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호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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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삶은 바쁘다. 매일 해야할 일도 많고, 신경 써야할 일도 많기 때문이다. 빨리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늘 바쁘고 여러 가지 걱정에 시달린다. 돈 문제, 자녀 문제, 직장 문제, 인간관계 문제로 걱정하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문제는 사소한 것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소멸하게 되는 죽음 앞에서 모든 삶의 문제는 사소한 것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 즉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모르스 세르타, 호라 인세르타(Mors certa, hora incerta.)’라는 라틴어 명구처럼, 우리의 죽음은 확실하지만 그 시간이 불확실할 뿐이다.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확실성과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속에서 죽음불안(Death anxiety)을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다.

죽음의 문제: 필연적으로 다가올 운명

17세기 프랑스 작가인 라 로슈푸코(La Rochefoucauld, 1613~1680)의 말처럼, 태양과 죽음은 똑바로 바라보기 어렵다.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마음만 불안해질 뿐 뾰족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음의 문제를 외면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막상 죽음이 다가오면 멘붕 상태에 빠져 허둥대며 죽음 공포의 고통을 겪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죽음의 운명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 당시 여러 선지자가 제시하는 죽음 대처법에 만족할 수 없었던 부처님은 출가하여 6년간의 수행 끝에 마침내 그 해결책을 발견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죽음의 운명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죽음을 고통으로 여기는 자신의 마음을 가장 깊이 치열하게 성찰한 사람이다.

종교의 중요한 기능은 죽음에 대한 대처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신(神)이나 사후생(死後生)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신과 사후생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불교는 신을 가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에 대한 대처방법을 제시하는 종교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위대함은 초월적 존재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죽음에 대처하는 최고의 방법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죽음불안의 실체

21세기에야 비로소 죽음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죽음학(Thanatology)’이라는 분야가 탄생했다. 죽음학은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를 의학·심리학·사회학·종교학 등 여러 분야에서 연구하는 다학제적 학문이다. 죽음을 연구하는 심리학자에 따르면,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한데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죽어가는 과정에서 겪게 될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어가는 과정에서 겪게 될 육체적 고통, 자존감과 존엄성의 훼손,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죽어가는 과정을 품위 있게 맞이하고 싶은 소망’과 ‘좀 더 오래 살고 싶은 소망’ 사이의 갈등을 반영한다.

둘째는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은 자기 존재와 자기의식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음불안의 핵심에는 ‘소멸불안(Annihilation anxiety)’이 존재한다. 소멸불안은 자기 존재가 영원히 소멸하는 것에 대한 불안으로서 가장 강렬하고 심층적인 불안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의식의 소멸로 인해 더 이상 세상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의 암흑에 영원히 갇히게 될 뿐만 아니라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무력한 상태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려운 세 번째 이유는 가족을 비롯한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이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단절은 죽음불안의 핵심적 요소 중 하나다. 또한 자신이 죽고 난 이후에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게 될 역경이나 고통에 대한 걱정, 자신이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무력감, 그리고 사후세계에서 겪을지 모르는 심판과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불안을 가중시킬 수 있다.

죽음은 불안과 고통과 공포의 원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한 주된 이유도 죽음의 운명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기 위함이었다. 이미지는 열반을 앞둔 부처님의 모습.
죽음은 불안과 고통과 공포의 원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한 주된 이유도 죽음의 운명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기 위함이었다. 이미지는 열반을 앞둔 부처님의 모습. ⓒGettyimagesBank

죽음불안에 대한 심리적 방어

죽음을 생각하면 불안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불안을 회피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어적 전략을 사용한다. 첫째는 “아직은 아니야.” 전략으로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인간수명은 120세까지 가능해.”, “죽음은 저 멀리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난 아니야.” 전략으로서 자신은 특별한 예외적 존재라서 죽음의 운명이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셋째는 “신이 나를 구원해 줄 거야.”라고 믿는 것이고, 넷째는 죽음에 관한 생각과 대화를 회피하며 다른 관심사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건강과 장수에 대한 과도한 관심, 자녀와의 심리적 융합, 집단과 이념에 대한 동일시, 돈과 성취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날 수 있다. 사람들은 죽음불안을 회피하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방어적 전략을 채택하지만 나름대로 독자적인 전략을 사용할 수도 있다. 죽음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어떤 방어적 전략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삶의 모습이 현저하게 달라진다.

영원히 사는 방법: 불멸 추구

인간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자 하는 집요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 영원히 살려는 욕망, 즉 불멸(不滅) 추구는 인류가 문명을 창조하게 된 중요한 원동력이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은 육체와 정신의 소멸을 부정하고 불멸을 추구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불멸을 추구하는 첫 번째 방법은 불로장생하며 육체적으로 영생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늙지 않고 오래 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 왔다. 진시황은 불로초와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사방으로 신하를 보냈다. 육체적 영생을 위한 모든 노력은 실패했지만,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질병과 노화를 극복하고 무병장수를 누리기 위한 의학적 추구가 지속되고 있다.

두 번째 방법은 죽었다 살아나는 것, 즉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죽음의 특징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부활의 희망을 키워나갔다. 이집트의 미라에서 볼 수 있듯이, 이집트인들은 사망한 육체가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니고 육체를 정성스럽게 보존하려고 노력했다.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인간이 사망으로부터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티베트불교에서 주장하는 환생도 죽은 사람의 영혼이 새로운 육체를 얻어 삶을 이어 나가는 부활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불멸 추구의 세 번째 방법은 정신적인 존재로 영원히 살아남는 것이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의 이원론을 통해 육체는 소멸하더라도 정신은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추구했다.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는 썩어 소멸하더라도 정신적 존재인 영혼은 영원히 살아남는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동서고금의 모든 문화권에는 비물질적인 형태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존재하며 영혼·영체·신비체·아트만·혼백·귀신 등의 다양한 용어로 지칭되고 있다.

불멸을 추구하는 또 다른 방법은 자신의 흔적, 즉 유산을 남기는 것이다. 성취와 업적을 통해 역사에 이름을 남김으로써 자기 존재의 불멸을 추구하는 것이다. 자손을 남기는 것도 자신의 흔적과 유산을 미래로 연결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처럼 인간은 죽은 후에도 자신의 존재를 이어갈 수 있는 다양한 유형의 유산을 통해 불멸을 추구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불교의 대처방법

석가모니 부처님은 6년간의 수행을 통해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대처방법을 발견했을까? 그것은 인간의 존재 상황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것에 의지해서 생겨난다는 연기(緣起)의 깨달음이다. 이러한 연기의 깨달음은 사법인(四法印)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깨달음, 인간의 삶을 비롯하여 변화하는 모든 것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이므로 괴로움이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깨달음, 모든 것은 본래의 자체적인 속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깨달음,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의 깨달음이다.

불교 수행은 사법인의 진리를 마음 깊이 새기는 것이다. 사법인을 마음에 새기면 영원히 살고 싶은 헛된 욕망 즉, 불멸을 추구하는 허망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된다. 나아가 죽음불안의 주체인 ‘나’라는 의식도 공(空)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사명대사 유정(泗溟大師 惟政)은 삶과 죽음에 대한 불교적 관점을 시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과 같고,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뜬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죽고 살고 오고 가는 것이 모두 그와 같다.”

죽음불안에서 벗어날수록, 더 깊은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죽음불안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수록, 삶은 더욱 가볍고 자유로워진다.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려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음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항상 죽음에 쫓기는 삶을 살게 된다.

죽음 준비를 위한 마음 수행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잘 살다가 잘 죽은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사는 웰리빙(Well-living)과 삶을 잘 마무리하는 웰다잉(Well-dying)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과제다. 삶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웰리빙과 웰다잉은 별개의 과정이 아니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고, 잘 죽어야 잘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웰리빙은 웰다잉을 위한 필수적 조건이며, 웰다잉은 웰리빙의 마지막 과정이다. 아무리 멋진 삶을 살았더라도, 죽어가는 과정이 고통스럽고 비참하다면 잘 산 인생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으며, 그곳에 이르는 만 개의 길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에게 죽음이 어떻게 찾아올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 자세를 지니기 위해서는 관조(觀照)의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수행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일상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뿐만 아니라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과정에서 직면하게 될 혼란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심리적 능력을 함양하기 위함이다. 자욱한 안개처럼 다가오는 죽음불안과 시커먼 폭풍처럼 밀려드는 죽음공포에 휘말려 들지 말고 무상한 몸과 마음의 변화를 공(空)한 것으로 바라보며 담담히 미소 지을 수 있는 관조적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티베트의 수행자처럼 의식의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에 휘몰아치는 공포와 유혹의 환상들을 맑게 깨어 바라볼 수 있으려면 명상수행을 통해 관조의 힘을 길러 두어야 할 것이다.

불교의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에는 죽음의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소 치는 목동인 다니야(Dhaniya)는 폭우가 몰아치는 기나긴 우기(雨期)를 앞두고 스승에게 말한다.

“저는 충분한 양식도 마련했고 우유도 넉넉하게 짜 놓았습니다. 저는 강변의 높은 언덕에 가족과 함께 살 움막을 지어 지붕도 새로 이었고 불도 따뜻하게 지펴 놓았습니다. 이제 많은 비가 내려도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스승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든 집착을 내려놓았고 분노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강변 언덕에서 잠시 쉬었다 갈 것이다. 나의 움막에는 비를 막아줄 지붕도 없고, 욕망의 불도 모두 꺼졌다. 나는 이제 많은 비가 내려도 아무런 걱정이 없다.”

사람마다 죽음의 운명에 대처하는 방법은 각기 다르다. 옷 젖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폭우를 피할 궁리를 하지만, 옷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폭우를 흔쾌히 온몸으로 맞을 수 있다. 17세기에 독일의 한 가톨릭 신부가 말한 것처럼, “살아서 죽는 자는 죽을 때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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