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 장식한 광배와 대좌
신라 장인 예술혼 깃들어

금동불입상, 통일신라 8세기 후반-9세기, 높이 30cm, 국립중앙박물관.
금동불입상, 통일신라 8세기 후반-9세기, 높이 30cm, 국립중앙박물관.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존재로서 일반인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32가지 모습과 82가지 특징, 즉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를 지닌다고 알려져 있다. 이 특징 가운데는 우리가 잘 아는 부처님의 모습처럼 튀어나온 정수리인 육계나 나선형으로 돌돌 말린 소라 모양 머리 등이 있고, 전혀 현실에서는 보기 어려울 것 같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팔이나 물갈퀴 같은 특징도 있다. 부처님의 모습을 재현한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불상에 이 모든 특징을 담지는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금빛으로 빛나는 부처님의 모습만큼은 도금하여 잘 표현했다는 점이다.

감탄 속 늘어나는 궁금증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은 불상의 광배로 묘사하는데, 아쉽게도 고대 불교조각 가운데 금동불상의 광배가 잘 남아있는 사례는 많지 않다. 광배가 잘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불상과 광배를 따로 만들어 부착하고, 광배는 불상보다 얇고 섬세하게 만들었기에 세월이 흐르며 분리되고 쉽게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경주 구황동 삼층석탑 내 사리함 안에서 발견된 금제 불입상과 금제 불좌상은 통일신라 불상 가운데 온전하게 불상과 광배가 남은 대표적인 예이다. 탑 안에 보관되었기에 잘 보존되었을 뿐만 아니라 재질이 순금이라는 점에서 삭아 없어지지 않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가운데는 2014년 미국에서 환수한 통일신라시대 불상이 있는데, 불상과 광배가 온전히 남아있는 사례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전시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연화대좌 위에 굳건히 서서 장엄한 자세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으며 근엄한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살며시 미소를 머금은 불상이다. 불상을 마주하게 되면 전시실에서 광배 없는 불상을 바라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부처의 위용이 느껴진다. 대좌부터 광배까지 높이가 약 30cm에 이르는데 나의 눈은 부처님에게 모아지지만 부처님의 몸을 감싼 빛과 부처님의 몸을 받친 대좌가 존귀한 부처님의 위엄을 드러낸다. 불상의 육계, 가슴과 팔, 두 발 등 여기저기 녹이 남아 있지만 녹을 제거한 불신(佛身)에서 화려한 금빛이 빛을 발한다. 천년도 더 흐른 오늘날에도 눈부실 정도이니 처음 불상을 조성했을 때는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상상해 본다.

그렇다고 한없이 부처의 모습이 근엄한 것만도 아니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리고 왼손을 들어 올린 자세는 불상의 손모양인 수인(手印)이 지닌 그 어떤 상징적 의미보다 편안한 의미로 다가온다. 하루하루 지치고 생각이 많은 나에게 부처님이 두 팔을 벌려 다가올 듯하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흔들릴 것 같지 않은 굳건함이 이리저리 요동치는 나의 마음을 다독여 줄 것 같다.

그리고 불상 주변을 찬찬히 보면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광배와 대좌가 눈에 들어온다. 광배와 대좌는 원형이 잘 남아있는데 근엄하고 평면적인 얼굴이나 신체 표현과는 달리 광배와 대좌는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광배를 바라보면 화려한 문양이 유독 먼저 눈에 띈다. 통일신라시대 금동불 중 광배까지 남아있는 사례가 많지 않기도 하지만, 남아있는 광배들도 크기가 소형이 많고 게다가 이렇게 보석까지 달린 사례는 드물다.

처음 이 불상을 사진으로 보았을 때는 실제로는 어떤지 궁금했는데, 실물을 보면 일단 ‘사진보다는 실물이 좋은 부처님이시구나!’하고 감탄하게 된다. 그러고 다시 불상을 여기저기 보면 다시 궁금증이 생긴다. 이처럼 대좌와 불상이 있는 금동불상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그렇기도 하고 자꾸 들여다보면 안 보이던 것이 하나 둘 눈에 띄며 궁금증이 늘어난다. 그래서 그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가다 보면 과거에는 몰랐던 사실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도 한다. 최근에는 현미경 들여다보듯 꼼꼼히 살펴볼 수 있는 과학적인 조사 기회가 있어서 궁금증 해소에 도움이 됐다.

금제 불좌상, 경북 경주시 구황동 삼층석탑 출토, 통일신라, 706년 경, 높이 12.0cm, 국보, 국립중앙박물관(왼쪽). 금제 불입상, 경북 경주시 구황동 삼층석탑 출토, 통일신라, 692년 경, 높이 14.0cm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금제 불좌상, 경북 경주시 구황동 삼층석탑 출토, 통일신라, 706년 경, 높이 12.0cm, 국보, 국립중앙박물관(왼쪽). 금제 불입상, 경북 경주시 구황동 삼층석탑 출토, 통일신라, 692년 경, 높이 14.0cm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불상 광배, 보석으로 장식

이 불상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도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불상에는 다양한 장식 기법이 총 망라되어 있는데, 이목구비의 경계선은 조각도로 한 번에 팠다. 반면 신체의 옷주름·손금·광배의 윤곽선 등은 삼각정으로 찍어 새겼다. 하나의 불상 안에 조금씩 선을 다르게 파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신체·광배 등의 윤곽선을 새길 때 사용한 삼각정 자국은 길이가 불과 1.5mm에 불과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예리한 정으로 톡톡톡 두드려서 윤곽선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면 통일신라시대 장인들은 우리보다 눈이 훨씬 좋았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삼각정을 만들 뛰어난 도구 제작 기술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육안으로는 잘 구분되지 않으나 흠잡을 곳 없어야 할 부처님의 얼굴 표현에 더 공을 들여 만들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불상과 함께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것은 광배의 형태였다. 광배에는 넝쿨무늬와 불꽃무늬를 맞새김, 즉 투조하였으며 머리 뒤의 연꽃 모양은 테두리를 따서 안으로 살짝 들리게 만들었다. 통일신라 8세기 후반부터 9세기까지 불상의 신체는 석굴암과 달리 점점 경직된 모습으로 제작되는 반면 광배의 무늬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특히 금동불 광배의 경우는 금속이라는 재질상 좀 더 정교하고 세밀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흐름이 더 잘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광배의 경우 더 주목할 점은 바로 보석 장식이다. 하얀색 수정과 붉은색 마노를 잎이 달린 꽃받침 장식에 삽입한 후, 이를 긴 대에 연결하여 두광·신광의 테두리에 못으로 고정하였다. 부착 방법에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광배와 광배 하단 양옆 보석 장식 위에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두 손을 모은 비천이 연결되어 있다. 대좌 부분에도 보석을 감입(嵌入)한 꽃잎 모양의 장식이 남아있는데, 이를 대좌에 고정한 방식이 독특하다. 꽃모양 장식이 달린 원형 고리에 상대와 중대 부분을 끼운 후 이를 복련 형태의 하대에 접합하였다.

2014년 이 불상이 미국에서 환수되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 될 당시에는 이와 같이 불상 광배에 보석을 장식한 사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이 불상은 광배와 대좌에 수정과 붉은 마노를 장식한 최초 사례”라고 기사화되기도 했고, 많은 학자나 언론에서는 주로 1982년 중국 닝보(寧波)시 천봉탑(天封塔) 지궁(地宮·탑의 지하)에서 출토돼 2009년 닝보시박물관에서 공개한 통일신라 금동불 광배의 진주 장식과 비교하였다. 박물관에서의 과학적 분석 결과와 제작 기법으로 현대의 주조품이 아닌 통일신라시대 제작임이 확인된 상황이지만, 학계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보면 대부분 “상태가 완벽하고 도금이 잘 남아있어서 사진만 봤을 땐 위작인 줄 알았으나 실물을 보니 통일신라시대 제작이었다.”고 답하곤 했다.

금동불입상의 광배와 장식, 비천상의 세부 모습.
금동불입상의 광배와 장식, 비천상의 세부 모습.

경주 동궁과 월지 출토 광배

그런데 사실 닝보의 불상이 알려지기 한참 전, 우리는 이러한 광배를 발견하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었다. 바로 1974~1976년 경주 동궁(東宮)과 월지(月池)에서 출토된 광배 편이다. 동궁과 월지는 구 안압지의 개정된 명칭이다. 비록 불상은 남아있지 않지만 매우 유사한 형태의 광배 편이 남아있다. 특히 이 광배 외에도 월지에서는 보석을 감입한 꽃받침 형태나 보석이 부착된 화불(化佛)이 많이 발견되었다. 월지에서 다양한 크기의 수많은 수정·자수정·옥 등의 보석이 대량 발견되어 이러한 장식 기법은 통일신라 장식의 한 유형임을 알 수 있게 했다.

불상 양식 역시 월지에서 유사한 형태의 불상이 발견되고 있다. 지금은 공개된 정보가 많아 인터넷에서 검색만 하면 자료가 쏟아져 나오지만, 여전히 발굴된 모든 편을 한번에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월지 출토 광배는 이미 알려져 있지만, 때로 천착하고 또 천착해야 보이는 자료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 외에도 금동불입상은 불상·광배·대좌의 형태와 양식뿐만 아니라 불상 등 부분의 흙을 긁어낸 주조 구멍의 형태, 목 아래의 광배와 연결한 촉의 흔적, 광배와 대좌의 고정 상태 등 여러 가지 학술적으로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금동불입상이 온전하게 보전되어 여러 새로운 사실을 알려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불상이 땅속에서 발굴된 것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몇 년 전 강원도 양양 선림원지에서 출토된 금동관음보살상이 최근 보존처리를 마치고 2024년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된다고 한다. 금동관음보살상은 훨씬 더 압도적인 크기와 뛰어난 주조 기술을 보여준다. 그러나 광배는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완전하지 않고 불상도 발굴 당시에는 많은 보존처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금동불입상이 이렇게 온전한 형태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땅에서 나온 발굴품이 아니라 석탑 안 사리함과 같이 어딘가에 오랜 세월 보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불상에는 여전히 여기저기 청동녹이 남아있는데, 한때는 청동녹을 마저 제거하면 정말 아름답고 화려한 부처님의 모습이 세상에 드러나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보니 지나온 세월의 더께(물건에 앉은 찌든 때) 역시 또 하나의 역사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 듯싶다. 이 청동녹 하나에 얼마나 무궁무진한 과거의 진실이 담겨있을지 모를 일이다.

금동불입상 측면, 통일신라 8세기 후반-9세기, 높이 30cm, 국립중앙박물관.
금동불입상 측면, 통일신라 8세기 후반-9세기, 높이 30cm, 국립중앙박물관.
광배, 월지 출토, 통일신라 8세기, 높이 27.2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광배, 월지 출토, 통일신라 8세기, 높이 27.2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금동 장식보주. 월지 출토, 통일신라 8세기, 높이 8.3cm 내외, 국립경주박물관.
금동 장식보주. 월지 출토, 통일신라 8세기, 높이 8.3cm 내외, 국립경주박물관.
동궁과 월지 전경. 〈사 진= 문화재청〉
동궁과 월지 전경. 〈사 진= 문화재청〉
신소연
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미국, 한국미술을 만나다’(2012) 개최, 반가사유상실·불교조각실 개편(201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조각조사보고〉 발간(2014·2016), 특별전 ‘발원, 간절한 바람을 담다’(2015) 개최, 반가사유상실 ‘사유의 방’ 개관(2021) 등의 업무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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