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꼭대기 사찰서 먹은
새해 첫날 떡국 한 그릇

〈삽화=전병준〉
〈삽화=전병준〉

‘밥값하고 사는가?’

사찰에서 공양할 때마다 매 순간 마음속을 강하게 울리는 ‘화두’이다. 어린이법회에 다니던 때부터 사찰에서 음식을 먹었으니 45년가량 사찰음식을 먹은 셈이다. 단언컨대 그 세월 동안, 법회 참석부터 합창단 지휘와 공연 등을 하면서 먹어본 사찰음식은 전부 맛있었다. 사찰에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맑은 기운과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만든 사찰음식이 조화를 이루는데 어찌 맛이 없을 수 있을까?

식탐 생길 때 ‘참회진언’ 암송

〈아함경(阿含經)〉에는 “음식을 정도에 맞게 절제하면 다음의 세 가지 좋은 결과가 뒤따른다. 첫째, 포식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이 없어진다. 둘째, 수명이 연장된다. 셋째, 젊음이 지속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늘 새기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식탐(食貪)이 생길 때면, 나는 참회진언(懺悔眞言)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를 세 번 암송한다. 그렇다고 욕심으로 인한 업이 금세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식탐에서 벗어나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굳건히 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럼에도 식탐을 이겨내기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건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수년 전부터 사찰음식이 ‘웰빙음식’으로 알려지면서 전 세계인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삶의 질을 높여준다고 알려지면서 전 세계의 유명 요리사, 불자뿐만 아니라 개신교·가톨릭 신자 등 이웃 종교인들도 사찰음식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은 계절마다 구할 수 있는 제철 식재료를 다양하게 조리하고 장식하여 시각적으로 유혹당하니 본래의 재료보다 활용된 레시피(Recipe)에 조금 더 관심이 쏠리는 듯하다. 그렇지만 사찰음식은 국내외 사람들로 하여금 불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포교의 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 사찰뿐만 아니라 불교박람회 등 다양한 행사장에서 두루 사찰음식을 경험할 수 있었던 모든 순간이 불보살님 가피 속에 이루어진 것이기에 참 소중하고 감사하다.

떡국 한 그릇에 담긴 가르침

사찰음식을 접한 모든 추억을 다 떠올릴 수는 없지만 조금 더 기억에 남는 세 가지의 에피소드를 소개해 보려 한다. 2002년은 ‘한·일 월드컵’이 열린 해였다. 당시 대한민국은 국민 모두가 하나로 단합한 정열의 해였다. 광화문 거리 응원에도 직접 참여해 봤는데 현장에서의 감동은 두 배 이상이었고,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는 뜨거운 열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을 더욱 뜨겁게 보내고 나니 어느덧 12월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12월의 어느 날 안동 일출암 주지 지웅 스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2003년 해맞이 축제’가 있으니 먼저 답사를 다녀가라고 하셨다. 산꼭대기에 터를 잡은 암자까지는 비포장 돌길. 산 위아래를 오가는 트럭이 유일한 교통 수단이며, 이외에는 도보로 등반하듯 오를 수만 있는 곳이다. 답사를 위해 새벽녘 서울에서 승용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케이크를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케이크가 일그러지지 않게 조심스레 품에 안고, 산 아래 일출암 입구에서 트럭으로 갈아탔다. 트럭은 돌과 흙으로 가득한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렸다. 진작부터 각오는 했지만, 트럭은 너무나도 심하게 흔들거렸다. 그 바람에 내 머리는 트럭 지붕 이곳저곳에 부딪혔고, 품에 안고 있던 케이크는 그만 모양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트럭에서 내렸을 때 엉망이 된 케이크를 본 스님은 한바탕 웃으셨다.

일출암은 우리나라에서 건너편 산등성이 사이로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절 중에 하나다. 스님께선 “12월 마지막 날 사찰에 올라와 2003년 해가 뜨기 전 떡국 한 그릇을 비우고,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음성공양 올리면 된다.”고 하셨다. 스님과의 약속대로 12월 마지막 날 일출암에 미리 등반해 도착한 대중들과 함께 2003년 1월 1일 해가 뜨기 전에 떡국 한 그릇을 받았다. 얇고 어슷하게 썬 떡과 뽀얀 국물이 맛깔난 조화를 이룬 그날의 떡국은 지금까지 필자가 먹어본 떡국 중에 가장 맛있는 떡국이었다.

그런데 밤을 새워 기도했던 불자님들이 먹은 떡국은 조금 더 맛이 깊었을 것 같다. 같은 떡국이라도 먹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수행의 깊이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입김이 얼 정도의 차가운 바람이 부는 영하 15도의 날씨였기에 드레스와 연미복 속에 내의를 껴입어야 했는데, 떡국 한 그릇 덕분에 환희심 나게 음성공양을 마칠 수 있었다.

수백 그릇의 떡국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고 그 마음을 기쁘게 받는 대중의 모습에서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었다. 추운 겨울 모인 대중이 따뜻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정성스레 재료를 손질하고 끓여낸 한 그릇 한 그릇에 자비스러운 미소까지 담아 주시니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을 몸소 느낄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했다. 그리고 대중들이 떡국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맛있게 드셔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봉사자들의 모습에서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과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을 배웠으니, 사찰음식에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이 모두 담겨 있는 듯하다.

〈삽화=전병준〉
〈삽화=전병준〉

‘빨랫비누 맛’ 고수 넣은 김밥

두 번째 이야기는 2004년 봄의 일이다. 4월은 온갖 꽃이 화사하게 옷을 입어 우리의 마음을 설렘으로 물들이는 봄의 향연이 펼쳐지는 계절이다. ‘제3회 거제 시민을 위한 연꽃음악회’에서 공연을 한 뒤 출연진과 봉사자 모두 계룡사에 가서 공양하기로 했다. 공양간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100m쯤 남았을까? 공양간에서 자주 맡아본 강렬한 향신료 냄새가 풍겨왔다. 바로 고수 냄새였다. 고수는 얼핏 보면 미나리로 착각하기 쉽다. 실제 고수는 미나리과 식물이기도 하다. 사찰에서는 비빔밥을 비롯해 거의 대부분의 음식에 고수가 들어간다. 그중 고수 김밥의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당근·우엉·물들이지 않은 하얀 단무지 등의 재료에 고수를 더해 돌돌 말은 김밥. 이날 단원 대부분은 고수를 처음 접했다. 한 남자 단원은 고수에 대해 “독특한 향이 ‘빨랫비누 맛’이라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 단원은 지금도 여전히 고수를 먹지 못한다. 그 남자 단원을 제외한 다른 단원들에게 지금, 고수는 ‘없어서 못 먹는’ 음식 중 하나가 됐다. 고수는 처음 접하면 독특하고 강한 향에 놀라 조금 먹기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입 안에 넣고 천천히 씹다 보면 몸에 기운을 북돋아 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오래전 어느 스님께서 “고수는 다른 식물보다 기(氣)가 20배 넘게 들어 있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문득 스쳐 간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어본 고수 김밥. 아마도 봄 향기 가득한 사찰의 풍경과 음식을 준비하신 분들의 정성이 가득 담겼기 때문인지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속에 고수 향이 진하게 되살아나는 듯하다. 그 맛이 그리워 집에서 고수김밥을 만들어 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그때 그 맛을 흉내낼 수 없었다. 사찰음식은 귀한 추억과 맞물려 있을 때, 진한 감동과 향수로 남게 되는 것 같다.

김에 싼 가래떡의 참맛

세 번째 기억은 2006년 12월 공주교도소 송년법회를 마친 뒤 점심 때 먹은 가래떡이다. 들기름을 바른 후 소금을 뿌려 알맞게 구운 김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가래떡을 감싸서 먹은 떡이었다. 지행 스님은 오랜 세월 동안 공주교도소 봉축법회와 송년법회를 지원해 왔고, 육·해·공 사관학교와 전방 지역 군부대 등 열악한 군 법당을 찾아가 법공양을 올리기를 서원·실천한 분이다.

이날 스님은 가래떡과 일일이 정성스럽게 구워 들기름을 바른 김을 전날부터 준비해 가져오셨다. 송년법회 후에는 12월에 생일을 맞은 모범수들에게 양말과 가래떡을 나누어주셨는데, 덕분에 나도 들기름을 바른 김이 곁들여진 가래떡을 먹을 수 있었다. 김으로 싼 가래떡은 간단하면서도 풍미가 가득한 지혜로운 음식이었다. 지금도 가끔 집에서 해먹을 정도이니 자주 생각나는 음식, ‘영혼의 음식’인 셈이다.

사찰음식에 대한 지식이 얕아 사찰음식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다만 ‘만들기 번거롭거나 화려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스님들이 사찰 텃밭이나 인근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재료로 조리한 음식은 모두 사찰음식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 그 또한 사찰음식이 아닐까?

사찰음식에 담긴 서원

사찰음식 중에는 조리법이 간단한 게 많다. 그래서 더욱 정겹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 군부대 공연을 의뢰를 받아 지행 스님이 주석하는 파주 보문원에 간 적이 있다. 스님은 손수 담근 된장에 담백한 두부를 넣은 구수한 된장찌개와 텃밭에서 키운 상추를 씻어서 군침 도는 쌈장에 싸서 먹을 수 있게 준비해 주셨다. ‘장맛이 좋으면 모든 음식이 맛있다.’는 옛말이 그냥 생겨난 말이 아님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사찰음식은 만드는 사람의 서원이 깃든 귀한 음식임에 틀림이 없다.

옛 일을 회고하며 글을 쓰다 보니 ‘그때 그 맛’이 생각나 군침이 도는 건 어쩔 수 없는 중생심인가 보다. 나는 사찰음식을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해진다. 스님과 불자들은 공양하기 전 ‘공양게(供養偈)’를 염송한다.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내려놓아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삼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내게 이토록 귀한 사찰음식이 오기까지의 모든 인연에 감사드리며 ‘육바라밀’을 행하는 ‘찬불 포교사’로 밥값을 하겠노라고 불보살님 전에 기도를 올린다. 사찰음식은 ‘몸으로 받고 마음으로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사찰음식에는 우주의 에너지가 담겨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육바라밀’이 그대로 담겨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사찰음식, 그것은 내가 이번 생에 접한 가장 큰 인연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지금 누군가가 필자에게 “여전히 사찰음식이 다 맛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언제나 같다.

“어느 사찰의 음식이든, 어떤 음식이든, 사찰음식은 다 맛있습니다.”

황영선
L.M.B. Singers 대표이자 창단 멤버. 건국대학교 음악교육학과 학사, 동 대학원에서 성악전공으로 음악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국내·외에서 독창회 및 오페라 주역, 기획공연, 종교음악으로 1,000여 회 연주했다. 2009년 제18회 행원문화상을 수상했고, 제5회 여성불자 108인에 선정된 바 있다. 30여 년간 군법당에서 불자장병들에게 찬불가를 지도하고 있으며, 현재 심복사·용학사·정심사 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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