 인근으로 박물관 이관을 결정했다. 윤열수는 조자용 박사 밑에서 계속 전통문화를 배우고 싶었지만, 서울에 자리를 잡고 있던 터라 결정을 내려야 했다. 결국 그는 에밀레박물관을 그만두고, 그간의 경력을 살려 서울 삼성출판박물관 학예실장으로 이직했다. 이어 1995년에는 가천문화재단에 소속된 가천박물관 부관장직을 맡았다. 그는 두 박물관의 개관 준비에 참여하면서 ‘나만의 박물관 개관’이라는 꿈을 꾸게 됐다. 자신의 수집품을 잘 보관하고, 체계적으로 전시·연구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열망이었다.

남다른 수집욕을 가지고 있던 그는 좀 더 적극적으로 민화를 비롯한 각종 유물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즈음 한국에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굴지의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던 고통의 시기였다. 이때 가치 있는 병풍과 민화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소문이 난 골동품점이 폐업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윤열수는 통장 잔고는 생각하지도 않고 곧장 주인을 찾아가 매입 의사를 밝혔다. 주인은 “1억 5,000만 원에 몽땅 다 가져가라.”고 말했다. 그는 살고 있던 집을 담보로 빚을 내 골동품을 모두 매입했다.

“주변 지인들은 당연히 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집의 화장실을 개조해서 골동품점에서 가져온 물건을 모두 정리했는데, 집에 찾아온 지인이 ‘왜 짐을 이고 사느냐?’며 혀를 찼어요. 하지만 제가 박물관 개관의 꿈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 아내는 저를 이해해 줬고, 격려해 줬습니다. 아내의 지원 덕분에 가회민화박물관을 여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죠.”

2001년 12월, 서울시가 ‘북촌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작은 한옥을 임대해 박물관으로 운영할 사람을 찾는다는 공고를 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그는 곧장 관련서류를 구비해 제출했고, 서울시의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북촌의 아담한 한옥에 ‘가회박물관’이란 이름을 붙이고, 자랑스레 자신의 이름 옆에 ‘관장’을 쓴 명패도 달았다. 이어 칸칸이 나뉜 한옥 리모델링을 통해 전시 공간과 체험 공간을 마련했다. 일은 고되고 경제적 여유도 없었지만, 전통의 향훈(香薰)이 남아있는 서울 북촌에 민화박물관을 개관했다는 사실 자체가 큰 행복으로 다가왔다.

2006년, 전통의 향훈이 남은 서울 북촌에 개관한 ‘가회민화박물관’의 내부 모습. 아담한 한옥에 걸린 민화가 어우러져 관람객에게 소박하지만 따뜻한 감동을 자아낸다. 
2006년, 전통의 향훈이 남은 서울 북촌에 개관한 ‘가회민화박물관’의 내부 모습. 아담한 한옥에 걸린 민화가 어우러져 관람객에게 소박하지만 따뜻한 감동을 자아낸다. 

윤열수 관장은 첫 특별전의 주제를 ‘벽사(辟邪)’로 정했다. 소장하고 있던 부적과 민화 중 벽사도를 추려 전시장 벽의 패널에 걸고, 실제 가정에서 하듯이 서까래와 대들보에도 붙였다. 그러다 보니 한옥 바닥에 누울 때 전시를 온전히 볼 수 있는 ‘한옥 체험형’ 전시가 됐다. 많은 노력과 기대, 설렘 속에 2002년 10월 ‘부적과 벽사 그림’이란 주제로 개관 기념 특별전을 개막했다. 관람객들은 “부적과 민화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 참신했다. 민화를 비롯한 전통문화에 큰 관심이 생겼다.”며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윤 관장은 본격적으로 가회박물관 운영에 매진하고자 가천박물관 부관장직을 내려놨다. 이후 문자도 특별전(2003)·토속신앙의 원형을 찾아서-무속화전(2004)·청도깨비의 익살(2005) 등 다양한 주제의 민화 특별전을 꾸준히 개최했다.

좁고 작은 한옥에서 시작한 전시는 점점 드넓은 세상으로 뻗어나갔다. 2006년에는 몽골 울란바토르 자나바자르박물관(Zanabazar Museum of Fine Art)의 초청을 받았는데, 대한불교진흥원의 후원으로 약 한 달간 민화 30여 점을 소개할 수 있었다. 2007년 박물관 명칭을 ‘가회민화박물관’으로 개칭한 그는 중국·일본·프랑스·호주 등 해외 박물관의 초청을 받아 한국 민화가 가진 매력을 세계에 알리기 시작했다. 질박하지만 독특한 매력을 가진 민화는 외국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특히 2018년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의 국립동양미술관(The State Museum of Oriental Art)에서 ‘일상의 소망과 염원:19~20세기 초 한국전통장식 그림 민화’ 특별전을 열었다. 타 박물관과 연계해 진행했던 그동안의 전시와 달리 27점의 한국 전통 민화로만 채운 단독 특별전이었다.

윤 관장은 민화 대중화의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도 펼쳤다. 민화 이론 전문교육기관인 ‘민화아카데미’를 개설해 후학 양성에 나섰고, 한국의 민화를 깊이 있게 연구하기 위한 ‘한국민화학회’를 창립, 초대회장을 맡았다. 2014년에는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민화를 홍보하기 위해 전문잡지 〈월간 민화〉도 창간했다.

‘민화의 대중화’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에게 뜻밖의 상황이 찾아왔다. 2016년 서울시 조례가 개정되면서 박물관을 이관해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다방면으로 해결책을 알아봤지만, 상황을 해결할 타개책을 찾지 못했다. 결국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현 위치로 박물관을 이관해야 했다.

현재 가회민화박물관은 민화 2,700여 점·무신도 100여 점·부적 800여 점 등 3,8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윤 관장은 그간 모은 유물들을 쾌적하게 보관하고,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박물관 이관을 계획 중이다. 또 민화의 발전을 위해 활동하는 이들이 자신 이후에도 유물들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도록 자료 정리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백성이 사랑한 그림’에 푹 빠져 평생을 함께한 윤열수 관장. ‘민화’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의 민화 사랑을 보여주듯 박물관 곳곳에는 그의 정성 어린 손길이 묻어있었다. ‘민화 대중화’를 위한 그의 아낌없는 노력이 빛을 발해 세계만방에 ‘민화’의 매력이 퍼져나가길 기대한다.

윤열수 관장은 민화와 병풍, 부적 등을 꾸준히 수집하면서 사진으로도 남겼다. 2002년도까지 그가 찍은 슬라이드 필름은 9만 6,840장에 달했다. 
윤열수 관장은 민화와 병풍, 부적 등을 꾸준히 수집하면서 사진으로도 남겼다. 2002년도까지 그가 찍은 슬라이드 필름은 9만 6,840장에 달했다. 
좁고 작은 한옥에서 시작한 전시는 점점 세계로 뻗어나갔다. 윤열수 관장은 몽골·일본·중국·호주 등의 박물관
에 초청받아 서양인들에게 민화를 소개했다. 2018년 벨라루스의 국립미술관에서 개최한 민화전시회 개막식에
서 인사말을 하는 윤열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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