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금제 허리띠 2점·조선 불상 등 보물 지정 예고

부안 내소사 동종.
부안 내소사 동종.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고려 후기 동종을 대표하는 ‘부안 내소사 동종(扶安 來蘇寺 銅鍾)’을 국가지정문화유산 국보로 지정 예고하고, 신라시대 고분문화를 보여주는 ‘경주 금령총 출토 금제 허리띠(慶州 金鈴塚 出土 金製 銙帶)’와 ‘경주 서봉총 출토 금제 허리띠(慶州 瑞鳳塚 出土 金製 銙帶)’를 비롯해 조선시대 불상 등에 대해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먼저 1963년 보물로 지정됐다 이번에 국보로 지정 예고된 ‘부안 내소사 동종’은 고려 후기 동종 가운데 가장 큰 종으로, 통일신라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고려 특징이 잘 드러내는 대표작이자 기준작이다. 종을 만든 내력이 적힌 주종기(鑄鍾記)를 통해 도인 허백(虛白)과 종익(宗益)의 주관 아래 장인 한중서(韓冲敍)가 700근의 무게로 1222년 제작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본래 청림사에 봉안됐다가 1850년(철종 1) 내소사로 옮겨졌는데, 이 내용을 적은 이안기(移安記)도 몸체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부안 내소사 동종은 공중을 비행하는 듯 연출된 역동적인 용뉴, 종의 어깨 부분을 올림 연꽃 문양으로 입체적으로 장식하고 몸체에 천인상(天人像) 대신 삼존상을 부조로 배치한 점, 섬세한 꽃잎으로 표현된 4개의 당좌(撞座), 균형 잡힌 비례와 아름다운 곡률을 가진 몸체 등 뛰어난 장식성과 조형성을 지녀 고려 후기 동종의 본보기가 됐다. 이는 장인 한중서의 숙련된 기술력과 예술성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동종을 제작한 한중서는 13세기 전반부터 중엽까지 활동한 장인으로 민간 기술자인 사장(私匠)에서 시작해 대외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관청 소속의 관장(官匠)이 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38년간 고령사 청동북(1213년), 복천사 청동북(1238년), 신룡사명 소종(1238년), 옥천사 청동북(1252년) 등 여러 작품을 남긴 것으로 확인된다. 이처럼 고려시대 이전 동일 작가가 여러 점의 다양한 작품을 남기고 있는 사례로도 특별한 의미가 있고 그 중 내소사 동종이 대표작품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 동종은 양식·의장·주조 등에서 한국범종사와 제작 기술과 기법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일 뿐 아니라 주종기와 이안기 등을 통해 봉안처·발원자·제작 장인 등 모든 내력을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 국보로 지정해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보물로 지정 예고된 ‘경주 금령총 출토 금제 허리띠’는 신라시대 고분인 금령총(金鈴塚)을 일제강점기인 1924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발굴했을 때 출토된 것이다. 금령총은 무덤 내부에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덧널(槨)을 설치한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이며, 발굴 당시 금관(보물),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국보), 금령 등 의미 있는 유물들이 대거 출토됐다.

목관 안에서 매장자 허리에 착용된 상태로 발견됐는데, 원래 가죽이나 천과 결합된 허리띠였으나 오랜 시간을 거치며 금제 장식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띠고리(鉸具)·띠꾸미개(銙板)·띠끝꾸미개(帶端金具)·드리개(腰佩)로 구성되는데, 드리개의 경우 다른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드리개보다 길이가 짧은 것으로 보아 고분 주인이 미성년임을 추론해볼 수 있다.

이외에도 금실이 감긴 연필형(원뿔형) 드리개, 곡옥의 모자 부분에 난집을 두르고 유리를 채워 넣어 장식하는 방법 등은 다른 허리띠에서 확인되지 않는 독특한 사례로 허리띠의 기원과 구성을 고찰할 수 있어 학술적 가치 또한 높다.

‘경주 서봉총 출토 금제 허리띠’는 신라시대 고분인 서봉총(瑞鳳塚)을 일제강점기인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발굴했을 때 출토된 것이다. 쌍무덤(瓢形墳)의 북분에 해당하는 서봉총 역시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이며, 발굴 당시 금관(보물), 금제 귀걸이, ‘연수원년신묘(延壽元年辛卯)’ 기록이 있는 은제 합 등 유물들이 많이 출토됐다.

서봉총 출토 금제 허리띠에는 신라 금제 허리띠의 전개과정이 잘 반영돼 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황남대총 남분 출토 금제 허리띠 이후 띠꾸미개의 중심 문양은 좌우 대칭으로 표현된 세 잎 무늬로 유지되는데, 서봉총 출토 금제 허리띠의 띠꾸미개는 중심 문양이 뾰족한 형태로, 금관총 출토 금제 허리띠(1962년 국보 지정)의 띠꾸미개와 더불어 가장 화려한 장식성을 보여준다. 또한 다른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제 허리띠의 드리개 장식에는 유리나 옥 등의 재질이 혼용되어 있는데 반해 드리개 장식 대부분이 금제로 이뤄져 있고,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제 허리띠 중 드리개 길이가 가장 길다는 점에서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이런 점에서 서봉총 출토 금제 허리띠는 출토지가 명확하며 띠꾸미개 내부 문양, 드리개 장식의 기법 등으로 볼 때 신라 금제 허리띠 중 가장 먼저 제작된 황남대총 남분 허리띠와 가장 마지막으로 제작된 금령총 허리띠 사이에 위치해 신라 금제 허리띠 제작기술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어 학술적 의미가 높다.

‘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安東 仙刹寺 木造釋迦如來坐像 및 腹藏遺物)’은 수조각승 현진(玄眞)을 비롯해 응원(應元)·수연(守衍)·성인(性仁)·인균(印均) 등 당대 최고 기량을 가진 조각승이 대거 참여해 1622년(광해군 14) 조성한 불상과 복장유물이다.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을 통해 광해군의 정비인 ‘광해군 부인 유 씨(장열왕비, 1576∼1623)’가 발원해 왕실의 비빈(妃嬪)이 출가하던 자수사·인수사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한 11존의 불상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별도로 마련된 왕실의 원당(願堂)에 봉안됐던 것으로, 왕실 원당에 봉안된 원불의 실체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독존의 석가여래로써, 머리가 크고 무릎이 좁으며 뺨에는 살이 통통하게 올라 양감이 있어 전체적으로 귀여운 인상을 준다. 동시에 다부진 체구, 진중함이 드러나는 이목구비, 왼쪽 어깨와 하반신의 옷주름 표현 등에서 조각승 현진의 양식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이 불상의 복장에서 조성발원문과 함께 ‘병자생왕비유씨명의(丙子生王妃柳氏命衣)’라는 묵서가 적힌 광해군 부인 유 씨 개인의 저고리가 발견됐다. 이는 왕비의 개인적인 발원으로 이 불상이 제작됐음을 보여주고, 동시에 17세기 조선 왕실 복식이 완전한 형태로 발견됐다는 점에서 한국복식사 연구에도 매우 귀중한 자료다. 이런 점에서 ‘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은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해 연구하고 보존할 만한 충분한 필요가 있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국보로 지정 예고되는 ‘부안 내소사 동종’과 보물로 지정 예고되는 ‘경주 금령총 출토 금제 허리띠’ 등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유산(국보·보물)으로 지정할 예정이다.

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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