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 성리학의

취약한 사후세계

불교의례로 보완

한국 전통문화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문화재청이 지정한 국가무형문화재 중 불교 무형문화유산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적다. 1973년 봉원사 영산재(靈山齋)가 중요무형문화재 50호로 지정된 이후 2013년과 2014년 들어서야 불교 의례로 수륙재(水陸齋)가 지정됐다는 사실은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당시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 125호로 삼화사수륙재, 126호로 진관사수륙재 그리고 127호로 아랫녘수륙재를 지정했다. 여기서 수륙재의 무차평등한 법식(法式)과 재회(齋會)의 연원을 부처님 재세 시 인도에서 행했던 의례 ‘시아귀회(施餓鬼會)’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렇지만 수륙재가 문화재로 지정받을 때의 사료적 근거는 태조 4년(1395) “임금이 수륙재(水陸齋)를 관음굴(觀音堀)·현암사(見巖寺)·삼화사(三和寺)에 베풀고 매년 봄과 가을에 항상 거행하게 하였다.”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맥락에서 불교 의례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나라 전통문화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국가무형문화재 중 불교 무형문화유산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적다. 1973년 영산재가 중요무형문화재 50호로 지정된 이후 2013년에 와서야 수륙재가 지정됐다. 사진은 천태종 구인사에서 열린 수륙영산대재.
우리나라 전통문화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국가무형문화재 중 불교 무형문화유산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적다. 1973년 영산재가 중요무형문화재 50호로 지정된 이후 2013년에 와서야 수륙재가 지정됐다. 사진은 천태종 구인사에서 열린 수륙영산대재.

성리학 대척점에 선 불교

평소 우리는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불교 의례를 설행했다는 점에 대해 크게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까닭은 고려 사람이나 조선 사람이나 죽고 사는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에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는 큰 차이가 있다. 고려는 불교의 프리즘(Prism)으로, 조선은 유교의 프리즘으로 삶과 죽음을 바라보았다. 프리즘이 외부의 빛을 굴절시키듯이 우리가 어떤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우리가 지닌 사유의 틀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고려와 조선을 생각할 때 이와 같은 인식의 프리즘이 갈아 끼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건 무척 중요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조선을 만든 유교의 프리즘은 ‘성리학(性理學)’이다. 성리학은 공자(孔子, B.C.551~B.C.479)를 시조로 하는 학문인 유학을 송대(宋代) 주희(朱熹·朱子, 1130~1200)가 성리(性理, 인간의 성품과 자연의 이치)를 중심으로 집대성하면서 불리게 된 명칭이다. 성리학은 당·송(唐·宋)을 거치면서 체계를 갖추게 되는데, 당시 성리학 이론과 철학의 반대편에는 융성했던 불교가 있었다. 즉, 불교 사상과 대척점에서 출발한 주자의 성리학이 고려말 원나라를 통해 한반도에 전파된 것이다. 이런 궤적으로 볼 때 불교와 유교는 여러 지점에서 불가피하게 충돌했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다. 고려말에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들은 불교적으로도 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선에 들어와 입장을 180도 달리하게 된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불씨잡변(佛氏雜辨)〉은 〈주자어류〉 ‘석씨’편의 조선적 불교 비판서인데 이런 반전된 분위기를 대변한다.

조선 성리학자들의 불교 비판은 다각적인 면에서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불교의 윤회설은 기(氣)의 모임과 흩어짐을 기본으로 하는 현세 중심적 유교의 인생관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이는 불교의 내세관(來世觀)이 초래할 윤리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다. 또 효(孝)·경(敬) 등 윤리와 도덕을 중시하는 중국문화에 인도 불교가 들어와 무연자비(無緣慈悲)의 실천을 강조해 사회의 혼란을 부추겼다고 보았다. 고려말 번성한 사찰과 사원경제의 부패를 불교가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부추긴 사례로 여긴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선이 건국하자, 불교는 한반도에 들어온 이래로 처음 시련을 맞게 된다. 그동안 불교는 왕실과 집권층의 비호를 받으며 인도의 브라만(Brahman)에 버금가는 특권을 누려온 게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이 세워진 후 이런 분위기는 돌변했다. 계급의 최하층에 배속되어 도성 출입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형국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이 시련의 시기를 어떻게 건널 수 있었을까?

고려말에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들은 불교에 친숙했지만, 성리학을 근간으로 삼는 조선이 들어선 후 입장을 180도 바꾼다. 정도전의 〈불씨잡변〉은 이런 반전된 분위기를 대변하는 대표적 사례다. 사진은 단양 도담삼봉 인근에 세워져 있는 정도전 동상.
고려말에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들은 불교에 친숙했지만, 성리학을 근간으로 삼는 조선이 들어선 후 입장을 180도 바꾼다. 정도전의 〈불씨잡변〉은 이런 반전된 분위기를 대변하는 대표적 사례다. 사진은 단양 도담삼봉 인근에 세워져 있는 정도전 동상.

사후세계와 불교 의례의 필요성

결론부터 말하면 조선의 성리학은 불교의 역할을 전면 대체하지 못했다. 고려의 집권층과 승려들이 아무리 부패했다고 하더라도 고려 불교는 조선에 와서도 나름의 효용성을 지니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불교의 효용성은 성리학이 제시하지 못하는 사후세계였다. 물론 유교도 상장례는 있다. 그러나 사후(死後)에 극락왕생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나 관음보살이 이승에서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미륵보살이 정토세계를 보증해 준다는 믿음을 성리학은 주지 못했다. 조선 왕실과 집권층 중 일부도 성리학적 질서 위에서 살고 있었지만 죽어서는 극락왕생을 도모하려고 했다. 이런 이유로 불교의 내세관과 그에 기반한 불교 의례는 사대부들조차 거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고려시대 때 태어난 조선 전기의 왕과 왕비, 그리고 훈구(勳舊)세력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신앙세계인 불교를 배척하지 않으려고 했다. 불교의 법식과 재회는 이렇게 순전히 조선 지배층의 필요에 의해 유지되었다.

태조는 백고좌(百高座) 법석을 열었고, 괴변(怪變)을 물리치고자 자운사·광암사·지천사 등에 사람을 보내 소재법석(消災法席)을 베풀기도 했다. 또 태조는 직접 경천사에 거동해 신덕왕후의 영을 위로하는 화엄 법석을 펴기도 했다. 태종 또한 기우(祈雨) 법석을 베풀었는데 비가 조금 내렸다고 전한다. 그리고 국상(國喪)이 났을 때 수시로 빈전(殯殿)에 들러 〈화엄경〉·〈능엄경〉·〈원각경〉 그리고 〈법화경〉으로 참경(懺經) 법석과 49재[칠칠재] 동안 오일법석을 베풀기도 했다. 세종도 대자암에 향과 축문을 보내 대비의 원(願)을 위해 기도했다.

물론 이와 같은 왕실의 모습은 사대부 관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사대부 관료들은 궁극적으로 불교 의례의 혁파를 주장했지만, 왕실과 종친 그리고 양반층과 민중들의 신심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불교 의례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이에 맞서는 성리학적 대안을 제시하고 사회적 승인을 얻어야 했다.

실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 일을 비교적 잘 해낸 편이다. 법석을 폐지하고, 제사를 올려야 할 대상[조상]이 아닌 대상[타 조상·타 신격]에게 제사를 올리는 일을 ‘음사(淫祀, 그릇된 제사)’로 규정하면서 타자(他者)를 위한 불교의 공덕과 무연자비의 실천을 막아나갔다. 사실 그들이 불교 의례를 막은 목적에는 백성들이 지나치게 불교 의례에 많이 참여하는 걸 막고, 농사를 장려하려는 애민(愛民) 정신도 숨어있었다. 이로 인해 왕과 왕비를 위해 인근 사찰을 찾아 공덕을 비는 행위라든지, 산천에 기도드리는 행위, 별자리에 치성드리는 행위, 기우제를 지내는 행위 등 고려 때는 일반인도 참여할 수 있었던 의례가 조선에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대신 이런 의례들은 국가 의례에 편입됐는데,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1484)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은 주자가 꿈꾸던 성리학을 실현한 나라가 되었을까? 조선의 똑똑한 사대부들은 주자의 이상향을 법전에 명시했지만, 세상사 법령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당장 조선 왕실은 여전히 불교 의례를 ‘수륙재’라는 이름으로 설행하고 있었다. 물론 수륙재도 위축되어 세종대를 거치면서 수륙재에서 법석이 혁파되기에 이른다. 또한 세조 이후 임금들은 주요한 의례에서 수륙재를 베풀지 않기도 했다. 그럼에도 성리학의 약점은 좀처럼 보완되지 않았다. 심지어 공자가 남긴 ‘사람도 섬기지 못하는데,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라는 명제는 유교가 죽음 이후의 내세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족쇄가 됐다. 죽음과 관련한 왕실과 민중의 여망이 불교 의례를 존속하게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조선 개국 후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으려던 계획은 불교 의례를 둘러싸고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공자가 남긴 ‘사람도 섬기지 못하는데,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라는 명제는 유교의 내세관에 큰 족쇄가 됐다. 죽음에 대한 왕실과 민중의 여망이 불교 의례를 존속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경주 기림사 시왕도의 일부.
공자가 남긴 ‘사람도 섬기지 못하는데,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라는 명제는 유교의 내세관에 큰 족쇄가 됐다. 죽음에 대한 왕실과 민중의 여망이 불교 의례를 존속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경주 기림사 시왕도의 일부.

왕릉 주변 수사찰의 존재 이유

무엇보다 유교 의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되고, 그 기운이 차츰 옅어지고 흩어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성리학은 사후세계에 대해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고, 죽음 직전에 편안한 사람은 곧 스스로 없어진다고 믿은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에 굴복하지 않아 강한 기운이 흩어지지 않거나 억울하게 죽어 원한이 풀리지 않는 등 비정상적인 죽음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한 의문을 유교 의례는 풀어주지 못했다. 더욱이 수십 년 전(고려말)까지만 하더라도 ‘사람이 죽으면 저승사자에게 끌려가 염라대왕 앞에서 심판받고 최대 49일 후 다음 생을 부여받는다.’고 인식했던 사람들에게, ‘죽으면 혼백은 흩어지고 스스로 없어진다.’라고 납득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은 남녀노소, 부귀빈천을 막론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치관 변화의 요구였다. 그래서 조선 전기의 왕실은 유학자들이 알아들을 법한 충(忠)과 효(孝) 그리고 인정(人情)의 도리를 내세우면서 불교의 수륙의식을 이어 나갔다.

의례는 ‘종교’보다 더 직접적이면서도 추상적 관념은 약하다. 그래서 종교가 없는 곳에서 설행되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불교를 배척하면서도 불교 의례의 설행은 묵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례는 ‘의례화의 감각(Sense Of Ritualisation)’을 창조하고 의례의 형태를 만들어 나가면서 이질적인 요소를 걸러내는 작용을 한다. 이런 이질적인 요소는 승려들이 의례를 주관한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유교 의례는 별도로 사제를 두지 않아도 의례를 행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 의례에서 승려는 분명히 ‘전문 사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불교 의례와 유교 의례는 관념적 세계관을 떠나서 실제 형식과 절차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에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가령 고려시대 왕과 왕비가 부처님 전에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게 없었지만, 조선에서 왕이 부처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하는 행위는 유학자들의 가치관에서 볼 때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 왕실과 일부 집권층은 급박한 현실의 문제나 죽음의 문제에 대해 불교 의례에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었다. 너무도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성리학적 입장에서 수륙재는 불가피하게 선택한 의례적 도구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주자가 꿈꾸던 성리학적 질서의 실현을 넘어 불교 의례와 유교 의례가 혼융(渾融)된 문화를 낳았다.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의 왕릉 주변 수사찰(守寺刹)들의 존재가 바로 그 증거다. 이렇게 조선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유교와 불교의 두 날개로 날기 시작했다.

조선 초 왕실과 일부 집권층은 죽음과 관련해 불교 의례에 상당 부분을 의존했다. 조선 왕릉 주변 수사찰(守寺刹)이 그 증거다. 정릉 흥천사는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자 왕비인 신덕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원찰이다. 〈금강신문 자료사진〉
조선 초 왕실과 일부 집권층은 죽음과 관련해 불교 의례에 상당 부분을 의존했다. 조선 왕릉 주변 수사찰(守寺刹)이 그 증거다. 정릉 흥천사는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자 왕비인 신덕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원찰이다. 〈금강신문 자료사진〉
심일종

현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서울대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서울과기대·안동대에서 인류학·민속학 관련 과목을 강의한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과 불교문예연구소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박사논문으로 〈유교 제례의 구조와 조상관념의 의미재현〉과 〈조선시대 유·불의례의 상관성 연구〉가 있으며, 〈조선전기 국행수륙재 찬품 연구〉·〈조상, 신령 그리고 신을 위한 기도〉 등의 논문이 있다. 〈연어를 따라간 인류학자〉·〈유교와 종교의 메타모포시스〉·〈신과 인간이 만나는 곳, 산〉 등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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