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밑거름으로 삼을
음식 만드는 신성한 영역

부뚜막에 올라가 가마솥의 밥을 푸는 통도사 공양주. Ⓒ하지권
부뚜막에 올라가 가마솥의 밥을 푸는 통도사 공양주. Ⓒ하지권

‘주인의 자리’인 동쪽에 위치

사찰 부엌을 ‘공양간(供養間)’이라 부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공양’이 식사를 뜻하는 말로 쓰인 것처럼 ‘공양간’이란 용어 또한 근현대 어느 시기에 정착된 듯하다. 이전에는 정지·정주·부엌이라 불렀고, 문헌에는 고원(庫院)·고주(庫廚)·향적당(香積堂)·주방(廚房) 등이라 기록하였다. 은해사 백흥암·백양사·금산사·동학사 등의 공양간에는 지금도 ‘향기로운 음식이 가득한 곳’이라 하여 ‘향적당’·‘향적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사찰의 공양간은 대중생활을 하는 승가의 특성에 따라 일반 부엌과 다른 원리로 작동한다. 민가의 부뚜막이 올라갈 수 없는 금기의 영역인 데 비해 공양간은 그렇지 않다. 부뚜막이 높고 수백 명분의 밥을 짓는 가마솥이 걸려 있어, 밥을 푸거나 음식을 하려면 부뚜막에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은 계단을 두어 일상적으로 부뚜막을 오르내렸다.

또한 민가에서는 부엌을 여성의 공간이라 하여 음(陰)에 해당하는 집의 서쪽에 두었다. 음양의 적용뿐만 아니라 서쪽에 두면 쌀을 일거나 밥을 풀 때 조리질·주걱질이 집 안쪽을 향하니, 복이 나가지 않는다는 담론도 전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선종 사찰에서는 이와 반대의 방위를 취한다. ‘서승당 동고원’이라 하여, 남북축을 중심으로 스님들이 좌선과 숙식을 하는 승당(僧堂)은 서쪽에 두고, 음식을 만드는 고원은 동쪽에 두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서쪽은 객의 자리이고 동쪽은 주인의 자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아궁이와 부뚜막을 설치하고 솥을 거는 것은 그곳에 터전을 잡겠다는 뜻이다. 그 영역을 동쪽이라 보았으니, ‘동(東)이 곧 근원’이라는 의미가 담겼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공양간의 방위는 절의 입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하지만, 본채 스님들이 절에 머물며 선방 수좌들을 뒷바라지하는 구도는 변함이 없다.

아울러 민가의 부엌은 안방과 연결된 문을 두어 이곳을 통해 음식을 전달했지만, 사찰의 공양간은 대방과 직접 통하는 문을 내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대방은 수행공간이니 음식을 직접 들이지 않고, 대방 툇마루와 연결된 곳에 문을 내어 단계적으로 옮기는 것이다.

공양간에 방을 딸려 두고 공양주가 거처하거나 손님이 묵는 용도로 쓰는 사찰도 많다. 이를 ‘뒷방·공양주 방’이라 부르면서, 발우공양을 하지 않을 때 여기서 간단하게 하는 식사를 ‘뒷방 공양’이라 불렀다. 범어사 대성암에서는 공적으로 쓰는 공간이라는 뜻에서 이 방을 ‘공석방(公席房)’이라 하였다.

전통 부엌은 아궁이에 불을 때 구들을 덥혀 난방과 취사를 겸하는 구조다. 따라서 온돌방과 붙어 있게 된다. 사찰에서는 대방과 나란히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공양을 위해 모두 대방에 모이게 되니, 민가의 부엌이 안방에 딸려 있듯이 사찰의 공양간은 대방과 짝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통도사·송광사처럼 ‘반빗간’이라 하여 취사 전용의 독립된 공양간을 따로 갖추거나, 행사를 위해 바깥에 부뚜막을 걸어 한뎃부엌·헛부엌을 만들기도 한다.

공양간의 규모는 사찰의 규모와 비례하게 마련이다. 인법당(因法堂) 형식의 작은 암자는 대개 한 건물에 법당·승방·부엌을 함께 두니 부엌도 한 칸 정도를 차지하고 아궁이도 한두 개 둘 따름이다. 이에 비해 대찰의 공양간은 민가의 열 배에 이르는 압도적 크기를 지닌 곳이 많았다. 부목이 높은 나뭇짐을 지게에 쌓은 채 들락거릴 정도로 천장이 높고, 부엌 바닥에 자리를 펴고 수백 포기의 김장을 할 수 있을 만큼 넓었다.

공양간 흙바닥에는 한쪽에 장작·솔가지가 쌓여 있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과 밭에서 수확해 온 채소 손질이 매일 반복되었다. 그러나 거친 재료를 다루며 식생활을 꾸려나가는 사찰 공양간은 놀라울 만큼 정결했고, 수행하는 대방 스님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정숙하게 후원 일을 꾸려나갔다. 경작에서부터 음식 만드는 일까지, 수행과 함께 자급자족의 삶을 꾸려간 스님들의 후원 생활은 서민들의 삶보다 고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향적당(香積堂)’ 현판을 단 은해사 백흥암.
‘향적당(香積堂)’ 현판을 단 은해사 백흥암.

위풍당당 검박한 부뚜막

예전에는 공양간이 얼마나 컸던지, 공양간에 들어서면 위풍당당한 부뚜막과 커다란 아궁이에 압도당하기 마련이었다. 서너 개의 무쇠솥이 걸린 길고 널찍하며 엄청난 높이의 검박한 부뚜막은 공양간의 위용을 좌우했다. 그런가 하면 속을 알 수 없는 아궁이의 기세 또한 만만치 않아, 시인 김삿갓은 특유의 유머와 호방한 기개로 거대한 아궁이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머리는 호랑이요 입은 고래 같으나
자세히 보면 범도 아니요, 고래 또한 아니로다.
일꾼이 불만 잘 피워놓으면
호랑이도 고래도 구워 먹을 수 있겠구나.

대중이 많은 절에서는 아궁이가 키보다 높아서 불을 땔 때도 선 채로 들락날락했다. 청암사 백련암은 큰방 아궁이에 불을 때어 지대방까지 덥혔는데, 군불을 넣을 때면 여럿이 아궁이에 들어가서 안쪽 스님에게 장작을 전달해 불을 피웠다. 그렇게 한 번 불을 지펴놓으면 삼사일 동안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공양간의 세간 가운데 으뜸은 가마솥이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쓰더라도 직접 불을 때어 가마솥에서 만들어 내는 맛을 따라잡기가 힘들어, 스님들은 ‘가마솥이 맛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아궁이 불 조절만 잘하면 ‘불과 시간의 조화’로 만들어 낸 최상의 음식이 탄생하게 된다. 검고 두툼한 가마솥이 달구어져 만들어 내는 갖가지 맛은 세월과 함께 무르익은 노모의 손맛처럼 더없이 믿음직스럽고 신비로운 힘을 지녔다.

가마솥 밥은 불 조절이 가장 중요하다. 나무를 가득 넣어 불을 지피다가, 나무를 빼내고 숯의 열기만으로 뜸을 들였다. 공양주는 솥을 떠나지 않고 김 냄새를 맡으며 밥이 타지 않는 것은 물론 누룽지가 많이 눋지 않도록 정성을 들였다. 밥이 다 되면 대개 선 채로 긴 자루가 달린 삽 주걱으로 섞고 펐지만, 체구가 작은 스님은 솥 주위를 뱅글뱅글 돌면서 큰 주걱으로 조금씩 섞으며 퍼야 했다. 갑작스레 공양주를 맡아 가마솥 밥을 짓게 된 스님들의 실수담도 무수하다. 밥물이 ‘부르르’ 끓으면 얼른 넘치지 않게 물을 떠내고, 솥에서 ‘탁탁’ 타는 소리가 나면 놀라서 물을 도로 부어 삼층밥을 만드는 것이 초보자의 제일 흔한 실수이다. 가마솥 밥의 핵심이 불 조절임을 몰랐던 것이다. 이렇게 한철 공양주로 살고 나면 수백 명분의 대중공양도 거뜬히 해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대중의 밥맛을 맞추는 일도 난제이다. 통도사의 어느 스님은 학인 시절에 공양주인 상반두(上飯頭)가 되어 처음 밥을 지어 올리니, 진밥·고두밥 취향에 따라 “설익었다, 잘 됐다.”는 서로 다른 평이 돌아와 고민에 빠졌다. 어디에 맞출지 몰라 선배들에게 상담했더니 “방장스님한테 맞춰라.”는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최고 어른의 입맛에 맞추되 새로 바뀐 상반두의 밥에 대해 별말 없으면 무사통과이고, 만약 방장스님이 ‘한 말씀’하게 되면 그날이 곧 ‘공양간 폭탄 맞는 날’이라는 것이다.

운문사의 재석 스님은 공양주로 3년을 살면서, 가마솥 씻은 물을 한 방울도 버리지 않고 다 마실 정도로 신심이 깊고 알뜰했다. 솥을 깨끗이 씻어도 물을 조금 부어놓고 아침에 나가보면, 오래된 가마솥 바닥에 틈마다 끼어 있던 잿빛 찌꺼기가 또 우러나와 있곤 했다. 이에 물을 따르고 가라앉은 찌꺼기를 다 마셨다니, 가마솥과 함께한 스님들의 신심과 공덕은 끝이 없다.

가마솥에서 각 단에 올릴 마지를 담는 봉은사 공양주(왼쪽)와 송광사 조왕단에 마지를 올리는 행자.
가마솥에서 각 단에 올릴 마지를 담는 봉은사 공양주(왼쪽)와 송광사 조왕단에 마지를 올리는 행자.

아궁이 앞에서 다진 초발심

공양간은 스님들의 통과의례적 삶을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식생활은 삶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기에 공양간의 소임을 한 단계씩 거치며 정식 스님으로 거듭나고, 새로운 단계에서 또 다른 후원(後院)의 삶을 열어가기 때문이다.

1960〜70년대만 해도 출가하면 몇 년간을 행자로 살기 일쑤였다. 행자의 주요 소임은 하루 세 끼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이었으니 ‘신심이 끝도 없던 때’라 아궁이 앞에서 초발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부지깽이로 부뚜막을 두드리며 염불을 익히는가 하면, 서러울 땐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타오르는 불길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무념무상이 찾아들곤 했다.

그들에게는 소박한 부뚜막에 머물며 공양간을 지키는 조왕(竈王)이 더없이 든든하고 편안한 신장(神將)이었다. 따라서 이른 새벽 부엌에 들어서면 맨 먼저 조왕단에 불을 밝히고 하루의 무사함을 기도하게 된다. 갱두(羹頭)를 맡았을 때는 시원하고 깊은 맛이 나도록 국이 잘 끓여지길 빌었고, 공양주 소임이 돌아오면 밥에 돌 없이 고루 잘 익기를 빌었다.

공양간 내부를 지키는 신격이 조왕이라면, 외부에는 신장이 공양간을 수호한다. 공양간 출입문에 한 쌍의 신장상을 그린 곳이 많아, 사천왕이 사찰 초입을 든든하게 지키듯 공양간을 삿된 침입으로부터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장은 모두 창·칼·바위 등의 무기를 든 무장(武將)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공양간은 스님들이 수행의 밑거름으로 삼을 음식을 만드는 신성한 영역이기에 더없이 정결하게 관리했다. 가마솥은 윤이 나게 닦아두었고, 황토로 마감한 부뚜막엔 한두 달마다 새 흙으로 덧바르는 맥질을 하였다. 그런데 공양을 지을 때마다 부뚜막에 발자국이 나고 그을음이 올라오니, 매일 맥질을 하는 스님들도 있었다. 부뚜막 한쪽에 대야를 준비해 두고 저녁 숭늉을 내간 다음, 물에 푼 황토를 바르며 하루를 마무리한 것이다. 맥질하여 새 흙으로 말끔히 단장한 부엌을 보며 흡족했다는 스님들의 신심이 참으로 놀랍다.

그런가 하면 당시 큰스님들은 바늘을 가지고 다니며 공양간 바닥에 떨어진 밥알을 찍어서 씻어 먹음으로써 몸소 수행자의 자세를 가르쳤다. 음식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대하면, 은사나 노스님에게 어김없이 ‘제석천(帝釋天)의 눈물’이라는 경책을 들어야 했다. “한 톨의 쌀이 버려지면 그 쌀이 다 썩을 때까지 제석천이 합장한 채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이처럼 버려진 쌀 한 톨이 온전히 썩을 때까지 제석천이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는 상상만으로도 수행자를 황송하고 부끄럽게 만든다. 제석천이 벌을 내리는 것보다 그를 슬픔과 안타까움에 빠지게 하는 일이란 걸 일깨움으로써 오히려 더욱 ‘해서는 안 될 일’로 가슴에 새긴 것이다. ‘시주에 의지하는 출가자라면 한 톨의 쌀에도 소홀함도 없어야 한다.’는 철두철미함이 ‘제석천의 눈물’과 같은 담론을 만들어 낸 셈이다. 이처럼 갓 출가한 행자시절부터 엄한 교육이 이루어져, 공양간에는 밥알 한 톨도 버려지지 않는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다.

사찰마다 현대식 주방이 들어서면서 전통 공양간은 용도를 잃어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출가수행자의 후원문화와 자취가 담긴 소중한 공간이기에, 여건이 되는 사찰에서는 가마솥에 불을 때어 밥 짓는 일을 이어가기도 한다.

공양간의 화력이 장작에서 연탄으로, 연탄에서 가스로 변화하는 과정을 온전히 겪은 노스님들은 초발심을 다지며 서로를 비춰보는 대중생활의 중심에 공양간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우리 때 스님들은 밥값하고 살았다.”

진관사 공양간.
진관사 공양간.
구미래
불교민속학 박사. 동국대·중앙대·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등에서 불교의 의례·무형유산·세시풍속 등에 대해 강의했고, 현재 불교민속연구소 소장·문화재위원으로 있다. 저서로 〈한국불교의 일생의례〉·〈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존엄한 죽음의 문화사〉·〈한국인의 상징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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