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마지막 달에 이르렀습니다. 찬 바람 속에 시작했던 2023년이 다시 찬바람의 골짜기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남풍을 따라 기온이 올라가고, 올라간 기온을 받아 새잎이 돋고 꽃이 피었으며, 꽃핀 자리에 열매가 맺고 새잎은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리고는 열매가 익었고 잎은 떨어져 뿌리로 다시 돌아갔으니 또 이렇게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한 해라는 시간의 끝은 또 새로운 해의 시작입니다. 생성의 끝이 소멸이고 소멸을 딛고 다시 소생하는 것이 천지만물의 윤회입니다. 그 윤회 속의 무상을 아는 것이 부처를 이루는 공부의 출발이라 했습니다. 윤회란 미세하게 보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고, 크게 보면 한 찰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의 티끌에도 시방세계가 들었다[一微塵中含十方]’는 도리를 가르치는 <화엄경>의 눈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한 번쯤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때라는 것입니다. 인과의 흐름 속에 살아 있는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성찰함으로써 다가올 시간을 준비하며 보다 향상된 삶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자신을 성찰할 줄 알아야 악업을 줄이고 선업을 늘려갈 수 있으며 타인과의 관계도 발전합니다. 그래서 한 해의 마지막 달은 성찰과 반성 그리고 새로운 다짐의 시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선법(善法)의 출발은 고요함입니다. 겨울의 헐벗은 나뭇가지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두꺼운 얼음장 밑에 흐르는 물이 봄날 새 생명의 근원이 되듯이 고요함에서 생기가 소생하고 적멸에서 참다운 법이 형성되어 우주 법계를 장엄합니다. <법화경>의 사구게를 되새겨 보십시오. 

‘제법종본래(諸法宗本來) 상자적멸상(常者寂滅相) 불자행도이(佛者行道已)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

불자가 알아야 할 것은 적멸은 멈춤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엄청난 에너지라는 것입니다. 겨울을 죽음의 계절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편협한 것입니다. 멈춤의 시각으로 보면 겨울이 죽음의 계절일 수 있지만, 무한히 반복하는 생성과 소멸의 질서 즉 인과와 윤회의 관점에서 볼 때는 겨울이야말로 새로운 생명을 축적하고 활동의 에너지를 생성하는 계절입니다. 그러므로 12월은 시간상으로 한 해의 끝일 뿐입니다. 적멸의 시간으로 채워지는 겨울 없이 어떻게 새봄의 활기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적멸상’을 응시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욕망에 이끌리면서 스스로 적멸의 도리를 놓치기 때문에 갈등과 번뇌와 다툼에 갇히게 되는 겁니다. 적멸의 이치를 알고 스스로 고요하고 스스로 침착하며 스스로 지혜로운 삶을 지향하면 자유와 평화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달마대사가 제자 되기를 청하는 수행자에게 “불안한 그 마음을 가져오너라.”라고 추궁한 그 한 마디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미혹함을 떨치고자 헐떡거리는 그 간절함도 초월하여 적멸에 들지 않으면 도는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온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조차 초월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자적멸상’의 이치를 궁구하지 않고 팔만대장경을 다 외운다고 해도 번뇌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불자는 한 해를 보내며 적멸의 위대함을 깊이 궁구해야 합니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알아야 하고, 여기서 시작된 신심과 원력이 억겁 생을 거듭하도록 변함이 없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흔히 연말에 이르러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렇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다사다난입니다. 중생의 몸으로 중생계에 온 이상 다사다난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일을 부정적으로 볼 일이 아닙니다. 

별별 일을 다 겪는 것이 인생이고 보면 그 숱한 일들 없이는 인생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 일들에 이끌려 가는 고통과 그 일들을 이끌고 가는 즐거움이 있을 뿐입니다.

이 겨울,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끌고 가는 삶을 위해 스스로 고요하고, 스스로 청정하고, 스스로 굳건해지는 길을 닦아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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